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피해자” 페미니즘의 언어, 백래시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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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2.11.19. 오후 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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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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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기획 _ 백래시의 시대, 피해자의 시대

‘약자를 착취자로’ 취급하는 백래시
여성을 공정경쟁 위반한 존재 취급
‘피해’ 개념 역이용 페미니즘 공격
“한국선 억울함 더해 정치에 이용”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당시 후보는 성범죄 처벌 강화, 무고죄 처벌 강화, 여성가족부 폐지를 성평등 공약으로 내걸었다. 지난 12일 강원도 원주 상지대에서 연 한국여성학회 추계학술대회에서는 이 공약들이 한국 사회의 ‘반페미 담론’을 반영한다는 분석이 나왔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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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대선 기간부터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고 확언해왔다. 그런데 왜 이 시대의 젊은 남녀는 억울한 피해자라는 집단 정서를 갖게 되었는가?

페미니즘을 반대하는 움직임인 ‘백래시’가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와 결합해 구조적 약자를 오히려 ‘착취자’로 지목하고, 불평등을 개인의 문제로 치환한다는 문제제기가 나왔다. 지난 12일 강원도 원주 상지대학교에서 연 2022 한국여성학회(회장 김현미 연세대 교수) 추계학술대회에서 학자들은 페미니즘이 대중화한 ‘디지털 페미니즘’의 시대를 지나 맞닥뜨리게 된 ‘페미니즘 백래시 시대’에 관한 여러 분석을 통해 이렇게 진단했다.

발표자로 나선 엄혜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한국 사회의 백래시를 ‘성차별이 이미 사라졌고 오히려 여성에게 유리한 제도와 정책이 과잉되어 남성 권리를 침해한다’는 내용을 뼈대로 삼는다고 보았다. 이 백래시는 성평등 정책이나 제도를 전면적으로 거부한다기보다 자력구제와 승자독식의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와 연관된다는 것이다. 엄 교수는 “(윤석열 대통령이 한)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말은 백래시의 가장 대표적인 기표로서 정치화된 논의”라며 현재의 정치 담론이 “능력주의를 활용해 여성을 공정한 경쟁을 위반하는 존재로 만들고 페미니즘을 부정의한 대상으로 치환한다”고 보았다.

엄 교수는 백래시를 그저 성평등 의제에 대한 공격이나 무력화 시도라고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했다. 지금 한국 사회의 백래시 현상은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에 기반해 새롭게 정책, 제도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나온 얘기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는 스스로 자신을 구제해야 한다는 이념 아래 능력에 따른 지배를 정당화한다. 따라서 개별 여성이 겪는 성별 임금 격차, 성폭력 등도 개인적 불운이나 잘못된 선택의 결과일 뿐 ‘구조적 성차별’ 탓이 아니다. 이 담론은 “약자와 패자에 대한 무자비한 모욕을 정당화”한다.

‘페미니즘’의 시대적 소명이 끝났다고 보는 ‘포스트페미니즘’은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를 지지한다는 점 또한 강조했다. 엄 교수는 ‘안전’이나 ‘여성혐오’ 등 최근 몇년 동안 집중 논의해온 페미니즘의 의제들이 여성의 일상적인 어려움을 드러내기는 했지만, 불평등을 생산하는 구조의 문제나 여성노동, 재생산의 문제에 관한 정치적 논의는 답보 상태에 머무른 측면이 있다고 진단했다. 여성들도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와 불화하지 않거나 도전하지 않으면서 페미니즘 의제가 ‘주체성’ ‘자기결정권’ ‘피해자’ 담론 정치에 상대적으로 몰두해온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거나 ‘정상에서 만나자’라는 등 소비자 또는 자기계발하는 주체로서 야망을 갖고 개인의 성공과 부를 추구하는 것도 ‘포스트페미니즘 현상’의 하나라고 보았다. 남녀 모두 삶의 불안정성이 증대했지만 성평등이나 차별 같은 구조적 문제는 뒷전으로 놓였다는 것이다. 엄 교수는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에 대한 대안기획으로서 페미니즘을 상상하고 새로운 정치의 형성을 도모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당시 후보는 성범죄 처벌 강화, 무고죄 처벌 강화, 여성가족부 폐지를 성평등 공약으로 내걸었다. 지난 12일 강원도 원주 상지대에서 연 한국여성학회 추계학술대회에서는 이 공약들이 한국 사회의 ‘반페미 담론’을 반영한다는 분석이 나왔다. <한겨레> 자료사진


