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광고로 41년 만에 연락 닿은 두 사람, 마침내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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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1.06.30. 오전 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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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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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8일 한겨레신문에 실린 이 광고 기억나십니까? 이틀 뒤인 5월 20일, 저는 광고를 보고 두 사람이 41년 만에 연락이 닿았다는 소식 전해드렸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만났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후속 보도로 알려드리겠다고 했습니다.

네, 두 사람, 만났습니다. 지난 6월 18일, 광고가 나간 지 꼭 한 달만이었습니다. 41년 전 은신과 도피의 현장에서 이뤄진 만남엔 이들 둘만이 아니라 다른 남성 1명도 함께했습니다. 만남을 둘러싼 절절한 사연은 당사자에게 직접 들었습니다. 기사보다는 본인의 육성을 통해 전해드리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해 당사자의 기고를 싣습니다.

기고문은 1980년대를 보낸 한 청년의 특수한 개인사이자 동시에 사회 운동에 참여했던 대학생이 겪었던 시대의 보편사로도 읽힙니다.

화창했던 1980년 5월 봄날 시작된 3년여의 고행

1980년 5월 당시 저는 스물넷 청년이었습니다. 그해 5월 17일 오후 5시 30분쯤부터 19일 오전 2시쯤 사이에 신발 세 켤레를 잃어버렸습니다.

저는 2021년 5월 18일자 한겨레신문에 ‘한 남자의 안부를 묻고, 찾습니다.’라는 광고를 실었습니다. 저는 예순을 훌쩍 넘겼음에도 ‘이순(耳順)’하지도, 슬픔과 공포와 정별의 기억을 떼어내지도 못한 채 종종 비탄과 상심에 젖어 살아온 듯합니다. 사랑이든 비애든 공포든 심장에 딱 들러붙어 숨어있는 기억은 맘먹는다고 쉽사리 망각되지 않는 모양입니다.

광고를 낸 당일 오후에 강제징집과 군대내의문사 및 녹화사업 진상규명위원회 회원분의 결정적 제보를 바탕으로 키 큰 사나이와 연락이 닿았습니다. 이메일과 전화 통화를 통해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가 1980년 5월 18일 이후 7년여 동안 겪은 신산 고초의 여정은 비록 지금은 제가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드러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한 달 뒤인 2021년 6월 18일 낮 12시 무렵부터 약 2시간 동안 서울 이화여대 수영장 근처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1. 그와의 인연은 이렇습니다.

우리 둘은 1980년 5월 16~17일 이화여대에서 열린 이틀 일정의 전국대학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철야 회의가 끝날 무렵인 17일 오후 5시 30분쯤 지쳐 회의실 맨 뒤 나무의자 밑에 흰 고무신 벗어 놓은 채 잠에 빠져 있었던 저와 그 시각 우연히 회의실 출입문 근처에 있었던 그는 “계엄군이 쳐들어온다!” 는 단말마적 외침에 회의장을 빠져나온 도망자 신세로 처음 만났습니다. 저는 맨발인 줄도 몰랐습니다.

우연히 2인 1조가 되어버린 우리는 이화여대 담장을 넘어 연세대 방향으로 도주하려 했으나 이미 주위는 소총과 곤봉으로 무장한 단독군장 차림의 전투경찰들이 2~3m 간격으로 촘촘히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담장 위로 몸의 거의 절반 정도 올라탔던 우리는 황급히 다시 이화여대 교정 안으로 도망치다가 어느 건물 안 경비실로 숨어들었습니다.

당시 경비실엔 키가 170cm는 넘어 보이고 몸매가 호리호리한 한 분과 키가 좀 작고 밀짚모자를 쓴 다른 한 분이 2인 1조로 근무 중이었습니다. 놀라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마르고 키 큰 경비직원분은 우리를 경비실로부터 약 20~30m 떨어진 지하보일러실로 내려가는 비상구로 급하게 데려갔습니다. 비상구는 경비실과 같은 층에 있는 반투명 유리가 달린 창문으로 겨우 한 사람이 통과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습니다. 그 창문을 통과하여 아래로 발을 내리면 약 2m가 넘는 철제사다리가 걸쳐 있어 약 3m 넘는 깊이의 보일러실 바닥으로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경비직원분은 밖에서 창문 걸쇠를 잠그고 급히 경비실로 되돌아가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보일러실로 숨어든 뒤 10여 분 정도 지난 시각, 우리는 남녀 학생들이 같은 건물 안으로 쫓겨 들어오며 지르는 비명을 들었습니다. 곧이어 군홧발 소리와 박달나무 곤봉이 학생들과 벽과 교탁에 내리꽂히며 내는 괴성, 통곡과 신음에 계엄군들이 씩씩거리며 내지르는 엄청난 욕지거리들…. 5월의 여왕 장미가 만발하고 초록이 싱그러웠던 그곳이 한순간에 생지옥으로 변했습니다.

