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규제→은행發 국채 싹쓸이, R의 공포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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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광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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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은행 원화 국채 보유량 78.4조…올해만 8.8조↑
국고채 수익률 하락 일조…경기 침체 심리 '부채질'


국내 6대 은행 원화 국채보유량 추이.ⓒ데일리안 부광우 기자

국내 6대 은행이 보유한 우리나라 국채가 올해 들어서만 9조원 가까이 불어나며 80조원에 육박한 것으로 나타났다. 더욱 날카로워진 정부의 규제 칼날에 은행이 대응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카드가 국채여서다. 문제는 은행들이 국채를 쓸어 담은 영향이 겹치며 관련 금리가 추락을 거듭하자, 시장이 이를 불황의 전조로 읽으면서 한국 경제를 둘러싼 R(Recession·경기침체)의 공포가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24일 금융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말 신한·KB국민·우리·KEB하나·NH농협·IBK기업은행 등 국내 6개 은행들이 가진 원화 채권은 총 78조4229억원으로 지난해 말(69조6182억원)보다 12.6%(8조8047억원)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은행별로 봐도 거의 모든 곳들이 국채 보유량을 확대했다. 신한은행의 원화 국채는 같은 기간 17조7717억원에서 20조5591억원으로 15.7%(2조7874억원) 증가하며 20조원을 넘어섰다. 그 다음으로 기업은행의 원화 국채가 16조4416억원에서 9.1%(1조5022억원) 늘어난 17조9438억원을 기록하며 뒤를 이었다. 하나은행은 15조2810억원에서 14조9689억원으로 2.0%(3121억원) 줄며 조사 대상 은행들 중 유일하게 원화 국채가 감소세를 보였지만, 여전히 여유 있게 10조원 대를 유지했다.

이밖에 우리은행은 8조8568억원에서 9조147억원으로, 농협은행도 7조3203억원에서 8조9709억원으로 각각 1.8%(1579억원)와 22.5%(1조6506억원)씩 원화 국채 보유량이 증가했다. 국민은행의 원화 국채 역시 3조9468억원에서 6조9655억원으로 76.5%(3조187억원)나 늘었다. 국민은행이 들고 있는 국채 규모는 아직 다른 은행들보다 적은 편이었지만, 가장 가파른 증가세로 눈길을 끌었다.

이처럼 은행들이 적극적으로 국채를 사들이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은행들의 가계대출에 금융당국이 메스를 들이댄 풍선효과가 꼽힌다. 은행들은 예·적금 등을 통해 조달한 자금의 절반 가까이를 가계대출에 이용하며 핵심 자산 운용 수단으로 삼아 왔다. 그런데 금융당국이 앞으로 가계부채를 확대할수록 은행의 부담을 키우는 규제를 도입하면서, 이에 따른 짐을 덜 수 있는 수단인 채권의 매력이 부각됐다.

금융당국은 지난해부터 은행의 건전성을 평가하는 잣대인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BIS 비율) 산정 시 담보인정비율(LTV)이 60%를 넘는 주택담보대출의 위험가중치를 기존 35%에서 70%로 상향 조정했다. LTV는 주택을 담보로 돈을 빌릴 때 인정되는 자산 가치 비율이다. 이렇게 되면 은행들로서는 BIS 비율이 떨어질 개연성이 크다. 이 때 가장 좋은 대안이 국채다. BIS 비율을 계산할 때 국채의 위험 가중치는 0%로, 이른바 무위험 자산이다. 가계부채 규제 강화 이후 은행들이 국채 투자에 한층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이다.

아울러 유동성 강도가 높아진 유동성 관리 규제도 은행들이 국채를 더 매입하게 된 요인으로 풀이된다. 금융당국은 2015년 1월 은행들에 대해 80%를 기준으로 도입한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 규제 하한선을 올해 100%까지 올리기로 했다. LCR은 은행에서 예상되는 현금 유출액과 비교해 얼마나 현금화하기 쉬운 자산을 많이 갖고 있는지 보여주는 지표다. 이 때문에 은행은 국채와 같이 유동성이 높은 자산이 많을수록 LCR 관리가 용이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은행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국내 국채 시장에서 제일 큰 손이 됐다. 실제 지난 달 거래량을 기준으로 한국 국채 순매수에서 은행이 차지한 비중은 52.3%로 홀로 절반을 넘어서며 최대를 나타냈다. 같은 기간 주요 매수 주체들의 국내 국채 순매수 비율은 ▲외국인 23.5% ▲보험사 19.8% ▲자산운용사 13.8% ▲자산운용사 4.9% 등 순이었다.

이처럼 은행들의 국채 시장 점유율이 크게 확대된 시점은 금융당국이 대출에 대한 규제 방안을 발표한 지난해 1월 이후다. 같은 해부터 연간 한국 국채 순매수 중 은행의 비중은 43.4%를 기록하며 외국인(22.5%)과 보험사(21.0%), 기금공제(10.4%) 등을 멀찍이 제치고 1위에 올랐다. 이는 규제안이 나오기 바로 전 해인 2017년 은행의 국내 국채 순매수 점유율이 29.5%에 그쳤던 것과 비교하면 껑충 뛰어오른 수치다. 당시만 해도 은행이 한국 국내 순매수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보험사(29.8%)보다 다소 낮았고, 기금공제(22.1%)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이렇게 커진 수요는 가격 상승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채권에서 가격과 수익률은 반비례 관계다. 결국 은행들을 중심으로 한 매수 확대는 국채 수익률을 끌어 내리는 요소란 얘기다. 올해 들어 가시화 한 한국 경제의 부진과 이로 인한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하도 국채 수익률을 낮춘 중요 원인들이긴 했지만, 시장에서의 수요 확대 역시 뒤에서 이를 부채질하고 있는 셈이다.

최근 우리나라 국채 수익률은 1%대에 턱걸이하는 수준까지 떨어지며 국내 채권 시장이 열린 이후 최저까지 추락하며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지난 달 19일 3년물 국고채 금리는 1.095%까지 떨어졌다. 국채 수익률이 1.1% 아래로 낮아진 것은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같은 달 16일 10년물 국고채 금리도 1.172%까지 하락하는 등 올해 8월 장·단기물 전 구간 수익률이 사상 최저치를 경신했다. 이번 달 들어 3년물은 1.3%대로, 10년물은 1.4%대로 국고채 수익률이 만회되긴 했지만, 숨고르기 차원의 단기 조정 아니냐는 불안은 여전하다.

금융 시장에서 국채 수익률은 국가의 경제 현실을 판단하는 대표적인 바로미터로 쓰인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 국채 수익률의 폭락은 대한민국 경제의 활력이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졌다는 신호로 읽혔다. 근래의 국채 시장 흐름을 두고 금융권에서는 경기 침체의 전조란 목소리가 커져 왔다. 여기에 더해 일각에서는 투자와 소비가 살아나지 않으면 디플레이션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부정론이 확산되고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최근 증폭된 우리나라 국채 금리의 하방 압박에는 글로벌 보호 무역주의로 인한 대외 악재 확산이 중요하게 작용했지만, 시장의 안전자산 선호로 수요가 몰린 영향이 중첩돼 낙폭을 키우고 있는 모습"이라며 "특히 각종 규제에 대비하기 위한 은행들의 대량 국채 매입이 이를 가속화시키면서, 채권 지표로 경기를 판단하는 시장의 불안 심리를 더욱 키운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데일리안 부광우 기자 (boo0731@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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