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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포연제(5)2023.08.23.

 

“아가씨!”

뒤늦게 아이레네가 인파에 떠밀려 내려가는 걸 발견한 제시는 황급히 그녀를 쫓아갔다. 쿠아아앙-. 그러나 황소처럼 생긴 거대한 마물이 갑자기 나타나 길을 막아선 탓에 어쩔 수 없이 멈춰 서야 했다. 마수 훈련소에서 탈출한 마물 중 하나로 ‘미노타스’라는 종족이었다. 미노타스가 거친 콧김을 내뿜으며 돌진하자, 제시는 황급히 피했다. 쿵-. 미노타스가 들이박은 2층 건물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공격을 실패한 게 화가 났는지, 미노타스가 눈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다시 제시를 향해 덤벼들었다.

“미치겠네!”

한시라도 빨리 아이레네를 찾으러 가야 하는데, 미노타스 때문에 발목이 묶인 제시는 욕설을 읊조렸다. 마음 같아선 미노타스를 단숨에 무찌르고 아이레네를 찾으러 가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제시는 전투 쪽에 재능이 없었다. 제르딘이나 레이먼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어도, 그들은 람벨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는 탓에 그럴 수가 없었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미노타스의 공격을 가까스로 피하며 고민하던 제시는 새카만 무언가가 미노타스의 몸을 타고 기어올라가자 눈을 크게 떴다. 저건 설마……? 꿰에엑-. 제시의 생각이 마침표를 찍기도 전에 미노타스는 돼지 멱따는 듯한 괴성을 지르며 쓰러졌다. 제르딘과 레이먼이 힘겹게 상대하고 있던 람벨도 축 늘어졌다.

“이게 무슨……?”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리둥절해하는 레이먼은 등 뒤에서 섬뜩한 기운이 느껴지자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반쯤 무너진 건물에서 칼로스가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분명 에스페르 성의 반대쪽으로 가는 걸 봤는데……언제부터 저기 있었던 거지? 레이먼은 몹시 당황하며 칼로스를 쳐다봤지만, 제르딘과 제시는 담담했다. 칼로스는 주변을 쓱, 둘러보더니 제시에게 물었다.

“아이레네는 어디 있지?”

제시는 얼굴에 묻은 먼지도 제대로 닦지 못하고, 침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가씨께선 이곳에 안 계십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지?”

“마물을 보고 놀라 도망치는 사람들에게 휩쓸리셔서……송구합니다, 주인님.”

제시는 차마 칼로스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그제야 아이레네가 사라진 걸 안 제르딘도 고개 숙여 사과했다.

“…….”

칼로스는 제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에 대해 한마디 하려다 그러지 않았다. 지금은 누구의 잘못인지 따지는 것보다 아이레네를 찾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괜히 꾸물거리다가 해가 지기라도 하면, 그래서 영지에 어둠이 자욱하게 깔리면 아이레네를 찾는 게 더욱 힘들어지니 한시라도 빨리 찾아야 했다. 그래, 이번에는 반드시 찾을 거다. 칼로스는 가지고 있던 힘을 전부 개방했다. 지하를 다스리는 4명의 군주에겐 각자 고유한 능력이 있었는데, 칼로스의 능력은 ‘그림자’로, 세상에 있는 모든 그림자를 수족처럼 다룰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그림자, 특히 살아 있는 생물의 그림자를 다루는 건 힘이 많이 드는 일인지라, 칼로스는 되도록 자기 그림자만 이용했다. 몸 상태가 온전하다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었기에 더더욱 다른 그림자는 건드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었다. 칼로스가 개방한 힘이 안개처럼 영지를 자욱하게 덮었다. 건물과 사람, 길거리에 널린 잡초 등 에스페르 영지에 있는 모든 그림자가 칼로스의 눈이 되어 영지 곳곳의 상황을 보여주었다. 갑작스러운 마물 소동에 놀라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그들을 진정시키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는 건 물론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구조하는 방범대원과 기사들의 모습 등등.