그때 저는 물방울이 떨어져 고인 지하보일러실에서 맨발로 쪼그려 앉다 젖은 벽에 기대가며 어금니부터 발바닥까지 온몸을 떨었습니다. 그렇게 대강 3시간 남짓이 지난 후, 우리는 낮은 목소리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내일 0시부터 이화여대에도 계엄군이 진주할 것이니 어떻게든 이곳에서 탈출하자.”

제가 먼저 저보다 키가 큰(178cm) 그의 양 어깨 위에 두 발을 올린 채 벽에 기댄 엉거주춤한 자세로 몸을 들어 올리니 창틀 맨 위까지 손이 닿았습니다. 바닥을 더듬어 찾아낸 날카로운 쇄석과 유리 조각 등을 러닝셔츠를 찢어 물에 적셔 소음을 줄여 가며 창문 유리를 고정한 고무 패딩을 조금씩 뜯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서로의 어깨 위에 타고 서서 교대로 한참을 작업하다가 보일러실 바닥에 넘어져 깔려 있던 사다리가 누군가의 발에 걸렸습니다. 거의 두어 시간 후, 힘겹게 유리창을 빼내고 밖으로부터 잠긴 반 회전형 손잡이를 돌려 열고 한쪽 창틀을 옆으로 밀어 열었습니다. 형언키 어려운 공포에 떨며 내려갔던 그 비상구를 어둠 속에 벽을 타고 기어 나왔던 시각이 대략 1980년 5월 17일 오후 11시 30분쯤으로 기억합니다.

우리는 다시 경비실을 향해 낮은 포복으로 기어갔습니다. 그 혼비백산한 와중에도 키 큰 경비직원분은 제게 색 바랜 흰색 운동화 한 켤레와 점퍼 그리고 약간의 먹을 것을 쥐어주면서 신촌역 방향으로 도주하는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변변한 감사 인사 조차 드리지 못한 채, 허겁지겁 뭔가를 입에 넣고 씹으며 다시 낮은 포복으로 기어 그 건물을 빠져나왔습니다. 엉거주춤 한 자세로 숨어가며 잣나무 숲을 지나 대강당 정문 앞 계단 아래로 듬성듬성 심어진 소나무들 바로 옆으로 둘러 세워진 담장을 넘어 신촌 기차역으로 뛰어내렸습니다. 그 시각이 대략 같은 날 오후 11시 45분으로 추정됩니다. 우리는 겹겹이 늘어선 열차 사이를 기어서 통과해가며 잠시 잠깐 피안의 극락처럼 보이던, 신촌 기차역 앞 광장의 동향을 살핀 후 개찰구를 쏜살처럼 빠져나와 서로 정반대의 방향으로 내달렸습니다.

2. 5월 18일 이후 대략 6일간 저의 행적

극한의 공포에 시달렸던 저는 머릿속에서 의도하지 않은 도피 기제가 작용했는지 그 며칠간의 행적을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조각조각 파편화한 기억의 퍼즐을 맞춰보려 저는 광고 게재 후 5월 하순까지 몇몇 분들을 만나고 통화도 했습니다. 부득이 지금부터는 제 기억과 전언이 뒤섞인 1인칭과 3인칭 시점이 오갑니다.

1980년 5월 18일 오전 1시쯤 저는 서울 구파발에 사시던 작은 누님 집에 우측 볼이 붓고 운동화는 한쪽 발에만 신은 차림으로 도착했다고 합니다. 잠시 눈을 붙인 저는, 역시 키도 발도 큰 매형의 슬리퍼 비슷한 신발을 얻어 신고 현금 2~3만 원을 받아 부산으로 간다며 통행금지가 해제되자마자 누님 집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누님 집에는 하루인가 이틀 뒤 형사 두 명이 찾아왔더랍니다.

저는 서울역과 고속버스 터미널 부근을 배회하다 검문에 걸릴까 두려워 부산행을 포기하고, 서울 역삼동에 살던 친구의 집에 들렀다가 퇴짜를 맞은 것 같기도 합니다만, 아무튼 저는 우여곡절 끝에 결국 1980년 5월 19일 오전 2시쯤 서울 대치동에 있던 가까운 친척 집으로 숨어들었답니다. 저를 받아주셨던 친척 아주머님의 말씀이 제가 알발(맨발)에 다리를 절며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배고프니 밥 좀 달라 했답니다. 평소 대범하셨던 친척 아주머니도 부들부들 떨며 저를 숨겨 놓은 다락방 안으로 요강을 넣어주었고 딸은 종종 밥 심부름을 했다고 합니다.

