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호의 시선] 대법원 불신 부채질한 김태우 유죄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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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3.06.01. 오전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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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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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찬호 논설위원
문재인 정권 시절 청와대 비리를 폭로한 김태우 전 강서구청장이 지난달 18일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됐다. 김 전 구청장은 청와대 특별감찰반원 시절인 2018년 말 문재인 청와대의 비위 의혹 30여 건을 폭로했다. 그러자 청와대는 “미꾸라지 한 마리가 개울물을 온통 흐리고 있다. 희대의 농간을 부리고 있다”며 그를 고발했다. 하지만 그가 폭로한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과 유재수 전 부산 부시장 감찰 무마 사건은 사실로 인정돼 하급심에서 유죄 판결이 났다. 김은경 환경부 장관과 신미숙 청와대 인사비서관은 유죄가 확정됐고, 조국 민정수석과 백원우 비서관도 1심에서 유죄가 선고됐다. 개울물을 흐리고, 농간을 부린 것은 문재인 정권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도이치 문건 폭로 경관 선고유예
공익 기여 더 큰 김태우는 징역형
김명수 법원, 이중 잣대 의혹 자초

김 전 구청장의 폭로가 없었다면 이런 비리는 영원히 묻혔을 것이다. 그러나 대법원은 공무상 비밀 누설죄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하급심 판단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내부 보고 절차와 미확인 사실을 공개했고, 국민권익위나 수사 기관에 신고·고발하기에 앞서 언론에 폭로한 점을 이유로 들었다.

납득하기 어렵다. 권력의 비리 고발자는 권력의 보복을 우려할 수밖에 없다. 당시 권익위나 수사 기관은 친정권 성향이 명백했다. 김 전 구청장이 이런 기관들에 먼저 제보했다면 제대로 처리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을 것이다. 또 제보 사실이 청와대로 들어가, 중징계당했을 공산이 크다. 이 때문에 김 전 구청장 말고도 내부 고발자는 언론을 통해 비리를 폭로할 수밖에 없다. 김건희 여사가 언급된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 관련 내사 보고서를 폭로한 경찰관도 언론에 제보했다. 그는 공무상 비밀 누설 혐의로 기소됐지만, 법원은 “내사가 중지된 사안의 수사가 제대로 진행되는 등 공익에 부합한 측면도 있다”며 선고유예 처분을 내렸다.

김 전 구청장에 대한 대법원 판결은 이런 판례와 현실을 외면한 것이다. 김 전 구청장이 보수 정권 청와대에서 근무하다 내부 비리를 언론에 폭로했다면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의 현 대법원이 유죄 판결을 내렸을까 궁금하다.

‘공무상 비밀’은 국가 안보나 정책이지, 공직자 비리가 아니다. 공직자 비리를 ‘공무상 비밀’로 못 박고, 폭로한 신고자를 벌주는 건 파시즘 독재의 전형이다. 김 전 구청장이 서슬 퍼런 문재인 정부 초반에 정권 비리를 폭로해 유죄를 끌어낸 공익적 성과는 ‘도이치 보고서’를 공개한 경찰관의 그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내부 절차 누설 같은 형식 논리를 앞세워 징역형을 선고해 임기 1년도 안 된 구청장직을 상실케 한 건 지나치다는 비판을 받기 충분하다. 대법원은 김 전 구청장이 감찰을 받던 도중 폭로했다며 폭로의 동기도 좋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공무상 비밀 누설의 유무죄를 따지는 데 인사 불만 등 제보자의 개인적 동기는 상관이 없다”는 게 과거 대법원 판례니,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식이라면 누가 공익 신고를 할 수 있겠나.

이례적으로 신속한 유죄 확정도 의문을 자아낸다. 대법원은 김 구청장에 대해 2심 선고 후 9개월 만에 확정판결을 내렸다. 반면 김 전 구청장이 폭로한 감찰 무마 의혹 등으로 기소된 조국 전 수석은 1심 판결에만 3년 2개월이 걸렸다. 의혹 폭로자는 최종심에서 유죄가 확정됐는데 의혹 당사자는 1심 판결만 이뤄진 가운데 내년 총선 출마 가능성까지 열어 두고 있다. 적군 재판은 속전속결, 아군 재판은 질질 끄는 이중 잣대 사법부란 비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김 전 구청장 재판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요즘처럼 사법부의 신뢰가 땅에 떨어진 적이 없다. 김명수 대법원장의 책임이 크다. 그가 재직한 5년여 동안 1심 판결이 2년 넘게 나오지 않은 장기 미제 사건이 2배 넘게 급증하는 등 재판 지연이 일상화하며 많은 국민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 고법부장 승진제 폐지와 법원장 추천제 도입으로 열심히 재판할 동기가 사라진 결과다. 김 원장이 재직한 5년간 전체 법관의 10%에 가까운 344명의 판사가 법복을 벗었다는 집계도 뼈아프다.

김 대법원장 개인의 부적절한 처신도 두드러진다. 그의 아들 부부는 강남 아파트 청약당첨 뒤 1년여간 아버지 공관에 거주한 사실이 알려져 공분을 샀다. 또 김 대법원장은 2020년 5월 사직의 뜻을 표한 임성근 고법 부장 판사에게 “까놓고 탄핵하자고 설치는데 사표 수리했다고 하면 국회에서 무슨 얘기를 듣겠냐”고 말한 것을 부인한 혐의 등으로 고발당해 수사 대상이 됐다. 차기 대법원장이 김 대법원장을 반면교사 삼아 사법부의 권위 회복에 전력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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