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한일 월드컵

호나우두

Ronaldo Luiz Nazario De Lima

월드컵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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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76.9.18.

호나우두가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로 1990년대 중후반을 휩쓸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펠레 이후 최고의 선수가 탄생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10년 이상 디에고 마라도나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브라질 국민들은 마침내 어깨를 당당하게 폈고, 축구 역사는 분명 호나우두를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강렬하고 인상 깊었던 전성기를 보냈음에도 불구, 오랜 부상으로 점철된 호나우두의 현역 생활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에 이르러 동전의 양면처럼 엇갈리고 있다.

1 마라도나 이후 최고의 카리스마

펠레의 뒤를 잇는 축구 황제 호나우두
<출처 : wikipedia(David Cornejo)>

브라질이 94년 월드컵을 통해 무려 24년 만에 우승컵을 들어 올렸을 때, 17세 소년 호나우두는 선배들에 둘러싸여 어린 아이마냥 기뻐하고 있었다. 호나우두는 그 놀라운 천재성을 인정받아 17세의 나이로 월드컵에 출전하는 기회를 부여 받았지만, 펠레와 다르게 이 대회를 통해 ‘소년 영웅’으로 떠오르지는 못했다.

그렇게 하기엔 호마리우베베토의 벽이 너무나도 높았는지도 모른다. 결국 단 1분도 경기에 나서지 못한 호나우두는 그렇게 월드컵 첫 경험을 끝마쳐야 했다. 그러나 1994년 월드컵 이후 세계 축구계를 휘어잡은 인물은 호마리우도, 로베르토 바조도,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도 아니었다.

네덜란드 명문 PSV 에인트호벤에서 두 시즌 동안 42골을 몰아친 호나우두는 스페인 명문 바르셀로나로 이적하여 49경기 47골이란 경이로운 기록을 남겼고,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의 축구선수로 널리 인정받았다. 심지어 당시 바르셀로나의 감독이었던 바비 롭슨은 자신의 전술을 비판하는 기자들을 향해 “나의 전술은 호나우두다”라는 유명한 한 마디를 남기기도 했다.

바르셀로나에서 폭풍 같았던 1년을 보낸 호나우두는 이탈리아 명문 인테르로 다시금 둥지를 옮겼다. 인테르에서 보여준 활약상도 명불허전이었다. 25골을 터뜨리며 세리에A MVP로 선정된 호나우두는 세계 각 국의 언론들로부터 “디에고 마라도나 이후 등장한 최고의 카리스마”라는 호평을 받았고, 1998년 월드컵을 통해 축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새롭게 쓸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실제로 호나우두는 1998년 대회를 통해 주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활약을 선보였다. 적어도 프랑스와의 결승전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네덜란드와의 4강전까지만 하더라도 세계 최고의 선수라는 명성에 어긋나지 않았던 호나우두였지만, 결승전에서는 부진을 면치 못한 채 지단이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봐야 했다.

결승전 전날 밤, 호나우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간질성 발작을 일으켰다. 그로 인해 경기 시작 72분 전까지만 하더라도 벤치에 앉아 경기를 지켜 볼 계획이었다. 그러나 두 번 경험하기 힘든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호나우두는 자갈루 감독에게 선발 출전을 간곡히 요청했다.

우여곡절 끝에 출전한 결승전이었지만, 이전과 같은 활약을 선보이기엔 프랑스의 수비가 너무 강했고 컨디션도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였다. 결국 호나우두는 준우승에 머무르며 1998년 월드컵을 아쉽게 마무리 지었다.

그럼에도 대회 MVP의 영예는 지단이 아닌 호나우두에게 돌아갔고, 실망스러웠던 결승전 이후 “호나우두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고 외친 사람은 사실상 찾아볼 수 없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호나우두의 현역 생활은 분명히 ‘현재 진행형’이었다.

