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ologue.
‘명사, 직임에서 물러나거나 사회 활동에서 손을 떼고 한가히 지냄.’
‘은퇴’의 사전적 정의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세월이 지나면 ‘은퇴’를 합니다. 영원한 삶은 없듯, 영원한 ‘현역’도 없습니다. 은퇴의 사전적 정의처럼, 누구나 때가 되면 ‘직임에서 물러나거나 사회 활동에서 손을 떼고 한가히 지내기’ 마련입니다.
여자농구 대표팀에 아시안게임 금메달 1개와 은메달 2개를 안긴 주인공이 있습니다. 19년의 프로 생활 동안 정규시즌 우승을 6번 했고, 챔피언결정전 우승컵은 4번 들어 올렸습니다. 정규리그 502경기를 뛰면서 평균 10.8득점, 5.1리바운드, 4.5어시스트, 2.2스틸을 기록했습니다. 그야말로 못하는 게 없는 최고의 전천후 가드였습니다.
‘대한민국 여자농구 최고의 테크니션’, ‘국가대표 부동의 가드’로 군림했던 이미선 선수(37, 전 용인 삼성생명). 이제 때가 됐음을 알았고, 그래서 정든 코트와의 이별을 고했습니다. 자신을 비추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는 이미 잊은 지 오래입니다. 한가한 일상, 그 순간순간의 소중함을 즐깁니다. 이제 미국의 한 도시에서 편한 후드티에 청바지를 입고, 책가방을 메고 학교를 오가는 이 ‘은퇴 선수’. 바쁠 것 하나 없는, 이기고 지는 승부 따위 잊은 지 오래인 ‘은퇴 선수’ 이미선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 선수, ‘은퇴’ 얘기를 하려는데 자꾸 ‘시작’을 말합니다. 30년 가까이 쥐었던 농구공과 이별을 고한 아쉬움보다는 이제 다가올 새로운 인생에 대한 설렘이 더 큰가봅니다. 이제 ‘제2의 인생’의 첫 발을 막 내디딘 이미선 선수. 그의 운명 같았던 28년 농구 인생에 켜켜이 쌓인 각 챕터의 ‘첫 페이지’들을 함께 들춰봤습니다.
# ‘첫 만남’ - 달리기를 사랑하던 소녀, 농구공과 운명 같은 ‘첫’ 만남.
“초등학교 5학년 때였어요. 하루는 교실에서 운동장을 내다보는데, 농구부 애들이 빨간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줄넘기를 하고 있었어요. 맞아요, 빨간색 트레이닝복이었어요. 그게 너무 좋아보였어요. 그 길로 농구부를 찾아갔어요. 나도 농구 해보고 싶다고.”
광주 중앙 초등학교 5학년. 친구들보다 한 뼘은 작았던 이미선이었다. 농구부 선생님은 뒷줄에 앉은, 키 큰 친구들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키도 작고 말도 없었던 내성적인 소녀. 그런 이미선에게 빨간 트레이닝복을 입고 빨간 공을 던지고 받는 농구부 훈련은 무엇보다 재미있어보였다.
키는 작았지만 달리기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농구부 테스트가 있던 날, 이미선은 키가 가장 작은 ‘꼬마’였지만, 이를 악물고 뛰고 또 뛰었다. 한발만 내디뎌도 저만치 앞서가는 키 큰 친구들을 이를 악물고 따라잡았다. 그렇게 테스트를 통과했다. 얌전하고 조용하기만 했던 키 작은 소녀가 ‘대한민국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다시 태어난 운명의 순간이었다.
운명과도 같았던 농구와의 만남. 작은 꼬마 이미선은 그렇게 농구를 시작하게되었다(사진제공=네이버스포츠) |
“그냥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드리블을 배우고 패스를 주고받고, 그저 공놀이를 즐기는 기분이었어요. 그런데 일단 체구가 너무 작았으니까 누구도 눈여겨봐주지 않았어요. 저는 진짜 학교에서도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정도로 조용한 아이였거든요. 그런데 일단 공만 잡으면 즐거웠어요. 친구들과 무리지어서 다니는 것도 좋았던 것 같아요. 농구부라는 소속감도 든든했고요. 물론 선착순 달리기만 하면 제가 무조건 1등이었죠.”
