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것은 부부관계 친밀성의 필수가 아니다

2023.11.27. 오후 12:44

그것은 부부관계 친밀성의 필수가 아니다

이성애 섹스를 즐기지 않는다고 해서 어딘가 큰 구멍이 뚫린 듯 안타까운 게 아니라 그게 비어 있기 때문에 더 다채로운 쾌락에 몸을 열 수 있다. 이성애 섹스를 단지 여러 쾌락 중 일부로 여기지 않고 가장 충만하고 강렬하다고 믿는 것은, 그것 자체가 가진 불안을 드러내는 게 아닐까.

(본문에서)

분량

A4 7페이지, 공백 포함 약 8600자

어느 주말.

나는 스타벅스로 글을 쓰러 나왔다. 아이는 친구네 집으로 갔다. 배우자는 혼자 집에서 낮잠을 잔다. 우리 가족이 보통 주말을 보내는 모습이다. 어느 날 문득, 각자 자기 식대로 평화롭게 지내는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 가족이 드디어 끈적끈적거리는 '핵가족'에서, 법적인 보호는 받지만 관계는 느슨한 '공동체'가 되어가는군' 하고 매우 흐뭇해했다.

나에게 가족은 숭고하고 따뜻한 무엇이라기보다는 '주거/생활 공동체'에 가깝고, 각자의 구성원은 엄마/아빠/자식이라기보다는 '개인'으로 산다.

나는 나를 가족을 위해 밥을 하고 구성원 하나하나를 살뜰히 보살피는 엄마라기보다, 아직 미성년자인 사람을 위한 '양육자/보호자'라고 인식하며 산다. 또 배우자에겐 아내가 아니라 '법적인 보호자'라는 역할을 강하게 느낀다. 특히 나와 같은 성인인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나는 더 이상 '여자'도, '아내'도 아니다. 우린 '동거인'의 개념에 가깝다.

자, 여기까지 말하면 '부부 사이가' 되게 안 좋을 것이라고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사람들이 꽤 많을 줄로 안다. 저 집안, 쫑났군. 저게 가족이냐? 부부 사이는 최악이겠군. 집안에 냉기가 휑휑 돌거라고 생각한다.

나와 동거인의 관계는 사이가 썩 다정하거나 따뜻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혼을 고려할 정도로 나쁘지도 않다. 공동체 유지를 위해 '성 역할 분업'을 하지 않고, 자기 할 일을 하면서 꾸준히 투닥투닥 거리면서 산다. 가끔 언성을 높이기도 하며, 또 친구들에겐 하지 못하는 남 흉을 털어놓기도 한다. 그러다가 각자 방으로 들어가 따로 논다.

나와 남편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라거나 부부 관계라기보다는 그야말로 정말 같이 사는 가족인데 나는 이걸 경멸적인 어조로 쓰고 싶지 않다. 대부분 부부 관계가 '가족'이나 '동료'가 되었다고 하면 뭔가 친밀성에(주로 성적 문제겠지) 굉장히 문제가 있다고 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걸 '문제'라고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일종의 '관계 변화'라고 보고 싶다.

10년이면 세상 모든 게 바뀐다. 우린 세상만물의 변화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봄-여름-가을-겨울처럼. 나는 인간의 관계도 그렇다고 본다. 그런데 부부 관계로 오면 변화를 '변절'이나 '체념'처럼 받아들인다. '여전히 신혼처럼 산다'는 말이 찬사가 된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모든 게 똑. 같. 아야 한다거나, 과거와 비슷하다는 게 더 억지스럽지 않은가.

여전히 신혼처럼 가까운 친밀성을 느끼며 살아야 믿었던 때 나는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신혼 때 같은 감정 회복이 아니라 세월에 따라 변하는 마음과 몸을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여자이건 남자이건 꼭 육체적 친밀성을 가져야만 부부이고, 성적 쾌락은 반드시 배우자에 의해 충족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면, 시간의 흐름에 따른 몸과 관계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수용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관점에 전혀 동의하지 않은 이들도 많을 것이다.

*

이 글은 내가 가족과 이성애주의를 약 3년에 걸쳐 공부해온 끝에 매우 러프하게 정리한, '부부관계'와 육체성 친밀성, 즉 섹스에 관한 나의 생각이다.

이 사회에선 부부가 섹스리스가 되면 더 이상 부부가 아니라고도 한다. '쇼윈도 부부'라고 떠들어대기도 한다. 한편에선 '가족'끼리 무슨 섹스냐며 체념하듯 비아냥 거리기도 한다. 나는 이걸 좀 들여다보고 싶다.

왜 우리 사회는 섹스를 이토록 중요하게 여길까. 그런데 그토록 중요할까.

왜 섹스만이 세상 최고의 쾌락이고 그걸 못하고 살면 불행하다고 하는 걸까. 정말 불행할까.

섹스 없이도 잘 사는 사람들은 '비정상'인가? 자신을 속이며 사는 걸까?

여전히 밤이 뜨거운 부부들은 읽을 필요 없다. 내가 이상한가? 내가 비정상인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라고 생각하거나 섹스리스를 '문제'라고 보는 분들이 읽어줬으면 좋겠다.


많이 본 콘텐츠

전주 월요일 00시부터 일요일 24시까지 집계한 결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