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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진 코믹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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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21. 18:571,306 읽음

흔히들 코믹스라고 부르는 미국의 만화책을 보다보면 우리가 아는 만화책과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일단 처음부터 끝까지 올컬러이기도 하고(드물게 일부러 흑백으로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두께가 얇은 편입니다. 크기도 제법 크고 그림체도 대체로 사뭇 진지할 정도이죠. 이렇게 겉모습의 차이에 이질감을 느끼고 꺼리는 경우가 꽤 있는 것 같은데요, 그래서 이번 포스트는 미국 코믹스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 제작 과정을 간단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작가의 종류

일단 미국의 만화는 한국이나 일본과 방식이 다릅니다. 우리의 경우는 작가가 혼자서 스토리와 작화를 다 맡는 것이 일반적인데, 요즘은 스토리 작가 따로 작화가 따로 분업하는 방식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어시(스턴트)가 붙어서 도와주는 경우도 있죠. 
웹툰은 100% 디지털 작업을 하고 스마트폰에 최적화된 세로로 긴 비율, 그에 적합한 방식의 연출을 한다는 차이점이 있지만 전체적인 작업 방식은 비슷합니다.

<하빈저> 시리즈의 스토리 작가인 조슈아 다이사트

이에 비해, 미국의 코믹스는 철저히 분업화가 이루어져 있습니다. 주로 글작가(스토리 작가)와 펜슬러(스케치 작가), 잉커(펜선 작가), 컬러 작가, 레터러, 커버 아티스트 이렇게 영역이 나뉩니다. 물론 펜슬러와 잉커를 겸하는 경우도 많고 스토리나 컬러까지 혼자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이런 것은 작가의 역량에 따라 달라지겠죠. 

글작가가 작품을 구상하고 영화 시나리오와 비슷한 콘티를 짜서 펜슬러에게 보내면, 펜슬러는 각도나 연출을 계획해서 글을 시각적으로 살려내는 과정을 담당합니다. 펜슬러의 역량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글이라도 밋밋하게 표현해버리면 안 되니까요. 이렇게 표현된 원고를 숙련된 잉커가 펜으로 유려한 선을 입히고, 컬러 작가가 색으로 조명, 색감, 농도, 원근감 등을 연출하면 거의 완성 단계에 이릅니다. 컬러 역시 어떤 식으로 채색하는가 따라 작품의 분위기를 결정지을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이죠.

여기까지 하면 글자를 담당하는 레터러의 차례입니다. 이들은 단순히 글자를 타이핑하는 일뿐이 아니라 작품, 캐릭터, 상황에 맞는 글씨체나 글작가가 쓴 감탄사 및 효과음, 말풍선 등등까지 담당하는 또 다른 전문적인 영역입니다. 최대한 원고의 그림을 가리지 않으면서 시각적으로 대사나 효과음을 잘 전달할 수 있도록 해야 하죠. 미국의 코믹스는 대사가 상당히 많기 때문에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잘못하면 칸 하나가 대사로만 넘쳐날 수도 있고, 독자가 대사 읽는 순서를 잘못 이해할 수도 있으니까요.   

또 표지그림만 따로 그리는 커버 아티스트가 따로 있습니다. 펜슬러가 표지를 맡아서 같이 하기도 하지만, 표지만 전문적으로 작업하는 아티스트를 고용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특히 한 작품에 다양한 버전의 표지를 출간하는 배리언트 커버가 유행하면서 더욱 일반화되었습니다. 각 버전마다 다른 아티스트들의 그림이 들어가게 되죠.
이때 표지는 독자들의 시선을 잡아끌어야 하므로 자극적인 낚시성 그림이 많이 들어갑니다. 표지를 보고 흥미를 느껴서 구매 후에 안을 펼쳐보면... 기대와는 전혀 다른 내용인 경우가 많죠.
코믹스 한 회분을 만드는데 이처럼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The Valiant>의 제작 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왼쪽부터 연필 스케치, 잉크 입힌 부분, 컬러 채색 부분으로 나눈 그림.