# ‘첫 경기’ - 밉기만 했던 농구, 그 시절의 첫 경기
“중학교에서도 농구를 계속하기로 했는데 키가 안 컸어요. 중학교 입학할 때 키가 150cm도 채 안 됐으니까요. 키도 작고 몸도 비쩍 마르고. 미래가 안 보였어요. 그리고 그 때는 훈련할 때마다 왜 그렇게 매는 많이 맞았는지, 투정만 늘던 시절이었어요. 그때 마침 집안 사정도 어려워졌어요. 우리 집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이사를 자주 다니기 시작했어요. 엄마가 뒷바라지 해주시느라 고생을 엄청 많이 하셨어요.”
농구가 싫어졌다. 키는 여전히 제일 작았고, 유일하게 자신 있던 달리기도 중학교 친구들에게는 밀리기 시작했다. 신체가 한창 발달하기 시작해야 할 시기에 여전히 성장이 더딘 결과였다.
“방향을 잃은 시절이었어요. 농구가 싫은데 그저 쳇바퀴 돌 듯 훈련을 반복했죠. 맞는 게 너무 싫어서 농구를 그만두겠다고 조른 적도 많았어요. 그렇다고 과감하게 그만두지도 못했어요. 그렇게 어영부영 중학교 시절이 흘러갔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흔들릴 때마다 나를 붙잡아준 건 엄마였어요. 가장 큰 은인이죠.”
가장 힘들었던 시절. 이미선이 기억하는 농구 인생의 ‘첫 공식 경기’는 중학교 2학년 때였던 1992년 봄, 춘계연맹전이다. 감독님이 몰던 지프차에 감독님과 선수 7명이 몸을 구겨 넣고 4시간을 달려 장충체육관에 도착했다. 몸은 부서질 듯 아팠고, 여관에서 먹고 자는 것도 쉽지 않았다.
정말 쉽지 않았던 농구부 생활. 방황하는 그녀를 잡아준 건 바로 어머니였다(사진제공=네이버 스포츠) |
“그렇게 농구가 싫고 힘들기만 했는데, 유독 장충체육관 앞에 있던 식당만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요. 김치찌개에 라면사리를 넣어먹는데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요. 훈련하고 나서 밥 먹으러 가는 시간만 기다렸던 것 같아요.”
훈련보다는 김치찌개가 간절했던 평범한 선수. 하지만 이미선은 92년 춘계 연맹전부터 서서히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저 재미로만 농구를 접하다 처음으로 전국 단위의 경기를 치르면서 농구의 재미를 알아갔다. 키는 작았지만 리바운드 볼이 떨어지는 지점에 용케도 자리를 잡고 기다렸다. 키 큰 동료들의 입맛에 맞게 패스를 전달하는 매력도 쏠쏠했다. ‘가장 작았지만 가장 센스 넘쳤던 선수’, 이미선은 농구 인생 첫 경기에서의 자신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 ‘첫 희망’ - 한 번도 주목받지 못했던 이미선, 농구 인생의 희망을 보다
2000년 이후 15년 동안 국가대표팀에서 부동의 리딩 가드였던 이미선. 그가 학생 시절 한 번도 청소년 대표에 선발된 적이 없다는 사실은 낯설기만 하다. 실업팀만 13개일 정도로 여자농구가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던 당시. 고등학교에서 농구 좀 한다고 알려진 선수들은 이미 1학년 때 실업팀에서 거액의 계약금을 받고 진로가 정해지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미선은 어느 팀의 제의도 받지 못하고 2학년이 될 정도로 주목받지 못한 선수였다.
“동기생들 중 가장 잘하는 친구들은 1학년 때 실업팀과 계약을 했어요. 90년대 중반이었던 당시 돈으로 1억 원을 넘게 받았으니 엄청난 액수였죠. 2학년 때도 실업팀과 계약을 못하면 농구를 그만두는 게 낫다는 말까지 있었어요. 불안감은 커져만 갔죠.”
청소년 대표 한 번 해본 적 없던 평범한 선수 이미선. 실업팀과 연습경기를 할 때면 더 이를 악물고 뛰었다. 어떻게든 실업 감독님들 눈에 띄어 계약을 해야 한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던 시절이었다.
“선경이랑 연습경기를 했어요. 유영주 언니랑 매치업을 하는데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어요. 힘이 너무 좋았고, 스크린은 왜 그리 거대했던지 도저히 뚫고 나갈 수가 없었어요. 뛰는 게 너무 힘들어서 실업팀이랑 연습경기를 하는 거 자체가 싫었죠. 그런데 한 번은 서울에 전지훈련을 가서 실업팀 숙소에서 지낸 적이 있었어요. 숙소가 호텔처럼 좋았어요. 숙소 밥은 왜 그렇게 맛있던지, 꼭 실업팀과 계약을 하고 싶다는 의지가 더 강해졌어요.”