“…….”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지만, 그 어디에도 아이레네는 보이지 않았다. * 한편, 속절없이 인파에 떠내려가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온 아이레네는 더 이상 인파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인근 건물에 숨었다. 마물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한 행동이기도 했다. 그런데 하필 선택한 건물이 마물에게 폭격이라도 당했는지, 반쯤 부서져 있었다. 내려앉은 천장에서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졌다.

‘바로 나가야겠어.’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난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아이레네는 작은 문틈 사이로 바깥을 살펴봤지만, 아무리 봐도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겠다. 애당초 아이레네가 에스페르 영지에 나온 건 오늘이 처음이니, 이곳이 어디인지 알 리가 없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려고 해도, 다들 도망치느라 정신이 없어 그럴 수가 없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건 저 멀리 에스페르 성이 보인다는 거였다. ……그런데 나는 왜 돌아갈 생각만 하는 거지? 아무도 날 감시하지 않는 지금이야말로 도망칠 절호의 기회인데.

“…….”

날벼락처럼 머리에 꽂히는 생각에 아이레네는 마른침을 삼키며 에스페르 성의 반대쪽을 바라봤다. 사람들이 전부 저쪽으로 도망치는 걸 봐서, 아마 영지를 나가는 출구는 저쪽에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을 따라가면 도망칠 수 있어. 아이레네가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발을 내딛는 그때. 드륵, 쿵-.

“윽!”

엉덩방아를 찧는 소리가 고요한 건물 안에 널리 울려 퍼졌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든 아이레네는 고개를 숙여 자신이 밟고 넘어진 게 무엇인지 확인했다.

“이건……마법 폭죽?”

본래 폭죽을 파는 가게였는지, 바닥에 폭죽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 사이에서 익숙한 물건을 발견한 아이레네는 그걸 집어 들었다. 바로 풍선 다트에서 1등 경품으로 받았던 머리핀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머리를 만져봤는데, 허전했다. 마법 폭죽을 밟고 넘어졌을 때, 떨어진 모양이다.

“이건 네가 가지고 있는 게 좋을 것 같군.”

  머리핀을 보니 불현듯 칼로스가 제 머리에 머리핀을 직접 꽂아줬을 때가 떠올랐다. 아이레네는 머리핀을 주워들며 입술을 감쳐물었다. 칼로스는 이런 걸 선물로 주는 자신이 우스워서, 혹은 머리핀을 가지고 싶지 않아서 핑계를 댄 거겠지만. 그때 제 머리를 만지던 손길이 그답지 않게 부드럽고 다정해서 몹시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일까. 지금까지 칼로스가 제게 잘해줬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우선 마녀로 몰려 화형당할 뻔한 걸 구해준 것부터 시작해서. 뭐 하나 부족한 것 없이, 오히려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잘 챙겨주는 것. 사제들이 자신이 마녀가 맞는다고, 마녀재판을 해야 한다고 했을 때도 끝까지 저를 믿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사제들을 혼쭐냈다. 비록 그 과정에서 사람이 죽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건 사제의 잘못이니까…….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거지?”

아이레네는 화들짝 놀라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무리 사제가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사람을 죽이는 건 잘못된 일이었다. 게다가 그 시체를 이용해서 동료 사제들을 농락하기까지 했으니, 그 일만큼은 칼로스가 잘못한 게 맞았다. 그 외에 칼로스가 잘못한 일은 뭐가 있지?

“……없어.”

굳이 따지자면 자신의 자유를 억압한 건데, 이것도 조금 애매했다. 에스페르 성에서 나가지 못하는 것 말고, 자유롭게 행동하고 있었으니까. 그 외에 칼로스가 잘못한 일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제게 잘해준 일은 너무 많이 떠오르니 혼란스러웠다. 지금까지 이렇게 좋은 사람을 무서워하며 도망치려고 했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아니, 무서워하는 게 당연해.’

