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무죄' 조봉암, 독립 운동 서훈 못 받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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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94> 조봉암과 진보당, 두 번째 마당

 [김덕련 기자]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 번째 이야기 주제는 조봉암과 진보당이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야기 마당 1∼3] 한국전쟁 
[이야기 마당 4∼8] 친일파 
[이야기 마당 9∼15] 학살 
[이야기 마당 16∼31] 해방·분단 

[이야기 마당 42535.16쿠데타 

[이야기 마당 5462] 제3공화국 


프레시안 : 제1차 조선공산당이 와해된 후 조봉암은 당 재건 활동에 참여했다. 그런데 국내에서 제4차까지 조선공산당이 만들어지는 동안 조봉암은 만주, 상하이를 비롯한 해외에서 활동했다. 국내에 들어오지 않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인가? 제2차 이후 조선공산당 지도부와 불편한 관계였던 점이 작용했다는 지적도 있다.

서중석 : 조봉암이 국내로 들어올 수 없었던 것은 국내에 들어오면 체포될 우려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건 김단야나 김찬도 비슷했다고 본다. '특고'(특별고등경찰)를 비롯한 일본 경찰이 이미 조봉암의 활동을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고, 조봉암의 얼굴을 모를 리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해외에서 계속 활동할 수밖에 없었지 않나 싶다. 국내 지하 아지트가 튼튼했다면 들어와서 활동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에 조봉암 정도로 알려진 사람이 국내에 들어오기는 어려웠으리라고 본다.

제2차 조선공산당 쪽과 껄끄러운 관계였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건 조봉암만 그런 게 아니라 김단야, 김찬 이쪽이 다 껄끄러운 관계였다고 볼 수 있다. 조선공산당 해외부의 김단야, 김찬, 조봉암은 아주 거물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계속 중앙 간부라고 주장하면서 국내 간부들을 계속 지휘하려 했다. 그렇지만 이들이 주축이었던 제1차 조선공산당은 신의주 사건으로 국내에서 이미 없어지고, 비밀리에 강달영을 책임비서로 한 제2차 조선공산당을 만든 상태였다. 제2차 조선공산당 간부들이 자신들 중심으로 당 활동을 하려 한 건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해외부에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이런 식으로 지시라고 할까 지휘하는 것들이 있고, 또 제2차 조선공산당에서 중앙 간부로 임명한 바도 없는데 해외부 사람들이 중앙 간부로 활동하니 제2차 조선공산당 주축들이 '당신들은 중앙 간부가 아니니 그렇게 활동하지 마라. 우리가 당 중앙이다. 어떻게 우리한테 지시하는 게 있을 수 있느냐', 이런 주장을 편다.

1926년 6.10만세운동을 겪으며 제2차 조선공산당은 비밀리에 김철수 등을 통해 제3차 조선공산당으로 발전하게 된다. 다시 말해 제2차 조선공산당 후기에서 제3차 조선공산당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이른바 '김철수당'이 활동하게 된다. 김철수는 원래 상해파여서도 그렇겠지만, 폭넓게 여러 세력을 규합해야만 조선공산당이 곤경에서 벗어나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봤다. 그렇기 때문에 서울파를 많이 받아들였다. 또 제3차 조선공산당을 ML(마르크스·레닌)파라고 이야기하는데 여기엔 일본 유학생들이 상당수 들어 있었다. 김철수가 이쪽도 받아들이고 하면서, 이쪽한테 제3차 조선공산당이 넘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제1차 조선공산당을 주도한 화요파는 그전부터 서울파와 심각한 갈등 관계를 맺고 있었고 ML파에 대해서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것 때문에도 '김철수당'이라고 할까, 조선공산당 국내파 쪽과 사이가 원만할 수 없었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민족 유일당 운동과 조봉암

프레시안 : 조봉암은 1927년 민족 유일당 운동에 동참한다. 해방 후 조봉암이 보인 모습에 비춰보면, 민족주의자와 함께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회주의자에 비해 유연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어땠나.

