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반도체가 대만의 성공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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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칩 설계하는 이효승 네오와인 대표지난 4월 14일 기준 대만증시의 시가총액은 49조9986억대만달러(약 1조6341억달러)였다. 같은 날 한국 증시의 시가총액은 2447조4203억원(약 1조8499억달러)이었다. 대만 인구(약 2320만명)는 한국(약 5160만명)의 절반에 못 미치는데, 전체 기업의 시가총액은 비슷하다. 지난해 한국을 앞선 적도 있다. 대만의 1인당 GDP는 2022년 약 3만2640달러로 한국(약 3만2250달러)보다 높았다. 2003년 이후 20년 만에 한국을 추월했다. 대만의 성취 뒤엔 반도체가 있다.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분야 세계 1위인 대만의 TSMC를 필두로 반도체 산업이 동반 성장하면서 대만 경제 전체가 수혜를 입었다.

이효승 네오와인 대표가 4월 19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사옥에서 한국 시스템반도체 발전 전략을 이야기하고 있다. / 주영재 기자


메모리반도체 위주로 성장해온 한국은 글로벌 경기 하락에 따라 반도체 재고가 쌓이면서 위기를 맞고 있다. 반도체 수출이 줄면서 무역적자 폭은 커지고 있다. 반면 스마트폰의 AP를 비롯해 GPU와 NPU 등 인공지능 개발에 쓰이는 시스템반도체는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시장규모와 부가가치가 더 크고, 성장성도 밝은 시스템반도체에서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찾아야 한다.

보안 관련 반도체칩을 설계하는 이효승 네오와인 대표는 최근 자신의 페이스북에 ‘왜 한국은 대만에 추월당할까’라는 제목의 글을 연속해 쓰고 있다.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 대만에 추월당하게 된 원인을 짚고 시스템반도체 산업을 키울 방안을 풀어낸 글이다. 반도체 산업을 이해할 수 있는 자세한 설명도 곁들였다. 그는 지난 4월 19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본사에서 주간경향과 만나 정부가 출자해 민간에 위탁해 운영하는 방식의 공공 파운드리인 ‘KSMC’를 만들어 시스템반도체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시스템반도체를 키워야 국민소득 10만달러 시대가 가능하다”면서 “한 장의 웨이퍼에 여러 회사의 설계물이 한 개의 칩으로 들어가는 MPC(Multi Project Chip) 방식을 도입해 파운드리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페이스북에 연재를 시작한 이유는.

“우리 인구 절반인 대만의 시가총액이 우리와 맞먹는다면, 그 원인을 분석해야 한다. 대만이 잘한 것과 우리가 못한 걸 알아야 한다. 그래야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는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으니 나라도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이 암에 걸렸다고 지적했다.

“메모리반도체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의 경우 메모리 분야에 있던 임원이 시스템반도체로 가곤 하는데, 이는 석유화학을 하던 사람이 철강을 맡는 것과 같다. 두 분야는 실리콘을 사용하는 것 외엔 완전히 업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메모리를 하던 사람이 시스템으로 가면 신입사원이나 마찬가지다. 이들이 (경영을) 좌우하니 문제가 된다. 사실 시스템반도체의 중심은 제조가 아니다. 60%를 팹리스(반도체 설계) 산업이 담당한다면, 30%를 파운드리가 맡고 나머지를 패키징과 테스트를 담당하는 OSAT(외주 반도체 조립·테스트)가 차지한다. 지금 용인에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트를 만든다고 한다. 대기업 파운드리와 소재·부품·장비만 주로 이야기할 뿐, 핵심인 팹리스와는 큰 상관이 없다. 파운드리가 출판사라면, 팹리스는 작가에 해당한다. 소부장은 인쇄기와 잉크, 종이를 만드는 회사라고 비유할 수 있겠다. 용인에 출판사를 모은다고, 작가가 그 옆에 갈까. 반도체 설계 인력은 판교 밑으로 내려가지 않는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시스템반도체를 육성하겠다고 하는데, 내용을 뜯어보면 전혀 상관없는 정책인 경우가 많다.”

-MPC를 제안했다.

