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공수처” 불붙기 전에…“어, 삼촌 새 차 사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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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0.01.23. 오후 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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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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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설날 가족들 ‘차례상 정치토론’…슬기로운 대처법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이념보다 가족이 우선…결론 내려 애쓰지 말고 ‘금칙어’ 정해 감정 대립 최소화해야

‘뒤끝 없는 주제’로 대화 전환하고 그래도 논쟁 땐 팩트로 초반 제압 ‘정공법’ 써볼 만


설 연휴가 왔다. 대체공휴일까지 치면 짧아도 나흘이다. 고향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볍고, 떡국을 내온 아침상은 정겹길 바라지만 꼭 그렇지마는 않다. 안부 전화도 좀체 주고받지 않던 일가친척들을 갑자기 며칠씩 마주하노라면 서먹한 게 오히려 자연스럽다. 적막을 깬답시고 아무 얘기나 끌어다 붙이다보니 다니지도 않는 회사 생활을 묻거나, 식도 올린 적 없는데 배는 언제 불러오냐고 독촉들을 한다.

오랜만의 대화가 악송구를 거듭할 때 결국 TV가 구원투수로 등판한다. 예능, 드라마, 영화를 보면 모두가 행복한데, 또 취향이 제각각인 터라 만만한 게 24시간 뉴스 채널이다. 날씨, 교통체증, 춘제맞이 유커(중국인 관광객)만 나오면 좋겠는데, 하필 총선이 있는 2020년 뉴스의 중심은 ‘정치’다. 더불어민주당, 자유한국당, 바른미래당, 새로운보수당, 정의당, 이해찬, 황교안, 손학규, 안철수, 유승민, 심상정…. 정치인들은 명절에도 열심히들 산다.

떡국을 먹으며 정치의식이 서서히 고양될 즈음 꼭 누군가는 입을 연다. “조국 저 사람은 감옥에 언제 가냐?” 토론이 시작된다.

“조국이 무슨 죄를 지었죠?”

“뉴스도 안 보고 사니? 나도 동창들이랑 ‘밴드’랑 ‘카톡’에서 다 돌려보는데.”

“뉴스에 나온다고 다 사실은 아니잖아요. 아버지, 그거 너무 믿지 마세요. 대부분 가짜뉴스예요, 가짜뉴스.”

“어허이…. 검찰이 다 조사해서 하는 얘긴데, 그걸 안 믿으면 뭘 믿고 사는감?”

“아직 재판은 시작도 안 했어요. 그리고 검찰은 개혁 대상인데 무슨 말씀이세요, 아버지. 이제 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생기는 거 모르세요?”

“공수처? 그건 중국에나 있는 거야. 뭐 또 어디냐. 베네수엘라? 그런 건 공산주의나 하는 거야, 공산주의.”

“공산주의라뇨, 아유, 참. 자꾸 친구분들이랑 지라시 돌려보는 거 그만하세요, 좀.”

어느새 목에 핏대가 선다. 하나둘씩 숟가락을 놓고 슬그머니 밥상을 뜬다. 마당이 있으면 나가서 제기라도 차는 게 낫겠다 싶다. 친척집보다 더 자주 왕래하는 곳이 광화문이나 서초동인 줄 미처 몰랐던 게 패착이다. 이쯤 되면 피가 진한지, 이념이 진한지 헷갈린다. 취업, 결혼, 출산 얘기만 금기는 아닌 셈이다. 살쾡이 피하려다 늑대를 만난다. 설 연휴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상황이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우선 미국 사례를 참고해보자. 도널드 트럼프 정권이 들어서면서 미국 사회의 정치적 분열은 극에 달했고, 시민들의 스트레스 수위는 그만큼 높아졌다. 몇해 만에 만난 트럼프 지지자 ‘술 취한 삼촌’과 ‘캘리포니아 리버럴’ 조카의 살벌한 토론은 시골 마을 곳곳에서 벌어졌고, 번번이 화목한 가족 재회 분위기를 해쳤을 게 뻔하다. 미국 언론들은 일찍이 그 해결책을 고민한 모양이다.

2018년 11월 미국인들이 고향에 모이는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워싱턴포스트의 칼럼리스트 알렉산드라 페트리는 가족 간 정치적 불화 예방법으로 ‘서로 공감하는 주제를 찾아 같은 대화를 되풀이한다’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전혀 다른 주제를 이야기한다’ 등을 제안한 적 있다. USA투데이는 지난해 추수감사절에 맞춰 ‘트럼프시대 추수감사절에 다툼을 피하는 9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뉴욕타임스의 조언은 ‘트럼프를 절대 언급하지 않기’ 등이다. 회피가 상책이란 얘기다.