칼로스가 이토록 제게 잘해주는 이유를 모르니까. 자신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 어디에 어떻게 필요한 건지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그러니 칼로스를 무서워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렇게까지 무서워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로스가 원하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았으니까. 만약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이렇게 잘해주지 않았겠지. 그럼 굳이 도망칠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도망치더라도 돌아갈 곳이 없는데…….

“…….”

돌아갈 곳이 없다는 사실과 함께 세상에 혼자 남겨졌다는 외로움이 새삼 뼈에 사무쳐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이레네는 더 이상 머리핀을 보고 싶지 않았지만, 차마 버리지도 못하고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뜨거운 눈시울을 가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가냘픈 어깨가 잘게 떨렸다. 쿵-.

“……?”

한참 동안 소리 없이 울던 아이레네는 무언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들었다. 어두컴컴한 가게 안쪽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털이 수북하게 난 커다란 가시? 아니, 저건 가시가 아니라…….

“거미……다리.”

카캉-. 정답이라는 걸 알려주기라도 하듯 사람 몸집만큼이나 커다란 거미가 벽을 타고 내려왔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굴러다니던 여섯 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아이레네를 응시했다.

“…….”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흉측한 모습에 아이레네는 도망치지 못하는 건 물론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망부석처럼 굳어 있었다. 눈물이 메마른 얼굴이 창백했다. 완전히 바닥에 내려온 거미가 털이 복슬복슬한 다리를 아이레네를 향해 쭉 뻗었다.

“……!”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아이레네는 황급히 옆으로 굴러 거미의 공격을 피했다. 찌익, 비싼 드레스가 사정없이 찢기면서 맨살이 드러났지만,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아이레네는 손에 잡히는 게 무엇이든 간에 거미를 향해 던졌다. 짱돌, 나무 조각, 정체를 알 수 없는 파편 등등 마구잡이로 던졌지만, 그 어떤 것도 타격을 주지 못했다. 단 하나, 마법 폭죽을 제외하고. 콰아앙-. 아이레네가 던진 마법 폭죽이 거미의 몸에 부딪히는 순간, 거대한 폭발음이 들리더니 털이 복슬복슬한 몸에 불이 붙었다. 키에에엑-. 거미는 무척 괴로운 듯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그 탓에 기둥이 부서지고,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던 천장이 빠르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무너지기 전에 얼른 나가야 해. 아이레네는 벌떡 일어나 출구 쪽으로 달려갔다. 반쯤 열린 문틈을 비집고 나가려는 순간, 끈적한 거미줄이 날아와 그녀의 다리를 옭아맸다.

“악!”

그 탓에 아이레네는 문을 나가지 못하고 그 앞에서 고꾸라졌다.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머리핀만 튕겨 나가듯이 문틈을 빠져나갔다. 쨍그랑-. 강한 충격에 깨진 인어의 눈물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어째서인지 그림자는 흩어지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다. 기괴한 현상이었으나, 무너지는 건물 안에 있는 아이레네는 그걸 보지 못했다. 간신히 몸에 붙은 불을 끈 거미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아이레네를 향해 달려왔다. 아이레네는 도망치고 싶었지만, 두 다리가 거미줄에 묶여 있어 그럴 수가 없었다.

‘이대로 죽는 건가.’

모든 걸 체념한 아이레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새카매진 눈앞에 뭉게뭉게 칼로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반드시 데리러 갈 테니까. 너는 얌전히 날 기다리면 돼.”

  보통 죽을 때가 되면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고 하던데, 그토록 두려워하던 칼로스의 얼굴이 떠오르니 아이러니했다. 하지만 이 의문은 풀 수 없겠지. 나는 여기서 죽을 테니까. 아이레네가 부디 고통 없이 죽기를 바라며 몸을 웅크리는 순간. 콰지직, 쿵-. 무언가 격렬하게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키에에엑-. 곧이어 고통이 가득 찬 괴성이 울려 퍼지자, 아이레네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완전히 부서진 출구 쪽에 석양을 등지고 서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드디어 찾았다.”

바로 칼로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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