전체 완성작. 말풍선과 대사를 넣어서 완성
작가의 활동 방식

그리고 슈퍼히어로 장르처럼 출판사에서 구축한 세계관이 있는 경우엔 대부분의 캐릭터 라이센스를 출판사가 갖고 있으므로, 작품이 끝나지 않고 오래 연재되는 경우가 많죠. 이렇게 장기적인 시리즈가 되기 때문에 한 작가가 계속 맡아서 하기는 힘들고, 큼직한 스토리 아크(이야기의 큰 줄기)가 진행되는 동안만 계약해서 작업을 진행합니다.  하나의 스토리 아크가 끝나면, 새로운 스토리 아크를 위해 출판사가 작품의 구상과 잘 어울릴만한 작가들과 새로 계약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시리즈인데도 그림체가 달라지는 일이 생기죠.

몇 화부터 몇 화까지 하는 식으로 계약을 맺는데, 인기가 떨어지면 작가진이 교체되거나, 연재물 자체가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때 스토리나 세부사항에 대한 작가의 아이디어를 편집부랑 의논하여 결정합니다. 서로 정보들을 공유하여 세계관을 해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죠. 편집부는 눈동자의 색이나 대사 스타일 하나까지 감수합니다.  정기적으로 작가들과 편집부는 휴양지에서 창작의 에너지를 충전하고 큰 방향을 의논하는 행사를 벌이기도 합니다.

최근에 마블과 DC에서 많은 활약을 보인 작가들이 속속 밸리언트와 작업을 하는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DC의 <저스티스 리그 다크>, <슈퍼보이>, 마블의 <올 뉴 호크아이>, <엑스트라 오디너리 엑스맨> 등등 수많은 작품들의 스토리를 담당하여 국내에도 많은 팬을 가진 제프 러미어(Jeff Lemire)는 밸리언트에서 <블러드샷 U.S.A.>, <블러드샷 리본>을 맡았으며, DC의 <저스티스 리그 오브 아메리카>, 마블의 <인휴머니티>와 수많은 스타워즈 시리즈를 그린 펜슬러 맷 킨트(Matt Kindt)는 밸리언트의 수많은 작품들을 비롯 현재 <X-O 맨오워> 시리즈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하빈저> 시리즈의 스토리와 캐릭터들을 구축한 조슈아 다이사트(Joshua Dysart) 역시 DC/버티고의 <언노운 솔저> 등의 스토리를 써왔죠.
그 밖에도 프레드 밴렌티, 데이비드 맥, 페레 페레즈 같은 마블과 DC를 넘나들던 유명 아티스트들이 밸리언트와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밸리언트에서 작가들이 자신들의 역량을 펼치기 좋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가 있겠네요.

작화 중인 페레 페리즈

<하빈저 워즈> 이슈 표지. 실제로 저렇게 등을 맞대고 같이 싸우는 내용은 없다.
만화책의 종류

미국에서는 우리나라와 같은 만화잡지가 없습니다. 대신에 각 코믹스 작품들은 보통 22 페이지(특별호는 페이지가 더 많겠죠)의 얇은 책으로 출간되는데, 이것을 이슈(Issue)라고 부릅니다. <하빈저> 이슈1, 이슈2 하는 식이죠. 각 이슈 간의 발매 시기는 주간, 격주간, 월간, 부정기 등이 있는데 월간이 가장 일반적입니다. 이 역시 같은 세계관 내의 다른 작품들과 진도를 맞추기 위한 이유 때문인 것도 있죠.
이슈가 몇 권 분량이 모이면 단행본 한 권으로 묶어서 출간됩니다. <X-O 맨오워> 1권은 이슈1부터 이슈4까지의 분량입니다. 이런 단행본을 트레이드 페이퍼백(TBP)이라고 하는데, 분량을 조금 더 늘려서 하드커버(양장)으로도 발매합니다.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발간되는 밸리언트의 코믹스는 모두 트레이드 페이퍼백입니다.

트레이드 페이퍼백(TPB)
하드커버(양장)

장기 시리즈가 아닌 원샷(한 이슈로 끝나는 분량), 미니시리즈, 특별 이벤트, 크로스오버 등의 예외적인 경우도 존재합니다. 
이것은 밸리언트 고유의 방식이 아닌 모든 미국의 코믹스들의 방식이며, 슈퍼히어로물 뿐 아니라 모든 장르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미국 코믹스 세계에 첫 발을 들여놓으신 분이라면 쓸모 있는 정보였길 바라며 다음 포스트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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