2 끔찍했던 부상, 그리고 부활

월드컵 이후 호나우두는 잦은 부상에 시달리며 98/99 시즌 리그 일정을 절반밖에 소화하지 못했다. 그러나 남미 최강을 가리는 1999 코파아메리카 대회에서는 브라질을 우승으로 이끄는 한편, 득점왕과 MVP까지 독식하며 부활의 기지개를 폈다.

호나우두는 지단과 함께 향후 5년 이상 세기의 라이벌 대결을 펼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1999년 11월 21일, 호나우두는 레체와의 경기 도중 무릎을 움켜쥔 채 쓰러지고 말았다. 진단 결과 무릎 십자인대가 끊어진 것으로 밝혀졌고, 결국 6개월간의 공백기를 가져야만 했다.

2000년 4월에는 라치오전을 통해 가까스로 복귀를 신고할 수 있었지만, 교체 투입 3분 만에 또 다시 무릎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비극적인 사고가 일어났다. 호나우두는 두 차례나 수술대에 올랐고, 지옥 같은 재활훈련 일정이 반복됐으며, 2년 동안 경기에 나설 수 없었다.

호나우두가 그라운드 위로 다시 돌아온 것은 01/02 시즌 막바지였다. 브레시아와의 복귀전에서 팀을 구해내는 두 골을 터뜨린 호나우두는 시즌 막판 9경기 7골을 기록하며 부활의 청신호를 밝혔다.

당시 부진을 면치 못하던 브라질 대표팀도 황제의 복귀에 힘을 얻었다. 호나우두는 히바우두, 호나우지뉴와 함께 ‘3R’ 공격라인을 구축하며 대회 내내 맹활약을 펼쳤고, 브라질을 통산 5번째 우승으로 이끌며 4년 전의 설움을 단번에 씻어내 버렸다. 8골로 득점왕을 차지했음은 물론, 연말에는 피파 올해의 선수상과 발롱도르까지 휩쓸며 제2의 전성기를 예고했다.

2002년 월드컵 이후에는 루이스 피구(2000년), 지네딘 지단(2001년)의 뒤를 이어 레알 마드리드에 합류, 갈락티코 군단의 일원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데뷔 시즌부터 23골을 터뜨린 호나우두는 레알 마드리드의 리그 우승에 크게 공헌하며 이름값을 해냈다.

그러나 볼을 몰고 질주하는 폭발력과 스피드는 오랜 부상 공백으로 인해 상당 부분 사라져 버렸고, 스페인 언론들은 호나우두의 움직임이 지나치게 게으르다며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이후 레알 마드리드에서 호나우두의 득점 행진은 멈추지 않고 계속됐지만, 스페인 언론들과 팬들은 호나우두를 지단이나 피구만큼 사랑하지 않았다.

특히 05/06 시즌에는 과체중 논란으로 인해 좋지 않은 의미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다. 2006년 월드컵에서는 대회 통산 15골을 터뜨리며 게르트 뮐러의 최다 득점 기록(14골)을 갱신했음에도 불구, 전반적으로 부진했던 활약상 및 브라질의 8강 탈락으로 인해 비판의 도마 위에 올라야 했다.

3 축구 역사 속에서의 위상

호나우두는 오랜 부상 공백과 복귀 후 보여준 논란의 활약상에도 불구, 변함없이 축구 역사상 가장 뛰어났던 스트라이커 중 한 명으로 추앙받고 있다. 특히 축구황제 펠레는 호나우두를 가리켜 “나와 함께 했던 동료들 가운데 쿠치뉴는 나보다도 골 결정력이 뛰어났던 선수다. 하지만 호나우두는 그 쿠치뉴보다도 더욱 결정력과 골 감각이 뛰어나다”는 최고의 찬사로써 후배를 평가했다.