서중석 : 조봉암은 1927년이 되면 새로운 활동을 전개하는데, 조봉암만 그렇게 활동한 건 아니었다. 이 시기에 많은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가 같이 활동하는 모습이 여러 군데에서 나타난다. 국내에서도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가 신간회를 1927년에 조직했고, 만주에서도 정의부, 신민부 같은 여러 단체가 '유일당을 만들어서 독립 운동 전선을 좀 더 강력하게 통일해야 한다'는 활동을 했다. 거기서도 유일당 운동 또는 유일 독립당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상해를 중심으로 한 중국 관내(산해관 안쪽)의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도 유일당 운동 또는 유일 독립당 운동을 전개했다. 사실 6.10만세운동을 벌이려 할 때 이미 국내 조선공산당 쪽에서도 유일 독립당을 만들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이건 국내, 만주, 중국 관내를 비롯한 모든 지역에서 같이 일어난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어쨌건 1927년 4월 민족주의자로는 홍진(임시정부 전 국무령)이 대표가 되고 사회주의자로는 홍남표가 대표가 돼서 '전 민족적 독립당 결성 선언문'을 발표하고 '한국 유일 독립당 상해 촉성회'(상해 촉성회)를 만든다.

조봉암이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한 건 틀림없다. 다만 이 당시 조봉암이 폭넓은 좌우 합작 또는 국공 합작 비슷하게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의 협동과 단결을 얼마만큼 중시했는가를 보여주는 문건이 뚜렷하게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조봉암이 1925년에 쓴 글 가운데 그런 것이 부분적으로 보이고, 6.10만세운동 당시 김단야를 비롯한 해외부의 활동에서 그런 면이 다분히 보인다. 또 조봉암이 상해 촉성회를 만들 때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계속 그런 활동을 한 점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1929년 10월 조봉암은 구연흠, 홍남표와 함께 사회주의자를 대표해서, 임시정부에서도 활동을 많이 한 이동녕, 조완구 같은 민족주의 원로들과 함께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이라는 걸 만들어서 활동을 계속했다. 유호(留?)에서 호는 상해를 가리킨다. 지금도 상해에 가면 자동차 뒤에 '호'라고 쓰여 있지 않나. 즉 유호는 '상해에 머물고 있는'이라는 뜻이다.

어쨌건 이처럼 민족주의자와 조봉암을 비롯한 사회주의자가 함께 유일 독립당 운동을 펴지만, 상해 촉성회는 별 활동을 못 하게 된다.

프레시안 : 어째서 그렇게 되나.

서중석 : 그 무렵 중국의 국공 합작이 깨지고 장개석(장제스)의 국민당 권력과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심한 대립, 다툼이 나타난 것이 영향을 끼친 면이 있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상해 쪽은 독립 운동을 위한 물적인 조건이 상당히 열악했다는 점도 작용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예컨대 만주만 하더라도 이주민이 상당히 있지 않았나. 정의부, 신민부, 그리고 그보다 나중에 만들어지는 국민부는 모두 그런 이주민들을 기반으로 했다. 그러나 상해는 그러한 이주민 기반이 대단히 약했다. 한국인 거주민이 조금 있기는 했지만 소수였다. 독립 운동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해줄 수 있는 게 너무 약했다.

거기다가 여러 독립 운동 세력 또는 민족 해방 운동 세력, 사회주의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걸 통합해서 일을 해나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통합 세력을 구성해 일을 해나가는 게 상해에서 쉽지 않았다는 건 이 시기에 임시정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봐도 알 수 있다. 이 무렵 임시정부는 거의 일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지 않았느냐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였다. 그러니 상해 촉성회도 일을 해나가기가 굉장히 어렵지 않았겠느냐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조봉암은 1929년에 다시 이동녕, 조완구와 함께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을 만들어냈다. 그건 계속해서 이런 활동을 하겠다는 것을 뚜렷이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동방피압박민족반제동맹이라는 걸 만든다. 여기 들어온 단체들은 대부분 사회주의 계열이었다는 점에서 이 조직을 좌우 연합이나 합작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것도 전선체였고, 여러 단체를 규합해 전선체를 형성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물론 여기서도 소련을 강력하게 옹호하고 중국의 혁명, 이건 사회주의 혁명을 주로 가리키는데 그걸 지지하면서 일제를 타도해 조선 독립을 획득한다는 걸 가장 중요한 목표로 내세운 건 틀림없다. 그 후 1931년 9.18사변이 일어나 만주가 전반적으로 일제 손아귀에 넘어갈 뿐만 아니라 중국 전체가 큰 영향을 받는데, 그럴 때에도 1931년 11월 상해한인반제동맹이라는 전선체를 만들어 활동하는 걸 볼 수 있다.