'엘리트 코스' 중 하나인 청소년 대표 한번 해보지 못한 이미선. 그렇기에 더 이를 악물고 뛰었다(사진제공=네이버 스포츠) |
그렇게 이미선은 서서히 자신의 재능을 알렸다. 광주 수피아여고에 볼 잘 다루는 가드가 있다는 소문이 점점 퍼졌다. 결국 고등학교 3학년이 되기 전인 1995년 11월, 이미선은 삼성생명과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진로가 확정되고 나니 내성적이기만 했던 이미선에게도 자신감이 넘쳤다. 다른 친구들이 성장을 멈춘 사이,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이미선은 아직도 키가 쑥쑥 자랐다. 성장 가능성이 뒤늦게 폭발한 것이다. 3학년 때였던 1996년 전국체전에서 수피아여고를 고등부 우승으로 이끌면서, 이미선은 대한민국 여자농구를 이끌 차세대 가드로 확실히 올라섰다.
# ‘첫 일탈’ - 충장로 불나방을 아시나요.
“고등학교 2학년이 끝나갈 때쯤 실업팀과 계약을 했잖아요. 그때 이상하게 먼저 실업에 간 언니들이 ‘학생 때 많이 놀아야 된다. 실업팀 오면 놀 시간 없다’라는 말을 많이 해줬어요. 농구 이외에는 아무 것도 몰랐던 저였는데, 때마침 한 친구가 광주 시내에 있는 락카페에 데려갔어요. 너무 재미있었어요. 신세계였죠.”
처음이자 마지막 ‘일탈’이었다. 매주 토요일 밤, ‘수피아여고 농구부 가드’ 이미선은 충장로의 락카페를 뜨겁게 달궜다. 귀가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겼다. 그렇게 두 달을 보냈다. 서태지, 젝스키스, 클론의 음악에 맞춰 신나게 몸을 흔들다 보면 스트레스는 눈 녹듯 사라졌다.
“하루는 술도 한번 마셔봤어요. 이전까지 술은 입에도 대보지 못한 제가 말이죠. 친구 세 명이 같이 마셨는데, 주량도 모르면서 겁 없이 소주 2병을 혼자 마셨어요. 물론 그대로 기절했죠. 아무 기억이 없어요. 그때부터 내가 술은 잘 못 마신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 ‘첫 프로 생활’ - 긴장감이 감돌던 서초동 숙소. 박정은, 변연하와의 첫 만남
한창 자신감에 넘치던 여고생 이미선이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시작한 프로 생활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당시 삼성생명의 멤버가 정은순, 한현선, 박정은, 왕수진, 박선영 등. 하나같이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스타들이었다.
“정말 모든 순간이 긴장의 연속이었죠. 인사할 때마다 식은땀이 흘렀고 청소는 말할 것도 없었어요. 운동할 때도 너무 긴장하니 레이업슛 하나도 잘 안 들어가고, 3점슛도 에어볼이 되기 일쑤였어요.”
그런 이미선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팀 합류 직후 개막한 농구대잔치에서 삼성생명의 가드진이 줄부상으로 자리를 모두 비운 것이었다. 식스맨으로 경기에 나설 기회가 많아졌다. 당대 최고의 센터 정은순이 골밑에 버티고 있으니 이미선의 재능은 더욱 빛이 났다.
“아직도 은순 언니가 가장 많이 생각이 나요. 제일 많이 혼내기도 했고, 제일 많이 가르쳐주기도 하셨어요. 패스는 무조건 세게 하라고 하셨는데, 신기하게 정말 세게 던진 패스를 다 잡았어요. 은순 언니에게 무조건 더블팀이 붙으니 상대 수비는 항상 신인인 저를 비워뒀는데, 그 때마다 은순 언니가 기가 막히게 패스를 해줬어요. 그렇게 손쉬운 득점도 많이 했어요.”
삼성생명의 보물이자, 신데렐라로 성장한 이미선 선수.(좌측 하단, 사진제공=점프볼) |
그렇게 이미선은 서서히 삼성생명의 신데렐라이자, 보물단지로 성장했다. 그리고 두 명의 동반자들과 함께 삼성생명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바로 박정은과 변연하다.
