김구

金九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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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한국의 정치가·독립운동가. 상하이[上海]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임되었다. 신민회, 한인애국단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백범김구선생 동상
출생-사망 1876.8.29 ~ 1949.6.26

출생과 동학입교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호 백범(白凡), 아명 창암(昌岩), 본명 창수(昌洙)였으나 구(九)로 개명, 법명 원종(圓宗), 초호 연하(蓮下)이다.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했다. 15세 때 한학자 정문재(鄭文哉)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1893년 동학(東學)에 입교하여 접주(接主)가 되고 이듬해 팔봉도소접주(八峯都所接主)에 임명되어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1895년 만주로 피신하여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에 가입하였다.

이듬해 귀국하여 안악으로 돌아가던 길에 치하포(鴟河浦)에 머무르다가 일본인 쓰치다[土田讓亮]가 조선인으로 변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를 죽이고 그의 시체를 강에 버렸다. 김구는 고향으로 돌아가 머무르고 있다가 해주 감영으로 체포되었다. 그 후 인천으로 압송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고종의 특사로 집행이 중지됐다. 복역 중 1898년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麻谷寺)의 승려가 되었다가 이듬해 환속(還俗), 1903년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9년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로 있다가 이듬해 신민회(新民會)에 참가하고, 1911년 '안악사건'으로 체포되어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복역 중 인천에서 항만 건설 공사 노역을 하였으며, 감형으로 1915년 출옥하여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 농장 농감(農監)이 되어 농촌을 계몽하였다.

상하이 망명과 임시정부 활동

3·1운동 후 상하이[上海]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경무국장(警務局長)·내무총장·국무령(國務領)을 역임하면서, 1928년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 총재가 되었다.

항일 무장투쟁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이로부터 항일무력활동을 시작, 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 1932년 일본왕 사쿠라다몬[櫻田門] 저격사건,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 일본왕 생일축하식장의 폭탄투척사건 등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 등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1933년 난징[南京]에서 장제스[蔣介石]를 만나 한국인 무관학교 설치와 대(對)일본전투방책을 협의하고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했다. 1940년 민족주의자들의 단일조직인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다. 1941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옮길 때 이를 통솔하였고,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하여 그 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을 임명하였다. 1941년 12월 9일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하고, 광복군 낙하산부대를 편성하여 본국 상륙훈련을 했다.

신탁통치 반대운동

1944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다시 선임되었다. 8·15광복으로 귀국하였는데, 임시정부가 미군정으로부터 정부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였으므로 한국독립당 위원장으로서 모스크바 3상회의 성명을 반박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였다.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 부의장, 민주의원 부의장, 민족통일총본부 부총재 등을 역임하며 이승만(李承晩)과 함께 우익 진영을 대표하였다.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협상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였다. 그후 북한으로 들어가 정치회담을 열었으나 실패하였다. 그후 정부수립에 참가하지 않고 중간파의 거두로 있다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으며, 저서로는 《백범일지(白凡逸志)》가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김구 연보
출생 1876.8.29~ 사망 1949.6.26

1876

8월 29일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

1893

동학에 입교.

1895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다 일본군에 쫓겨 만주로 피신.

1903

기독교에 입교.

1909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로 재직.

1911

'안악사건'으로 체포되어 15년 형을 선고 받음.

1915

감형되어 출옥하여 동산평 농장 농감이 되어 농촌을 계몽.

1928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 총재를 지냄.

1932

이봉창, 윤봉길 등의 의거를 지휘.

1935

한국국민당을 조직.

1940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출.

1948

남한 단일 총선을 실시하려는 국제연합의 결의에 반대하다가 북한으로 들어가 정치회담을 열었으나 실패.

1949

6월 26일 경교장에서 육군 포병 안두희에게 암살.

1962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