지단이 볼을 컨트롤하고 패스하는 측면에서 최고의 선수로 평가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호나우두 역시 스스로의 힘으로 골 찬스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결정짓는 측면에서는 ‘역대 최고’라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대표적인 예로, 펠레와 함께 브라질의 황금시대를 이끌었던 히벨리누는 “호나우지뉴의 발재간은 흉내라도 내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호나우두의 골을 넣는 모습은 흉내조차 낼 수 없다”라는 유명한 한 마디를 남겼다. 그밖에 호나우두는 지단과 함께 세 차례의 피파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한 두 명의 선수 가운데 한 명으로 손꼽힌다.

<프랑스 풋볼>의 기자단이 손꼽은 역대 올스타 팀 베스트 11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으며, 호나우두를 펠레와 지쿠 이후 최고의 선수로 손꼽는 브라질 내 축구인들도 여전히 많다.

4 호나우두와 호나우지뉴

호나우두(Ronaldo)와 브라질 출신의 팀 동료 호나우지뉴(Ronaldinho)는 사실 ‘호나우두’라는 같은 이름을 갖고 있는 동명이인이다. 호나우지뉴는 정식 이름이 아닌 ‘작은 호나우두’라는 뜻의 브라질식 애칭으로, 또 한 명의 호나우두와 확실히 구분 짓기 위해 이름처럼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참고로 전자의 호나우두는 ‘호나우두 루이스 나자리우 데 리마’(Ronaldo Luis Nazario de Lima)라는 풀네임을 갖고 있으며, 후자의 호나우두는 ‘호나우두 데 아시스 모레이라’(Ronaldo de Assis Moreira)가 풀네임이다. 호나우두 역시 데뷔 초기에는 호나우지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대표적인 예로, 94년 월드컵과 96년 올림픽 당시 호나우두의 정식 등록명은 ‘호나우두’가 아닌 ‘호나우지뉴’였다.

그 이유는 94년 브라질 팀에는 호나우두 로드리게스(Ronaldo Rodrigues de Jesus)라는 65년생 수비수가, 96년 브라질 팀에는 호나우두 기아로(Ronaldo Guiaro)라는 74년생 수비수가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호나우두 로드리게스의 경우 다른 호나우두들과의 구분을 위해 호나우당(Ronaldão, 큰 호나우두)이란 애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한편 브라질 자국 내에서는 두 선수를 구분하기 위해 호나우두, 호나우지뉴라고 부르기보다는 별명이나 애칭을 더욱 자주 사용한다. 호나우두의 별명은 괴물이란 뜻을 지닌 ‘페노메노(Fenomeno)’이며, 이 애칭은 마치 이름처럼 언론이나 팬들 사이에서 쓰이고 있다.

브라질에서는 호나우두처럼 차원이 다른 재능을 지닌 축구 선수에게 페노메노라는 애칭을 붙여주곤 하는데, 알레샨드레 파투 역시 팬들에게 같은 별명을 선물 받았지만 “그것은 호나우두를 표현하는 고유명사”라며 멋쩍은 반응을 나타내기도 했다. 호나우지뉴의 경우 ‘가우쇼(Gaucho)’라는 애칭으로 상당히 유명하며, 마찬가지로 브라질 사람들은 호나우지뉴를 ‘가우쇼’라는 이름으로 더욱 자주 부른다.

가우쇼는 과거 아르헨티나 혹은 브라질 남부 지역에서 유목 생활을 하는 카우보이 민족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20세기부터는 브라질 남부 지역의 남성들에게 주로 이러한 별명이 붙여지고 있으며, 이는 그 지역 남성들의 호방한 기질을 대변하는 애칭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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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행일2010. 0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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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형석 축구 칼럼니스트

    글쓴이 이형석은 국내 최대 규모 해외축구 전문 사이트인 <사커라인>(www.soccerline.co.kr)의 칼럼니스트로 다 년간 활동해 왔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현대축구의 전술, 알고 봐야 제대로 보인다!]와 [한 권으로 씹.어.먹.는 월드컵] 등이 있으며, 그 밖에 <후추>, <베스트일레븐>, <스포츠온>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기고활동을 벌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