“정은 언니는 삼성에 와서 첫 룸메이트였어요. 처음엔 좀 예민한 성격이 무섭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 뒤로 19년을 한 팀에서 지내면서 둘도 없는 사이가 됐어요. 코트에서는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정도였어요. 농구 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잘 맞는 선수는 두말할 것도 없이 박정은이죠.”
“연하는 고등학생 때 연습경기에서 처음 만났어요. 당시에는 키만 크고 엄청 촌스러웠어요. 그런데 농구는 정말 거침없이 했어요. 삼성이라는 같은 팀에서 함께 성장한 게 정말 다행이죠. 서로 같이 발전한다는 건 이런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 같아요.”
# ‘첫 태극마크’ - 멀게만 느껴졌던 ‘태극마크’ 그 꿈같은 경험
중고등학교 시절 한 번도 청소년 대표에 뽑히지 못했던 이미선. 그에게 ‘태극마크’는 언제나 이상향과도 같았다. 너무 멀어 보이지만 언젠가는 꼭 잡아보고 싶던 막연한 목표. 이미선은 프로 3년차였던 1999년, 국가대표의 꿈을 이루고야 말았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국가대표 1차 소집 명단에 포함된 것이었다.
“태릉선수촌에서 두 달을 훈련했어요. 항상 꿈꿔왔던 순간이었기에 하루하루가 너무도 소중했어요. 훈련이 없는 일요일 오후에도 혼자 선수촌에 남아 연습을 할 정도로 열심히 했죠.”
이미선의 국가대표 스토리, 그 마지막은 인천AG 금메달로 멋지게 장식하였다(사진제공=점프볼) |
이미선이 대표팀의 막내였던 1999년 이후 15년. 이미선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여자농구 대표팀의 리딩가드 역할을 변함없이 맡았다. 2000년 시드니, 2004년 아테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전 세계의 농구 강국들과 맞섰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과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는 중국의 벽에 막혀 은메달에 그쳤지만, 마지막이었던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는 마침내 중국을 넘어 금메달을 목에 걸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세 번의 올림픽과 세 번의 아시안게임, 태극마크를 달고 코트를 누볐던 15년의 시간은 이미선의 농구 인생에서 가장 보람찬 순간들로 기억될 것이다.
# ‘첫 부상’ - 두 번의 십자인대 수술, 우울증과의 사투
2005년 7월 9일, 여름리그 개막전이었다. 종료 직전 이미선의 동점골이 터지면서 경기는 연장으로 접어들었다. 그 연장전에서, 이미선의 오른 무릎 십자인대가 끊어졌다. 농구선수로서 한창 전성기를 달리던 이미선의 성공가도에 드리워진 예상치 못한 시련이었다.
“동점골을 안 넣어서 연장전에 안 갔다면 부상도 없었을까요. 드라이브인을 하려고 하다가 멈췄는데 무릎에서 ‘뚝’ 소리가 났어요. 그 뒤로는 기억도 없어요. 너무 힘들었어요. 수술을 받고 일본의 한 병원에서 재활을 했어요. TV 속의 사람들이 다들 웃고 있는 걸 보는 것조차 원망스러울 정도였어요. 사람들을 만나면 ‘괜찮냐’고 물어보는 게 싫어서 아무도 안 만났어요. 우울증이 찾아온 거죠.”
뼈를 깎는 고통에 비유되는 무릎 재활이 시작됐다. 농구선수로서 무서울 게 없던 시절이었기에, 상실감은 더욱 컸다. 재활을 위해 숙소에 머물렀지만, 팀 동료들과의 접촉도 꺼렸다. 동료들이 열심히 땀 흘리며 훈련하는 장면을 보면 더욱 우울했다. 병원을 찾았다. 화가 목까지 차올랐으니 가라앉히는 약을 먹자고 했다. 무릎에는 칼자국이 생겼고, 마음엔 우울증이 생겼다. 힘겨운 1년이었다.
그리고 1년 뒤인 2006년 5월 21일. 긴 공백을 깨고 이미선은 복귀를 준비했다. 2006 여름리그 개막을 이틀 앞두고 남자 고등학교와 치른 연습경기였다. 이번엔 왼쪽 무릎이라고 했다. 1년 전 바로 그 느낌이었다. 또 1년의 수술, 그리고 재활이 시작됐다. 여자프로농구 리그는 물론, 그해 가을 세계선수권도, 겨울 도하 아시안게임도, 모두 이미선의 것은 아니었다.