 “남자가 피해자다” 미러링 확산


민가영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는 “‘피해’라는 개념이 이른바 ‘비상사태’를 맞았다”고 보았다. ‘피해’ 개념은 사회구조적 차별이나 불평등의 관계에서 페미니스트들이 면밀히 보완하고 발전시켜온 용어였다. 그러나 ‘피해’라는 말에서 사회구조적 차별이라는 맥락이 삭제되어 지금은 오히려 권력 집단의 이해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말로 쓰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민 교수는 사회구조적 약자와의 관계에서 특정 집단이 자신들을 피해자로 규정하는 세계적이고 동시대적 흐름이 있다고 보며, 그 현상으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전 대통령의 대선 캠페인과 2021년 한국 재보궐선거, 2022년 한국의 대선 캠페인을 예로 들었다. 한국의 경우 ‘무고죄 처벌 강화’와 여성가족부 폐지를 ‘성평등 공약’으로 내건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민 교수는 “페미니즘에 의한 피해자라는 남성 정체성을 (정치권이) 공식적으로 승인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왜 신자유주의 질서 속에서 ‘약자’와 ‘피해자’란 말이 남성들이 적극적으로 소비할 만큼 가치 있는 기표가 되었는지” 민 교수는 질문했다. 예전 한국 남성들이 ‘제국주의 식민지 피해자’라고 자신을 규정했다면 오늘날 한국 남성은 여성뿐만 아니라 유색인종, 난민, 이주민 같은 사회적 약자와의 관계에서 자신이 피해자라고 인식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질서는 구조적 차별을 부정하지만 ‘차별’ ‘피해’ 같은 기표는 지우지 않았으므로 맥락과 상관없이 이 말들은 누구나 가져다 쓸 수 있는 자원이 되었고, 지금 백래시 담론의 주된 도구가 되었다는 얘기다.

민 교수는 “‘피해’를 자원으로 소비하게 하는 ‘신자유주의 통치성’ 속에서 사회구조를 향해야 하는 비난이 사회구조적 약자들로 향하게 되었다. 남성중심적 지식 권력을 비판하기 위해 등장했던 언어가 역으로 페미니즘을 공격하기 위한 자원으로 소비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페미니즘의 언어와 지식이 반동적인 역공에 이용되는 점을 우려했다. “페미니즘 입장론은 삭제된 인식 주체의 위치와 경험을 중요한 근거로 지식 권력을 비판하고 대안적 지식을 구성해왔지만, 지금 백래시 현상의 ‘왜곡된 미러링’에서는 탈맥락적인 감정을 자기주장의 권위 있는 근거로 중시한다”는 것이다. 감정 과잉과 반지성주의, 정치적 부족주의, 그리고 자기 이익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사회적 흐름 속에서 스스로를 ‘주변자’로 위치시키는 백래시 발화가 정작 주변에 내몰린 존재들을 더 바깥으로 배제하는 인식과 지식을 형성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2021년 5월14일 국회 국민동의청원 누리집을 보면, ‘여성 의무 군복무에 관한 병역법 개정에 관한 청원’이 지난달 22일 올라온 뒤 한달도 되지 않아 10만명의 동의를 받았다. 국회 국민동의청원 누리집 갈무리


 ‘성평등 시대…여자도 군대 가라’


지난 2월 러시아 모스크바의 페미니스트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반대하며 “전쟁은 페미니스트 운동의 본질적 가치나 목표와 화해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이들은 전쟁이 젠더 불평등을 강화하고 인권 발전을 지연시키며, 총탄의 폭력뿐 아니라 성폭력까지 끌고 온다고 비판했다. 이들의 활동을 소개하며 김엘리 서강대 여성학연계전공 교수는 한국 사회를 특정하게 조직하고 이끌어온 ‘안보화’ 문제에 페미니즘이 어떻게 개입할 것인지 질문했다. ‘종북 페미’ ‘종북 게이’라는 혐오발언을 생산하는 안보의 사유 등도 이런 맥락에서 생산되는 담론이라는 것이다.