그런데 1920년대 후반 상해 지방의 공산주의자들은 새로운 사태를 맞이했다.

프레시안 : 무엇인가.

서중석 : 뭐냐 하면, 일국일당 원칙에 의해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게 된 것이다. 전부 다는 아니지만 대다수의 유명한 공산주의자들이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조봉암도 1927년에 입당해 상해에서 한인 지부를 결성했다. 9.18사변 전인 1931년 1월에 중국공산당 상해지부 서기를 했다고 나온다.

하여튼 중국공산당원으로서 이 당시에 활동했는데, 그건 러시아에 가 있던 사람들이 소련공산당원으로 활동한 것하고 유사한 면이 있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들도 조금 있으면 다 중국공산당에 들어가지 않나. 그런 것과 성격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이 와해된 후 조봉암은 해외에서 당 재건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민족 유일당 운동 등에 함께했다. 사진은 2013년 7월 31일, 망우리 묘지공원(서울 중랑구)에서 열린 조봉암 54주기 추모제 모습. ⓒ연합뉴스


7년의 수감 생활과 감옥에서 맞은 40대

프레시안 : 조봉암은 33세이던 1932년 상해에서 체포된다. 그 후 7년간 옥살이를 하며 감옥에서 40대를 맞는다. 조봉암은 어떻게 하다가 체포됐나.

서중석 : 조봉암은 1932년 9월에 체포된다. 그때 체포되는 건 조봉암만이 아니다. 조금 있으면 홍남표를 비롯한 주요 공산주의자들 다수가 체포되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 안창호 등도 체포된다.

이건 무엇 때문이었느냐. 당시 상해 임정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은 일본 관헌들이 들어오지 못하는 상해 프랑스 조계를 중심으로 독립 운동을 했고, 사회주의자들도 그 지역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1932년 4월, 유명한 윤봉길의 거사가 일어났다. 대단한 폭탄의 위력을 보여주지 않았나. 일제가 만주를 점령한 데 이어 중국을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위해 시라카와 요시노리를 상해 방면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는데, 천장절(일본 천황 생일)과 상해 침공 승리를 축하하는 행사장에서 바로 그 시라카와 요시노리를 죽인 것 아닌가. 그러자 일제가 '이제 상해에 있는 한국인 활동가들은 민족주의자건 사회주의자건 가만 놔두지 않겠다', 이렇게 나온 것이다. 그러면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이 시기에 상당수 체포되고, 그때부터 임시정부도 참 긴긴 세월 동안 여기저기 옮겨 다녀야 했다.

이때 체포된 조봉암은 7년 징역형을 받는데 나중에 1년이 감형되기는 했다. 그래도 1939년 7월에 출옥했으니까 거의 7년을 꼬박 채웠다고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감옥에서 나온 후 조봉암은 해방이 될 때까지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는다. 체포된 때부터 따지면 13년의 공백이 있었던 셈인데, 이는 해방 후 조봉암의 행보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출옥 후 조봉암은 어떻게 지냈나.