“전 종목을 통틀어서 1년 사이에 양쪽 무릎 십자 인대가 끊어진 선수가 있을까요? 그 양쪽 무릎을 모두 수술하고 재활을 거쳐 복귀한 선수가 있나요? 십자인대가 또 끊어지니 이상하게 눈물도 안 났어요. 사무국장님 등에 업혀서 병원에 가는데 진단을 받기 전에도 인대가 끊어졌다는 사실을 직감했어요. 1년의 재활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그걸 똑같이 할 자신이 없었어요. 이건 농구를 그만 하라는 하늘의 계시라고 생각했어요.”
농구 인생 가장 큰 위기를 맞이한 이미선. 이를 극복했기에 지금의 모습이 있는 것이 아닐까(사진제공=네이버 스포츠) |
사실 그랬다. 주위의 모두가 ‘이제 이미선은 끝났다’고 했다. 양쪽 무릎 십자인대가 끊어진 서른 살 가까운 선수를 바라보며, 모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불어넣었던 사람이 있었으니, 지금의 남편인 최진영 당시 삼성생명 사무국장이었다.
“두 번 모두 국장님 등에 업혀 병원에 갔어요. 일본에서 재활 할 때는 국제전화로 하소연도 많이 했죠. 그 때마다 다시 뛸 수 있다는 희망을 줬어요. 저도 모르게 많이 기대게 됐죠. 우울증을 극복하게 해준, 가장 고마운 은인이에요.”
인생의 가장 깊은 나락에서, 이미선은 그렇게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일본의 재활센터에서 열심히 일본어를 배워서 일본인 고등학생 룸메이트와 같이 여행을 다녔다. 가벼운 마음으로 농구 이외의 다른 곳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교회도 다녀보고, 피아노도 배우고, 재테크도 공부했다.
“부상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선수 생활을 못했을 것 같아요. 그 부상으로 인해서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어요. ‘농구 선수 이미선’이 아닌, ‘인간 이미선’을 위해 많은 도움이 됐던 시간들이었던 것 같아요. 제 자신이 최고의 스타라고 생각했는데, 2년 동안 부상을 당하니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어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도와주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저를 다시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 거죠.”
두 번의 무릎 수술. 이미선은 그 멍에를 평생 짊어져야 한다. 평소에도 양반다리를 못하고, 좁은 바닥에는 앉아있지 못한다. 장시간 비행을 힘겨워하고, 다리가 아파 극장에서 영화 보는 것도 즐기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무릎은 더 아플 것이고, 걷는 게 힘들어질 날도 올 것이다.
하지만 이미선은 말한다. 2년의 재활 기간은 농구에 대한 열정을 다시 지펴준 계기였다고. 몸과 마음이 모두 아팠지만, 시련을 극복한 경험은 남은 인생의 소중한 자산이 될 거라고.
# ‘첫 운명’ - 사랑, 결혼, 그리고 가정
두 번의 무릎 수술, 그리고 재활. 인생의 가장 힘겨웠던 시절, 가장 큰 힘을 줬던 사람은 이미 언급한 대로 당시 삼성생명의 최진영 사무국장이었다. 항상 재미있고 친절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던 구단 직원. 선수들 모두와 잘 어울려 지내는 괜찮은 국장님이라고만 생각했던 그가 언젠가부터 남자로 다가왔다.
“사무국장과 소속팀 선수라는 특별한 관계였잖아요. 섣불리 연애 감정을 느낄 수는 없었어요. 남편도 저를 귀여운 동생 정도로 생각했겠죠. 하지만 지나서 생각해보면 항상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뭔지 모를 둘 만의 감정이 있었던 것 같아요. 어느 날은 갑자기 저에게 남자친구가 있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그리고는, ‘나중에라도 나한테도 기회를 줄 수 있겠니?’라고 물어봤어요. 그게 프로포즈였던 셈이죠.”
챔프전을 앞둔 2009년 겨울 어느 날, 몸살로 힘겨워하는 이미선에게 지금의 남편인 최진영 사무국장은 가벼운 키스로 선전을 기원했단다. 그렇게 둘은 사랑을 키웠고, 2010년 결혼에 골인했다. 이미선은 남편을 한마디로 정의한다. “농구선수 이미선을 사람으로 만들어준 사람”이라고.