남성들이 느끼는 억울함의 대표적인 상징인 ‘징병제’와 관련해 김 교수는 2017년 8월19일부터 2020년 5월9일까지 청와대 국민청원 사이트에 게시된 ‘여성 징병제’ 청원 571건(중복 106건)을 대상으로 분석했다. 연구 결과, 이 청원은 특정한 서사와 동일한 패턴을 갖고 있었다. 가장 강도 높게 반복되는 레퍼토리는 ‘자격’ ‘체력’ ‘성평등’이라는 세 용어를 중심으로 했다. 우선 ‘자격 레퍼토리’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각자 의무를 다하고 정당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시민-군인 이념’을 소환한다. 병역 의무는 모든 국민이 져야 하는 것인데, 병역이 면제된 여성들은 권리만 주장하며 의무를 외면한다는 것이다.

두번째 레퍼토리는 ‘체력’에 집중한다. 여성이 남성에 견줘 신체적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성 소방관이나 여성 경찰관이 존재하듯이 여성에게도 나라 지킬 기회를 주되 간호 또는 전투지원 업무 등에 배치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김 교수는 이 주장이 몸에 근거하여 능력을 위계화하는 능력주의와 관련 있다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여성 징병제 청원인들은 ‘양성평등’ 시대에 맞게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병역 의무를 져야 한다는 ‘성평등 레퍼토리’를 전개한다. 여기서 ‘성평등’은 병역 의무가 남녀에게 공평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뜻이다. 젊은 시절 소중한 시간의 상당 부분을 군대에서 보내야 하는 남성들과 달리 병역 의무를 면제받는 여성들은 ‘혜택받는 집단’이 된다. 또 여성 징병제를 실시하지 않고 페미니즘 정책을 시행하는 정부는 이런 여성들을 비호하는 집단으로 간주된다. 이렇게 특혜를 입는 여성들이 미투 운동, 페미니즘 교육, 낙태죄 폐지 운동을 벌이는 것은 자기 이득만 챙기는 이기적인 일이며 여성 징병제에 대해 침묵하는 여성가족부와 페미니즘은 공정함과 성평등을 훼손한다는 논리다.

학자들은 신자유주의 시대 능력주의 담론이 사회 구조의 불평등 문제를 외면하고 사회적 약자를 ‘착취자’로 지목한다고 진단했다. 12일 오후 강원도 원주 상지대에서 연 한국여성학회 추계학술대회 ‘페미니즘·온라인·운동’ 세션에서 연구자가 발표하고 있다. 한국여성학회 제공


 여자들은 ‘완벽한 페미니스트’ 강박


종합하면, 청원인들에게 여성 징병제 도입은 현재의 불공정을 바로잡는 정치적 행위다. ‘소녀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페미니즘의 수사를 역이용하면서 ‘피해자 정체성’을 가진 상태에서 여성 징병제의 필요성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여성 징병제 청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가 군대에 가야 한다는 신념체계’이며 이는 분단 사회인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일종의 집단적 마음 구조”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여성 징병제를 둘러싼 찬반 논쟁으로만 군사, 안보 담론이 수렴되는 것은 군사 노동의 구조를 간과하고 젠더 권력을 비가시화할 수 있다고 김 교수는 경계했다. 군대 내 인권 문제나 안보 수행을 하면서 겪는 사고와 위험 문제를 오히려 회피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국방부 역시 ‘성평등’ ‘능력주의’ 같은 문화 논리를 끌어와 안보 담론을 펼친다. 김 교수는 “여성 징병제 청원은 단순히 여성을 군대에 보낼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병역 정책과 담론이 젠더 문제 뒤에 숨어서 병역에 관한 남성의 경험이나 현실의 구조적 모순을 보이지 않게 한다”고 말했다.