서중석 : 조봉암은 감옥소에서 나온 후 유휴분자로 지냈다. 우리말로는 왕겨연료조합이라고 표현되고 한문으로는 비강조합이라고 하는 곳에서 일했다. 뭐냐 하면 정미소에서 왕겨, 그러니까 쌀 껍데기를 넘겨받아서 연료로 배급하는 작은 회사 같은 곳이었다. 왕겨연료조합은 그런 곳인데, 조봉암은 인천에 있던 비강조합에서 조합장으로 활동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시기에 사회주의자들 중에서 조봉암만 유휴분자였던 건 아니다. 그 무렵 감옥소에서 나온 사람들, 예컨대 해방 직후 장안파 조선공산당의 거물로 이야기되는 최익한, 정백, 이영 같은 사람들도 향리에서 또는 서울에서 유휴분자로 지냈다. 일제가 워낙 철저하게 감시한 것도 있고 여러 조직과 연결이 끊긴 것도 있고 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장안파로 불린 이 사람들은 이것 때문에 나중에 재건파한테 되게 당한다. '너희는 그때 뭐했느냐', 이런 비난을 많이 받는다. 그런데 사실은 재건파 쪽에도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경우가 있었다. 재건파 중에는 일제 말기에 활동한 사람들이 있었고 감옥소에 들어간 사람도 많기는 했지만, 예컨대 조봉암하고 같이 인천에 있었고 재건파에 속하게 되는 이승엽은 유휴분자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랬다. 이 시기에 이승엽이 별다른 활동을 했다는 자료가 안 나온다. (장안파 조선공산당은 해방 당일인 1945년 8월 15일 결성됐다. 장안빌딩에서 결성 모임이 이뤄져 장안파로 불렸다. 그러나 5일 후 결성된 박헌영 중심의 재건파에 주도권을 뺏기고, 재건파 중심의 조선공산당에 흡수됐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맞이한 해방

프레시안 : 이 시기에 박헌영은 어땠나.

서중석 : 그러면 박헌영은 활동을 많이 했느냐. 박헌영의 경우 조봉암보다 1년 늦은 1933년에 체포됐다. 그리고 조봉암이 출옥한 직후 출옥했다. 박헌영은 6년 징역형을 받았다. 조봉암이 박헌영보다 형량이 더 많았다. 박헌영보다 조봉암이 공산주의자로서 더 중죄를 지었다고 일제 관헌들이 판단한 모양이다. 6년을 다 살지는 않았고 박헌영도 1년 일찍 나왔다.

그러고 나서 박헌영이 일제 말 공산주의자들의 최후의 조직적 활동이라고 이야기하는 경성콤그룹 책임자로 맹활약하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 기간은 굉장히 짧았다. 경성콤그룹에서 활동한 지 1년 조금 지나서 1941년에 들어가면 일본 경찰이 추적하게 된다. 그 때문에 박헌영은 피신하게 되고, 1942년 말이 되면 광주 벽돌 공장 노동자로 들어가서 은거한다. '박헌영이 지방 동지들과 연계를 구축했고 당 재건 준비 사업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고 일부에서 쓰고는 있지만, 이 시기에 뚜렷한 활동을 했다는 자료는 어디에서도 안 나온다. 몇몇 동지들하고 연락하는 정도의 활동이었다.

이 시기에는 오히려 갓 공산주의자가 된 청년들이 계속 잡혀오면서도 지역에서 활동했다. 그런 자료는 여기저기서 나오지만, 유명한 공산주의자 거물들은 감옥소에 들어가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활동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조봉암만 활동을 못한 건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어쨌건 조봉암은 이 시기에 아무런 활동도 못하지 않았느냐는 비난을 받을 수 있었다.

▲ 서대문형무소 고문실을 재현한 모습. 일제 때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이곳에서 모진 고초를 겪었다. 해방 후에는 군사 독재에 저항한 여러 민주화 운동가들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프레시안 :
조봉암은 해방을 어떻게 맞이했나. 이와 관련해, 일제가 패망하기 1년 전인 1944년 8월 여운형을 중심으로 건국동맹이 조직되는데 여기서도 조봉암의 활동은 찾아볼 수 없다. 함께하자는 제안을 여운형 쪽에서 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제안이 왔으나 조봉암이 받아들이지 않은 것인지 궁금하다.

서중석 : 조봉암은 1945년 1월경 헌병사령부 예비 검속에 걸렸다. 이때 많이 걸려들었는데, 조봉암의 경우 여러 번 예비 검속에 걸렸다고 자기 글에 썼다. 그래서 그해 8월 15일까지 구금돼 있었다. 일제가 패망하면서 여운형이 서대문형무소에 최익한 등 40여 명의 정치범 출소를 맞으러 오는데, 그때 조봉암도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오게 된다.

