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회원들 텃세에 왕따 신세
한여름 에어컨 못 쓰게 하기도
자녀 "경로당 보낸 것 후회돼"
신입에 과도한 심부름 시키고
탈퇴 때 입회비 안 돌려주기도
봉화농약 등 강력 사건도 빈번
서울 소재 한 경로당에 다니는 80대 A씨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경로당 문을 두드렸지만 경로당을 다닌 이후 오히려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경로당을 다니기 시작한 지 한 달도 안돼 경로당 회장이 가족에게 전화를 해 "할머니(A씨)가 걷는 게 불안하고 넘어질 수 있으니 경로당에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통보했다. 하지만 거동에 큰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A씨는 가족의 도움을 받으며 계속 경로당을 찾았다. 하지만 그 이후 A씨는 철저하게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기 시작했다. A씨가 말을 걸어도 다른 회원들은 그를 없는 사람 대하듯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푹푹 찌는 더위 때문에 A씨가 에어컨 바람을 잘 쐴 수 있는 공간으로 가려고 하면 회원들은 "왜 여기로 오느냐. 저쪽으로 가라"며 노골적으로 따돌렸다. 한 회원은 A씨에게 "지병이 뭐냐. 옮는 병 아니냐"고 면박을 주는가 하면, 나이가 많다며 어울리지 말라고 다른 회원들을 종용했다.
A씨의 딸인 양유진 씨(가명)는 "또래 노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 어머니의 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에 경로당 이용을 권유했다"면서 "경로당을 나가기 시작한 이후 오히려 우울증, 환청 등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 경로당에서 텃세를 부리거나 회원을 받지 않고 배척하면서 노인들이 경로당을 떠나고 있다. 신체적·정신적으로 약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른 노인을 조롱하면서 낙인찍고 고립시키는 일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따돌림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을 견디다 못해 아예 경로당으로의 발길을 끊는 노인들마저 생기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마땅히 의지할 곳이 없는 노인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경로당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독선과 갑질로 얼룩진 폐쇄적인 운영으로 경로당이 일부 노인의 사적 모임의 장으로 변질되는 사례도 종종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회원제로 운영돼 투명한 관리·감독이 쉽지 않다 보니 이 같은 문제가 좀처럼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에 사는 현옥희 씨(87)는 동네 경로당 회원으로 가입해 놨지만 지금은 다니지 않는다. 그는 "경로당에 뭘 사 가지 않으면 헐뜯고 험담하는 게 싫었다"면서 "신입 회원들에게 텃세를 부리는 모습을 보고 그만 좀 하라고 대판 싸운 뒤 완전히 발길을 끊었다"고 말했다.
경기도 한 경로당에 다니는 70대 정지용 씨는 "간식을 사 오라거나 회장, 총무의 개인 심부름을 시켜 불만이 많았다"며 "탈퇴하면서 가입 당시 냈던 입회비를 돌려 달라고 요구했는데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경로당 내 갈등과 불화로 인해 노인이 노인을 학대하고 폭행하는 일도 갈수록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보건복지부와 노인보호전문기관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이 노인을 학대하는 노노(老老)학대는 지난해 3335건으로 전체 학대 건수의 42.2%에 이르렀다. 노인학대 가해자가 70대 이상인 경우도 2019년 1759건에서 2023년 2565건으로 4년 새 46% 늘었다. 경로당 회원들 간 불화와 갈등이 극단적인 폭력 양상으로 치닫는 일도 잦아지고 있다.
지난해 7월 경북 봉화군 봉화읍의 경로당에서는 노인 4명이 농약이 든 커피를 마시고 병원으로 이송됐다. 경찰은 경로당에서 화투를 치면서 회원 간 갈등이 있었다는 진술을 확보했지만, 범인으로 추정되던 할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수사가 종결됐다. 최근 취재진이 찾은 이곳은 점심시간임에도 머물고 있는 회원이 고작 1명이었다. 등록 회원은 40여 명이지만 사건이 발생한 이후 방문자가 크게 줄면서 적막감만 감돌았다. 이곳에서 만난 한 80대 노인은 "사건 이후 사소한 것에도 겁을 먹는 어르신이 많다"면서 "음식물을 나눠 줄 때 회원들 사이에 '독 탄 거 아니제'라고 얘기하는 버릇이 생겼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지난해 1월 서울 구로구의 한 경로당에서는 80대 회원 B씨가 70대 C씨를 위협하기 위해 식칼을 들고 경로당에 찾아오는 일이 발생했다. B씨는 고스톱을 치다 다툼이 벌어져 경로당에서 제명을 당한 이후 앙심을 품었다고 한다. 다행히 칼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C씨를 폭행한 B씨는 특수상해 등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석재은 한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배타적 분위기와 따돌림으로 인해 경로당을 이용하는 노인들이 오히려 사회적 고립감을 크게 느낄 수 있다"며 "경로당이 노인들이 의지하는 사회 관계의 장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를 보다 포용적인 공간으로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봉화 차창희 기자 / 서울 김정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