한국의 군사 안보 담론은 결국 ‘국민 자격’의 문제와 연결된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군대에 가지 않는 사람은 사회의 권리를 향유할 수 없다는 여론과 맞닿아 있으며 타 집단을 배제하며 적대화하는 방식으로 시민권 담론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불평등 구조를 보이지 않게 하고 ‘성평등’ ‘피해’ 같은 페미니즘의 언어를 왜곡해 도구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지금 한국 사회 백래시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현상이다. 학자들은 이런 포스트페미니즘의 효과가 단순한 퇴행만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남성들 사이에서 피해 의식이 확산하며 억울감이라는 집단의 정서를 이루는 동안, 비슷한 세대의 여성들은 ‘완벽한 페미니스트 규준’을 찾으려는 강박에 혼돈을 느낀다는 분석도 나왔다. 송지수 연구자(서울대 사회학과 석사 졸업)는 ‘페미니즘 지식과 알기: 터프(TERF) 입장을 지지하는 여성들을 중심으로’라는 발표에서 페미니즘 이슈에 ‘화력’을 모으고 대응해온 백래시 시대 젊은 여성들의 곤경을 설명했다. ‘트랜스젠더 배제 페미니즘 입장’을 뜻하는 ‘터프 입장’은 ‘생물학적 여성’만이 여성운동의 주체가 될 수 있고 그 운동의 성과를 ‘생물학적 여성’끼리만 나눠야 한다는 견해를 가리킨다.

학자들은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말이 페미니즘 백래시를 대표하는 기표로서 정치화되었다고 분석한다. 이유진 기자


발표를 종합하면, 소셜미디어는 여성들에게 페미니즘 의제를 놓고 직접 맞붙어 싸우는 공간을 제공하고 빠른 행동을 요구한다. 터프 입장을 지지한다고 스스로 밝힌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여성 연구 참여자들은 소셜미디어에서 ‘스탠스’ ‘라인’ 같은 입장을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논란이 되는 사안에 재빨리 견해를 표명하면서 논쟁 상대를 확실히 제압할 수 있는 간명한 지식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터프 입장’은 ‘트랜스 배제’라는 타자에 대한 폭력적 태도의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럼에도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상대적으로 논리가 복잡하지 않고 단순해 보이는 ‘터프 입장’을 지지하는 측면도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은 이들 대부분도 커다란 혼란을 호소했다. 페미니스트로서 비연애, 비섹스, 비혼, 비출산이라는 ‘4비’를 실천하고 스타를 추앙하는 ‘덕질’을 그만두며(탈덕) 화장과 꾸밈을 적극 거부하는 ‘탈코르셋’을 해야 하지만 이렇게 ‘완벽한 페미니스트’가 돼야 한다는 강박과 피로감은 오히려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디지털 세상과 달리 현실에서는 덕질, 이성애 관계, 꾸밈에서 오는 행복감도 무시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조차 이런 갈등과 혼란을 터놓고 말할 기회가 부족한 것을 연구자는 우려했다. 이들이 페미니즘 지식을 더 깊고 넓게 받아들이는 기회를 가로막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날 마지막 시간 토론에서 참석자들은 반지성주의와 진실을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탈진실’을 백래시 시대의 중요한 특징으로 꼽았다. 배은경 서울대 여성학협동과정 교수는 “피해라는 개념을 역이용해 남성이 오히려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한국에서는 억울함이라는 감정을 훨씬 더 강력하게 정치적으로 동원하고 있는 것 같다. 앞으로는 디지털 공간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부족주의, 반지성주의, 탈진실 흐름과 더불어 타인의 인정을 철회하는 ‘캔슬 컬처’가 어떻게 지금의 정치와 연관되는가를 중심으로 백래시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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