일제 말기에 조봉암이 유휴분자가 되고 활동을 못하게 된 데에는 경성콤그룹과 관계가 나빴다는 점도 작용하지 않았나, 난 그렇게 생각한다. 조봉암은 나중에 주로 중국공산당원으로 활동을 많이 했는데, 그러면서 경성콤그룹 쪽에서는 해방 이전부터 조봉암에 대한 비판이 나왔다. 경성콤그룹과 조봉암의 이런 관계는 해방 후 조봉암이 박헌영과 극적으로 갈라서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그런 것도 작용했고, 또 거물이던 조봉암하고 선을 대는 것도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등의 여러 문제가 있어서 그랬겠지만 다른 공산주의 조직과 연결이 안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 것 때문에도 이 시기에 경성콤그룹 또는 다른 공산주의 조직과 다 연결이 안 되고 결국 조봉암은 유휴분자로 남게 되지 않았느냐, 그렇게 판단한다.

건국동맹의 경우 비밀 단체로 아주 은밀하게 조직해야 했다. 그래서 여운형 및 그와 가까운 동지들은 자신들이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전국 조직 및 중앙 조직을 꾸렸다. 그래서 여운형 쪽이 조봉암한테 건국동맹을 함께 만들자고 했다는 이야기는 지금까지 어떤 자료에도 안 나왔다. 조봉암은 그 당시에 여운형 쪽과 연결될 수도 없었지 않나, 그렇게 보인다.

일제와 유신 체제의 닮은꼴 폭력, 전향 공작…사회주의자는 어떻게?

프레시안 :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사회주의자들에 관한 몇몇 자료를 예전에 볼 때 궁금했던 게 있다. 전향 문제다.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싸우던 사회주의자들 중 일부가 1930년대 들어 전향하기 시작한다. 특히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부터 그 수가 많이 늘어난다. 일제가 1936년 12월 사상범 보호 관찰 제도를 도입해 감시와 전향 공작의 강도를 높인 점, 중일전쟁 초기 일본이 승승장구하면서 국제 질서가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처럼 보인 시기라는 점 등이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옥살이를 하고 출소한 주요 활동가들에 관한 자료들을 보면 전향 여부에 관해 별다른 언급이 없는 경우가 있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눈으로 보면 사회주의자는 이른바 '국체'를 명백하게 부정하는 이들인데 그런 사회주의자들이 어떻게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인지 궁금할 때가 있다. 이 문제, 어떻게 보나.

서중석 : 전향 문제는 굉장히 어려운 문제인데, 장기 감옥소 생활을 한 공산당 핵심 간부들의 전향 관련 자료가 어째서 지금까지 제대로 나오지 않는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 당시에 유명한 공산주의자들이 감옥소에 들어가서 고생을 많이 했다. 그 사람들 중 상당수가 전향을 했을 것 같은데, 그런 자료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친일파로 명백히 돌아선 전향자들, 그자들 자료만 몇 개 나왔다.

당시 전향에는 여러 형태가 있었던 것 같다. 악질 친일파로, 그러니까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변할 수 있느냐 싶을 정도로 확 변하는 경우가 있었다. 사회주의자들 가운데에도 그런 식으로 전향한 자들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적당히 당국과 타협해 형식상의 전향만 하거나, 끝까지 감옥소에서 나오지 않고 전향도 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전에 김남식 선생이 나한테 "일제 시기에는 전향을 하지 않으면 감옥소를 나올 수가 없었기 때문에 감옥소에서 나온 사람은 전부 다 전향한 것으로 봐야 한다. 어떤 형태로든 간에 전향했기 때문에 나온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 (김남식은 현대사 연구자이자 통일 운동가로서 북한을 포함한 한국 현대사 연구에 중요한 여러 자료를 발굴하고 관련 저작을 남겼다.) 그렇다면 적어도 논리적으로 볼 때는, 감옥소에서 나온 사람은 다 거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신의주 감옥에 있던 사상범들을 조사한 어떤 자료를 보면 '전향을 안 하겠다. 전향에 반대한다'고 분명히 표명한 사람은 또 한 명도 없는 것으로 나와 있다. 애매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 여러 명 있고 다수는 전향한 것으로 돼 있더라.

지금으로서는 조봉암 또는 조봉암처럼 유명한 인물들이 전향했느냐, 이 부분을 밝혀줄 수 있는 어떤 객관적인 자료도 없다. 그런데 전향하지 않고 감옥소에서 나올 수 있었느냐 하는 문제는 남아 있다. 조봉암의 전향 여부는 그에 관한 자료가 아직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뭐라고 이야기하기가 굉장히 힘들다.

