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근 칼럼] 전세사기 피해가 사회적 재난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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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3.12.28. 오후 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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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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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입신고-확정일자 무력화
모기지 부재, 전세로 내몰아
청년 절망·파산 외면 말아야
김재근 선임기자
대전의 전세사기 피해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지금까지 파악된 피해 규모는 229채 2563가구로 금액은 2500억원 가량 된다. 앞으로도 여러 건물(다가구)에서 전세금 미반환 사태가 예견되는 등 피해액이 5000억원 대에 이를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정부가 특별법까지 만들어 여러 대책을 내놓았지만 체감도는 그리 높지 않다. 피해자들은 정부에서 먼저 피해자를 구제하고 나중에 구상권을 행사하여 돈을 회수하는 '선(先)구제 후(後)구상권 청구'를 주장하고 있지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피해 당사자의 과실이나 책임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꼼꼼히 살펴보면 전세사기 피해는 허술한 등기제도와 후진적 주택금융, 불합리한 주택공급 시스템이 뒤얽힌 사회적 재난의 성격이 짙다. 피해자들은 일확천금을 노리고 다단계나 가상화폐, 부동산에 투기한 사람들이 아니다. 이 나라의 법과 제도를 믿고 전세계약을 했던 선량한 주거약자들이다. 다수가 전세보증금이 전재산인 사회 초년생과 청년층이다.

가장 큰 문제는 등기제도가 너무 엉성하다는 점이다. 정부는 지금껏 전입신고를 하고 확정일자를 받으면 전세금이 안전하다고 강조해 왔다. 그러나 이번 전세사기에서 보듯 이러한 믿음은 전혀 소용이 없었다. 임대업자(집주인)와 공인중개사가 선순위채권 액수를 줄여 말하면 당할 수 밖에 없다. 다가구주택이나 오피스텔은 등은 등기부를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가구별 보증금 현황이 모두 기재돼 있지는 않은 것이다. 집주인이 전세등기를 꺼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입자가 계약을 하기 전에 건물 전체의 보증금 규모를 확인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확정일자부여현황을 열람하려면 집주인의 동의서와 주민등록증 사본를 갖고 동사무소나 등기소에 가야 하는 데 이런 것을 들어줄 집주인이 어디 있겠는가. '갑( 집주인)'은 전체 전세금이 얼마인지 잘 알지만 '을(세입자)'은 매우 알기 어려운, '갑'만을 위한 구조인 것이다.

두 번째로 후진적인 주택금융시스템도 부실한 전세 양산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잘 알다시피 우리나라 금융은 수출기업 대출에 치중해왔다. 미국처럼 30-40년짜리 모기지를 통해 개인이 주택을 마련하도록 도와주는 제도 자체가 없었다. 내 집을 갖기 전까지 피땀 흘려 한푼 두푼 모아 전세로 사는 게 통례였다. 금융권 밖에서 개인끼리 수억원의 돈을 주고 집을 빌리는 사적 거래가 만연하도록 방조한 셈이다. 세입자가 집주인으로부터 받은 채권은 등기부에 올라있는 근저당권 등의 물권에 비해 권리도 훨씬 약하다.

세 번째, 시대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주택공급 제도도 손봐야 할 부분이다. 대전 전세사기 피해자 80.1%가 다가구주택 세입자들이다. 대전의 전체 가구 중 1인가구가 38.5%나 되지만 이들이 비집고 들어갈 만한 아파트나 질 높은 주택은 없다. 정부에서 권장하는 국민주택은 전용면적 60-85㎡ 이하로 1인가구가 들어가기에는 면적도 넓고 가격도 만만치 않다. 공공이나 민간건설사 모두 돈이 안된다는 이유로 전용면적 20~40m²의 초소형이나 소형아파트 공급을 외면해왔다. 청년들이 주거환경도 열악하고 권리보장의 사각지대인 다가구주택에 입주하도록 강요해온 셈이다.

한참 인생의 꽃을 피워야 할 청년들이 미흡한 제도와 사악한 어른들 때문에 돈도 잃고 희망도 잃고 파산신청까지 하고 있다. 사회도 나라도 아무 책임이 없다고 하는 것은 매우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태도다. 망설이지 말고 선구제 후구상, 전세등기 의무·무료화, 1인가구용 주거 확대 제도화 등의 대안을 마련, 실천하면 된다.

대한민국은 현재 단군 이래 가장 잘사는 세계 6대 강국이다. 이만한 나라가 이만한 문제로 젊은이들은 파산과 절망의 구렁텅이로 내몰아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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