저는 불안한 나머지 1980년 5월 19일 낮에 친척 집을 빠져나와 서울 미아리시장 부근 고교 친구의 애인 집으로 숨어들어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참으로 우연히 그 집으로 같은 날 잠입했던 후배로부터 광주 전체가 완전히 봉쇄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20일 낮 12시쯤 저는 그곳을 빠져나와 다시 대치동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로부터 2~3일 후에 천신만고 끝에 상경하신 아버님을 친척 아주머님의 안내로 제3의 장소에서 만나긴 했으나 저는 결국 아버지를 따라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날 이후 제 아버님께서는 2017년 6월 돌아가실 때까지 그날의 일에 관해 단 한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셨고 저 또한 차마 다시 묻지 못했습니다.

3. 그 이후: 제적·징집·신검·입소·녹화사업·전역

저는 그 후에도 약 한 달가량 도피를 지속하다가 1980년 7월 중순쯤 고향 집까지 찾아오신 지도교수님을 만났고, 8월 초순 대학 제적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8월 중순엔 징집영장을 받았고, 9월 2일 화요일 오후 4시부터 약 2시간 동안 병무청에서 홀로 신체검사를 받았습니다. 제 연락을 받고 서울에 있던 고교 친구들이 급히 내려와 9월 3일 오후부터 9월 4일 새벽까지 통음하고 부모님께 작별인사도 못 드리고 4일 아침 작취미성 상태로 병무청 직원과 동행하여 핏빛 사루비아 꽃길이 아름다웠던 논산훈련소에 입소했습니다.

1983년 초 병장 말년엔 보안사에서 24일간 이른바 ‘녹화사업’(보안사 관리번호 : 6●●/ 존안자료명 : ●● 7●-●●-●●●●)을 당하고, 지인들 동향 파악을 요구받으며 내보내 준 10일간의 특별휴가 시작과 끝에 강릉-서울-광주 3곳의 보안사 분대에 들러 보고 해야 했습니다. 심신이 피폐해진 상태로 만 32개월간의 군대생활을 마치고 저는 1983년 5월 5일 어린이날 만기 전역하였습니다.

4. 이번 만남에는 또 다른 남자 1명도 있었습니다.

2017년 5월 초순 저는 이화여대를 방문하여 직원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친께서 6.25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북한군 포로 후송 중 기총소사에 맞아 어깨와 팔 부상으로 수술 후 전역해 국가유공자가 되신 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1980년 5월 당시에는 수영장이 자리 잡은 건물의 경비직원이셨고 1990년대 후반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아들에겐 1980년 5월 17일 밤의 얘기를 한 번도 입에 올린 적이 없으셨다고 말했습니다.

지난 6월 18일, 이 분도 다시 만났습니다. 신문광고로 연락이 닿은 남자와 함께였습니다. 두 번째로 만난 이 분은 생존해 계시는 노모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1980년 어느 날 만취하신 아버님께서 어머님에게 “내가 나쁜 놈 두 놈을 살려 주었소.” 라고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1980년 5월 17~18일 일어난 사건에 대해 아버님이 유일하게 언급하신 내용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나쁜 두 놈'과 고인의 아들, 이렇게 셋이 만나 41년 전에 움직였던 동선을 하나하나 짚어 보았습니다. 물론 수영장 아래의 보일러실에도 들어가 보았습니다. 수차례의 증·개축으로 인해 크게 변해버린 건물에서 1980년 5월 당시의 그 비상구를 찾지는 못했지만, 잣나무 숲과 대강당 아래의 소나무 길, 그리고 신촌역과 이화여대를 가르던 담벼락의 위치 등은 확인하였습니다.

기고문을 쓰고 있는 오늘은 6.25 한국전쟁 71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참으로 많은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저와 함께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겼던 키 큰 사나이와 고인의 아들, 우연한 인연으로 만난 우리 세 사람은 앞으로 함께 풀어야 할 마지막 숙제 하나를 남겨 놓고 있습니다.

기고문은 이렇게 끝납니다. 광고주에게 남은 숙제가 뭔지 물어봤습니다. 그는 목숨이 오가는 위기에서 자신을 구해 준 경비직원분을 찾아 소주 한 잔 올리려 했는데 이미 돌아가셔서 보답할 길이 없다고 했습니다. 유해는 이미 화장해 뿌렸는데 국가유공자인 이 분의 위패를 국립묘지에 모실 수 있다고 하니 나중에 경비직원분의 부인이 세상을 떠나시면 두 분을 대전현충원에 함께 모실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보고 있다고 했습니다.

[연관기사] 신문광고로 41년 만에 연락 닿은 두 사람…그 때 무슨 일이?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189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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