# ‘첫 미국 생활’ - 아무 것도 모른채 무작정 떠난 미국 연수
“쉽지 않을 거라고는 예상했는데 그렇게 힘들 줄은 몰랐어요. 갈 때는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갔는데, 열흘쯤 지내다 남편이 다시 돌아가니 혼자서 더욱 막막했어요. 내가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 생각이 안 났어요. 주말 내내 방 안에만 박혀 있었죠.”
무작정 떠난 미국 연수, 그녀에게 은퇴는 새로운 시작이다(사진제공=네이버 스포츠) |
이제 미국 생활도 어느덧 두 달. 친구도 많아지고 학교생활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됐단다. 매일 아침 8시에 등교해 오후 2시까지 영어 수업을 받는 일상은 새로움의 연속이다.
“한국 학생들이 많은 게 저에게는 도움이 됐어요. 까마득한 동생들인데, 제가 누군지 모르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에요. 그런데 부모님에게 저의 이름을 물어본 뒤에 와서는 ‘그렇게 유명한 분이었어요?’ 하고 놀라곤 해요. 주말마다 그 친구들과 바비큐 파티를 하는 게 또 다른 즐거움이에요. 이번에 미국으로 돌아가면 농구 클래스도 열기로 했어요. 실력을 제대로 보여줘야죠.”
랭귀지 코스를 밟고 있는 이미선은 대학리그가 개막하면 샌디에이고 주립대학교 객원코치로 연수를 받을 예정이다. 언젠가는 돌아올 농구 코트, 전술 공부도 중요하지만 선진 운영 시스템을 배우는 데 초점을 맞추고 싶단다. 샌디에이고 주립대학 농구부가 미국대학농구(NCAA) 여자부 디비전 1그룹에 소속된 팀인 만큼, 벌써부터 시즌을 보낼 생각에 하루하루가 설레기만 한다.
# ‘첫 아이’ - “욕심낸다고 되나요. 순리에 맡겨야죠.”
2010년 결혼한 이미선은 벌써 결혼한 지 만 6년이 지난 ‘중참 신부’다. 1979년생이니 어느덧 나이도 30대 후반을 바라보고 있다. 은퇴까지 하니 주위에서는 너도 나도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은퇴하자마자 제 마음이 급해지더라고요. 언젠가는 농구계로 돌아와서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는 생각에 빨리 아이를 낳고 키워놓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런 준비도 안 된 상황이었어요. 그때 역시 ‘순리에 맡기자’고 한 남편 말이 맞았던 것 같아요."
'150cm' 작은 꼬마가 '국가대표 부동의 가드'가 된 이미선. 그녀의 인생은 지금부터 시작이다(사진제공=네이버 스포츠) |
은퇴는 했지만 아직도 농구 이외에 다른 곳에는 별 관심이 없다. 마치 감옥 안에서 수십 년을 지내고 아무 준비 없이 출소한 장기수 같다고나 할까. 은퇴식을 위해 며칠 동안 한국에 들어와 있는 내내 이미선의 발길은 농구단 숙소로 향한다. 하릴없이 숙소 이곳저곳 마실도 다니고 식당 이모들, 수위 아저씨들과 얘기도 나눈다. 팀 훈련 때는 체육관으로 가서 볼도 주우러 다니고 후배들 훈련하는 뒤치다꺼리도 한다.
“이러고 있는 저를 보면 내 삶 자체가 농구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것 같아요. 숙소 밖으로 나가면 도무지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농구장이 제일 편하고 후배들과 같이 밥 먹고 운동하는 게 제일 좋아요. ‘나는 천상 농구인’이라는 사실을 농구장 밖으로 나가고 나서야 깨닫게 됐어요.”
이미선은 아주 멋 훗날, 어린 아이들에게 농구를 가르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본단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키 작고 수줍기만 했던 소녀를 대한민국 최고의 가드로 키워준 농구 코트. 이미선은 그 위에서 꿈을 키웠고, 사랑을 키웠고, 성공을 거뒀고, 시련도 맛봤고, 더욱 단단하게 다져졌다. 이미선은 그런 농구 코트에 갚을 빚이 많다. 그래서 지금의 ‘은퇴’는 끝이 아닌 시작이다. 새로운 출발점에 선 이미선, 앞으로 펼쳐질 그의 미래는 그래서 희망으로 가득하다.
-허재원 (YTN 스포츠부 기자)
에필로그 | '가을 햇살' 가득했던 그녀의 인터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