프레시안 : 20세기 한국에서 폭력적 전향 공작을 한 건 일제만이 아니었다. 1970년대 유신 체제에서 박정희 정권도 비전향 장기수들에게 가혹한 폭력을 행사하며 강도 높은 전향 공작을 했다. 견디다 못한 장기수 중 여러 명이 목숨을 잃을 정도였다. 또한 그와 맞물려 1975년에는 사회안전법을 만들어, 사상범 등이 형기를 마치더라도 정상적으로 사회에 복귀하지 못하게 막았다. 한마디로 '전향을 공개 선언하지 않으면 멀쩡히 살아서 나갈 생각을 하지 마라', 이런 태도였다고 볼 수 있다. 일제의 전향 공작이 박정희 정권 때 진행된 것보다 강도가 낮았을 것 같지는 않다는 점에서, 앞에서 말한 일제 때 사회주의자들의 전향 문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서중석 : 그 부분도 모호하다. 유명한 사회주의자들 가운데 감옥소에서 나온 사람들, 예컨대 박헌영이나 조봉암이 대화숙(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에 갔다는 이야기도 안 나오고 사상범 보호 관찰소에 들어갔다 나왔다는 자료도 안 나온다. 이영, 정백 같은 다른 사회주의자들도 마찬가지다. 대화숙은 전향자라든가 사상 활동, 독립 운동을 한 사람들을 넣은 곳인데, 안재홍 글을 보면 심지어 여운형한테도 거기에 나오라고 했고 자기도 거기에 한 번 나갔다는 식으로 돼 있다. 그런데 감옥소에서 나온 사회주의자들의 경우 그에 관한 자료가 안 나온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전향 운용이 일제 말의 그것을 많이 본떴다는 이야기들을 하는데, 그렇다면 이 사람들도 사상범보호관찰소에 들어갔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건 자료에 안 나온다. 사상범보호관찰소라든가 대화숙 운영에 대해서는 여러 논문이 나와 있긴 한데, 이런 사람들과 관련해 더 연구할 필요가 있다.


간첩 혐의 벗고도 독립 운동 서훈을 받지 못한 이유

ⓒ오월의봄
프레시안 :
다른 문제를 짚었으면 한다. 훗날 조봉암은 이승만 정권에 의해 간첩으로 몰려 1959년 목숨을 잃는다. 그로부터 52년 후인 2011년 대법원은 조봉암의 간첩 혐의가 조작됐음을 재심에서 인정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그 무렵 조봉암 서훈 문제도 관심을 모았다.

서중석 : 서훈 이야기가 나왔던 건 조봉암이 독립 운동을 워낙 많이 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3.1운동에서도 1년 정도 감옥소에서 생활했으면 그건 건국포장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직후 YMCA 관련 사건으로 또 감옥에 들어가고 모진 고문을 당하지 않았나. 허위 제보로 들어갔던 것이긴 하지만, 어쨌건 독립 운동과 관련 있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6.10만세운동으로 감옥소에 들어갔거나 그 운동에 깊이 관련된 사람들을 보면, 아주 중요한 운동이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에 대해 상당한 서훈을 했다.

돌아보면, 1987년 6월항쟁 이후에 와서야 김규식(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비롯해 납북당한 사람들에 대한 서훈이 가능하게 됐다. 사회주의자로서 독립 운동을 한 사람들 중에서 서훈된 사람은 김대중 정권 전에는 극소수였다. 대표적인 게 고려공산당 상해파 지도자인 이동휘 같은 사람인데, 이동휘도 1990년대에 서훈됐다(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김대중 정부 때 사회주의자 중 소수가 서훈됐다. 사회주의자로서 독립 운동을 한 사람들이 서훈을 많이 받게 된 건 노무현 정권 때다. 일제 말에 친일 활동을 했거나 해방 후 남로당의 주요 간부로 활동한 사람을 제외한 상당수가 그때 서훈됐다. 조동호도 그중 하나이고, 주세죽도 그렇고, 권오설도 그렇고, 1930년대 말 소련 비밀경찰 손에 죽은 김단야도 그때 서훈됐다. 김재봉, 김철수도 이때 서훈됐다. 이 중 권오설은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이 양반은 상해 해외부 지시를 받아 6.10만세운동에서 공산주의자로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 때문에 감옥소에 들어가 무지하게 고문을 당했고, 그 여독(餘毒) 같은 게 작용해 몇 년 후 세상을 떠났다. 권오설은 6.10만세운동을 대표하는 사람 중 한 명이기 때문에 독립장을 줬을 것이다. (사회주의자들과 더불어 뒤늦게 독립 운동 서훈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 노무현 정권 때인 2005년에 서훈된 여운형이다.)