“MPC와 MPW(Multi Project Wafer)를 구분해야 한다. MPW는 한 장의 웨이퍼에 여러 회사 반도체가 들어가는 구조다. 과거에 마스크 비용(빛으로 회로를 그리고, 불화수소 같은 강산성 물질로 웨이퍼의 회로 패턴 외의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공정)이 팹리스 개발비의 80~90%를 차지할 정도로 비쌌기 때문에 이를 공동 부담하기 위해 MPW가 등장했다. 최근 국내 파운드리에서 MPW 프로젝트 횟수를 늘리겠다고 했는데 이는 마스크 비용을 지원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최근 시스템반도체가 고도화되면서 마스크 비용은 20% 정도로 줄고 나머지 소프트웨어, IP(연산과 통신 등 특정 기능을 수행하는 반도체 설계자산), 백엔드, 레이아웃 비용이 80%로 역전됐다. 이런 비용을 줄이려면 MPW에서 MPC로 바뀌어야 한다. MPW는 개별 칩의 크기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양산이 어렵다. MPC는 동일한 크기의 칩에 여러 회사의 프로젝트를 집어넣는 방식이라 양산에도 유리하다.”

-여러 회사가 MPC 방식의 칩으로 하나의 브랜드를 만들 수도 있겠다.

“사실 시스템반도체는 사용하는 IP가 거의 비슷하다. AI반도체라면 중앙처리장치(CPU)가 있고, D램과 데이터를 주고받는 PCIe 등이 붙는다. 직접 설계하는 건 5% 정도다. ‘우리 회사는 NPU(신경망처리) 기능을 강화했어’ 또는 ‘영상 압축 IP 등을 개발했으니 이걸 검증해보겠어’ 하는 식으로 자사가 만든 IP를 더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AI반도체를 만드는 10개 회사가 400억원씩 부담해 MPW에 참여한다면 마스크에 쓰는 800억원 정도를 줄일 수 있다. 반면 MPC를 하면 IP 등을 공유하기 때문에 비용을 90% 정도 줄일 수 있다. 4000억원에서 400억원, 많아도 800억원 정도로 줄어든다. 우리나라의 약점은 IP를 배치하고, 소프트웨어를 셋업한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정부 지원을 받는다고 해도 최소 100억원은 드니 양산에까지 이르지 못한다. 지금 AI반도체 분야의 스타트업들도 엄청난 투자를 받고 있지만 대부분 개발보다는 이런 IP, 레이아웃, 소프트웨어 검증 비용 등으로 쏟아붓고 있다. MPW로 칩을 개발한 회사 입장에선 MPC 방식으로 진입장벽이 낮아지는 상황이 달갑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이젠 뭉쳐서 상생을 도모할 때다. 많아봐야 100명 정도 되는 개발인력, 커봐야 1조원 정도의 기업으로 수만명의 연구인력에, 900조원이 넘는 시장가치를 가진 엔비디아를 이길 순 없다.”

-삼성전자가 최근 출시한 갤럭시S23에는 퀄컴이 설계해 TSMC에서 생산한 AP를 쓴다고 들었다.

“국내 파운드리와 정부가 MPW를 지원한다면서 큰 선심을 쓰는 것 같지만 사실 양산기록을 쌓고, 공정 노하우를 확보하려면 자기가 돈을 들여 팹리스를 초청해도 부족하다. 없는 것보다 낫지만 나머지 비용이 더 큰 상황에서 (프로젝트가 실패할 위험을 무릅쓰고) 국내 파운드리에 칩 제조를 맡길 유인은 적다. 삼성전자 역시 자사 AP가 게임을 할 때 발열이 심해 제 성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망신을 당하자 차기작엔 경쟁사 제품을 쓸 정도다. 10년 전만 해도 TSMC와 국내 파운드리의 기술이 거의 비슷했다. 고객사들이 자주 찾지 않으니 한순간에 확 기울게 된 것이다. 팹리스들이 국내 파운드리를 이용하려고 해도 바가지를 씌우고, 갑질을 하는 데다 성능도 제대로 안 나오는데 맡기겠는가. 애플은 TSMC에 맡긴 M1, M2칩 등으로 떼돈을 벌었다. 이미 실력 차이가 난 것이다. 국내에선 국뽕에 취한 이들이 많아 삼성전자, SK하이닉스가 다 평정할 것처럼 말한다. 그게 이들 기업에 정작 도움이 될까. 상황을 오판하면 개선이 안 된다.”

-국내 기업 간 협력이 중요한 이유는.