미국 학계까지 나섰다. 미국심리학회는 지난해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정치대화에서 갈등을 예방하기 위한 지침을 내놨다. ‘중요한 행사 직전엔 자제하라’ ‘견해가 다를 수 있고 바꿀 수 없음을 인정하라’ ‘좋았던 옛 추억을 되살리는 활동을 하라’ ‘합의가 안돼도 적절한 때에 대화를 중단하라’ ‘인종주의자, 사회주의자 등 인신 공격성 발언은 하지 마라’ 등이다.

경향신문 정치부 기자들도 ‘명절 정치토론을 현명하게 하는 법’을 두고 나름 머리를 맞댔다. 답은 비슷하다. 일단 논쟁이 시작되면 ‘결론을 내려고 애쓰지 마라’ ‘금칙어(문빠·수구꼴통·빨갱이 등)를 정해 감정의 골을 최소화하라’ 등이다. ‘정치대화는 가급적 회피하는 것이 최선’이란 의견도 나왔다. ‘조국’ ‘문재인’ ‘황교안’ ‘검찰’ 같은 단어가 들리면 못 들은 척 딴짓을 하거나, “새 차 사셨네요”라며 화제를 돌리고, 그것도 안되면 아예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란 것이다.

‘비겁한’ 대응이지만 마음의 안정에는 최고다. 이념이 대수인가 가족의 화목이 우선이지. 극단적으로는 ‘지금이라도 스카이스캐너(항공권 검색앱)를 열자’며 도피를 해결책으로 꼽은 의견도 있었지만 권하지는 않겠다.

도저히 그냥 듣고 있을 수 없어, 자리를 고쳐 앉으며 토론에 나서더라도 현명하고 무탈한 대화를 위해서는 미국심리학회나 경향신문이 추천하는 이상의 가이드라인을 반드시 지킬 것을 권한다.

드물게 “곰발바닥 요리와 생선 요리를 모두 얻을 수는 없다”며 어설프게 개인사에 간섭하느니 공적인 정치투쟁에 적극 뛰어들라는 주문도 나왔다. 정치는 공기이고 일상이니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란다. 다만 토론의 정도는 ‘팩트(사실)’라는 점을 잊지 말자.

이를테면 ‘공수처는 독재’라거나 ‘공수처는 정의’라는 주장에 “공수처 설치 논의는 1996년 참여연대의 입법청원으로 시작돼 15대 국회부터 법안이 발의됐고, 수사 대상은 고위공직자와 배우자 등 가족을 포함해 7000여명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대통령, 국무총리, 장차관, 국회의원,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판사, 검찰총장, 검사, 광역단체장, 교육감, 경무관급 이상 경찰 등이고요. 수사 범위는 형법에 규정된 뇌물수수 등입니다. 판검사나 경무관급 이상 경찰이 기소 대상에 포함된 경우에만 기소권을 행사하고…”라며 지식을 나열해 초장에 제압을 시도하는 정공법이다. 상대를 멈칫하게 할 최고의 무기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팩트’다. 이를 위해서는 공부가 요망된다.

이 모든 방법을 우회하는 또 하나의 대응법을 제시한다. 집안의 어르신이 정치 얘기를 꺼내시니 받긴 받아야겠는데 대통령이니, 더불어민주당이니, 자유한국당이니 콕 집어 대화를 전개하는 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그렇다고 듣고만 있자니 좀이 쑤신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2018년 9월 추석을 앞두고 쓴 경향신문 칼럼 “ ‘추석이란 무엇인가’ 되물어라”를 소환할 때다.

김 교수가 개진한 해법은 근본적인 정체성에 관한 토론을 시도하는 것이다. 당숙이 “너 언제 취직할 거니”라고 물으면 “당숙이란 무엇인가”라고, “추석 때라서 일부러 물어보는 거란다”라고 하거든 “추석이란 무엇인가”라고 되물으라고 했다. 올 설엔 정치가 가족을 불편하게 하면 한번쯤은 물어야 할 것 같다. “정치란 무엇인가.”

허남설 기자 nshe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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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보적인 뉴스레터 <점선면>, 동네방네 익숙한 공간의 특별한 이야기 '집동네땅'을 씁니다. 책 <못생긴 서울을 걷는다>(2023)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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