이처럼 사회주의자들도 많이 서훈을 받으면서 조봉암 서훈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진보당 사건과 관련해 국가보안법 부분만 풀리면 조봉암도 높은 서훈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왜냐하면 6.10만세운동뿐만 아니라 1927년 유일당 운동을 조봉암처럼 적극적으로 한 사람이 드물고, 전선체 활동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옥소에 7년이나 갇혀 있었고 나중에 예비 검속을 당한 것도 포함되는데, 그런 걸 다 합치면 조봉암은 서훈 등급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조봉암은 일제 때도 활동을 많이 한 분이기 때문에 독립 운동 서훈을 받아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글로도 쓰고 그랬다. 그래서 2011년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내렸을 때, 이제는 조봉암이 서훈될 것이라고 여러 사람이 생각했다. 하지만 서훈이 안 되더라.

프레시안 : 독립 운동가 서훈 문제는 굴곡진 한국 현대사의 모습을 보여주는 지표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사회주의 독립 운동가들에 대한 매우 뒤늦은 서훈도 그렇고, 임시정부 부주석이자 해방 후 우익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이던 김규식조차 6월항쟁 이전에는 서훈을 받을 수 없었던 데서도 이는 잘 드러난다. 그런데 조봉암에 대한 서훈은 왜 이뤄지지 않은 것인가.

서중석 : 일제 말기는 일본이 성금을 내라는 요구를 많이 할 때다. 내가 어떤 곳에서 이야기를 들으니까, 그때 왕겨연료조합장으로 있던 조봉암도 150원을 냈다고 하더라. 그렇게 성금을 낸 건 친일 행동 아닌가. 아무리 독립 운동을 많이 했어도 일제 말에 친일 행동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을 때는 서훈이 이뤄질 수 없다. 그 점은 확실하다.

당시 150원이면 그렇게 적은 돈만은 아니다. 물론 큰돈은 전혀 아니다. 5000원, 1만 원 또는 몇 만 원 정도 내야 큰돈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 그렇지는 않았다. 하지만 돈을 냈다는 기록이 있는 건 사실이다.

아마 조봉암은 이 문제도 정치적으로 판단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양반은 정치적인 판단을 많이 한 분이다. 예컨대 상해에 있을 때 폭넓게 활동한 것도 그런 정치적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다른 사회주의자들에게 '저놈은 이상한 놈이다', 이런 비난을 받을 수 있었다. 민족주의자도 많이 만나고, 다른 사회주의자들이 볼 때는 안 만나도 될 사람도 만났다. 그건 여운형도 마찬가지였다. 외국인들도 많이 만나고 그랬는데, 이런저런 것들 때문에 여운형이나 조봉암 같은 대중적 정치가들은 참 비난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성금 문제에 대해서도 조봉암은 '이거 뭐 별거냐. 나에 대한 일제의 감시를 조금 늦추는 역할을 한다면 괜찮지 않겠나', 이런 판단을 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게 결국 이분한테 독립 운동에 대한 큰 서훈을 드릴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서 아쉬웠다.

(조봉암이 일제에 헌금 150원을 냈다는 기사는 1941년 12월 23일 자 <매일신보>에 실렸다. 이 기사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현재 판단이 엇갈리고 있다. 유족 및 '죽산 조봉암 선생 기념 사업회' 등에서는 당시 조봉암에게 그 정도의 여윳돈은 없었으며, <매일신보>가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만큼 기사가 조작됐거나 누군가 조봉암 이름으로 대납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아흔다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김덕련 기자 (pedagogy@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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