“파운드리는 영업이익을 맞추기 어렵다. 지금이야 DB반도체가 효자가 됐지만 5~7년 전만 해도 적자로 동부그룹 전체가 흔들렸다. 이제 대만의 TSMC처럼 정부가 주도해 KSMC(가칭)를 만들어야 한다. 대만은 TSMC, UMC 같은 서로 완전히 다른 파운드리 회사가 반도체 디지털 라이브러리(PDK·Process Design Kit)를 공유한다. 그래서 TSMC의 생산 능력이 부족하면 UMC가 그 물량을 받아 생산한다. PDK는 극비 자산이지만 대만 반도체 산업의 발전이라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기초 설계 기술을 공유한다. 우리나라는 삼성전자, DB반도체, SK하이닉스가 IP나 설계 필수 요소기술인 아날로그, 디지털 라이브러리를 공유하지 않는다. 한 회사의 생산 능력이 남는다고 다른 회사의 물량을 받아 생산할 순 없다. 파운드리가 제대로 못 서니 팹리스가 힘을 못 쓴다. KSMC를 중심으로 PDK 기술과 IP를 공유하는 방식으로 10년을 투자하면 우리도 TSMC를 따라잡을 수 있다. 이건 정부에서 펀딩해 줘야지 민간에서 할 수는 없다.”

-각국이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한 적극적인 산업정책을 펴고 있다.

“중국은 지난해 보조금과 세액공제 등 5년에 걸쳐 1조위안(약 192조원) 이상을 반도체 산업에 투입하기로 했다. 중국의 반도체 펀드가 부실하게 지원된 경우가 많았다고 하지만 절반만 제대로 썼다고 해도 엄청난 액수다. 미국도 유럽연합도 적극적인 보조금 정책을 펴고 있다. 우리가 그런 말을 하면 자유무역원칙에 위배된다, 민간 회사는 스스로의 힘으로 커야 한다, 정부 돈을 빨아먹으려고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못 버텨서 잠시 피난처 삼아 중국에 가면 기술을 판 매국노가 된다. 수십조씩 쏟아부어 시스템반도체를 키운 중국은 보지 못하고, 수천억 쏟았는데 성과가 없다면서 팹리스는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전차와 비행기, 항공모함, 미사일, 잠수함 등에 다 반도체가 들어간다. 칩 하나의 단가도 100만원, 1000만원씩 한다. 다른 나라는 군용이라는 이유로 이런 용도의 반도체 개발에 지원을 한다. 미국도 국방을 명목으로 첨단기술 회사를 밀어주고 있다. 엔비디아와 HP, 레이시온 같은 회사들이 모두 실리콘밸리 기반의 군수회사에서 출발했다. 지원하면 경쟁력이 없어진다고 하는데, 그렇게 성장시킨 중국 기업에 우리가 밀리고 있다. WTO 제재를 거론하는 건 정부의 성의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 다들 말을 안 해 그렇지 중국에서 인수를 제의하면 다 넘어갈 상황이다. 당장은 중국으로 피신을 해 회사의 명맥이라도 살려야 한다는 생각도 하는 듯하다. 정부가 10년 후 파운드리를 세운다고 하지만 그때쯤엔 파운드리에 (칩 제조를) 맡길 수 있는 국내 팹리스가 없을 것이다.”

-재벌 중심 사회가 혁신을 가로막고 있다고 비판했다.

“항공우주, 조선, 자동차, 철강, 화학, 바이오, 반도체 다 하는 한국이 반도체 하나 있는 대만을 못 이긴다면 무엇 때문인가. 심지어 모두 대기업이다. 그간 우린 대기업만 키우면 세계 최고가 될 줄 알았다. 그래서 대기업 위주의 정책을 폈다. 3~4대 세습경영도 당연시한다. 하지만 일론 머스크, 스티브 잡스 등 미국의 거부는 모두 당대에서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지금은 거의 천재급의 전문경영인이 필요한 시대다. 재벌가들은 대주주일 수는 있지만 경영에 참여해선 안 된다. 재벌이 부동산, 라이선스 사업에 빨대를 꽂고 쉽게 돈을 버니 경제 전체의 역동성이 떨어지고 있다.”

-시스템반도체를 포기해선 안 되는 이유는.

“메모리만 잘하자는 건 말도 안 된다. 우리 메모리반도체가 안 되는 건 시스템반도체가 제대로 못 섰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엔비디아가 그래픽카드를 만들 때 쓰는 메모리 용량을 키우지 않고 있다. 엔비디아의 GPU나 AMD CPU, 컨트롤러 등을 TSMC에서 만든다. 의도적으로 메모리 용량을 줄이고 고속 고용량 탑재를 안 해준다. 리사 수(AMD CEO)나 젠슨 황(엔비디아 CEO)이 암묵적으로 고용량 메모리를 탑재해봐야 삼성과 SK만 키워준다고 생각해 견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엔비디아에서 최근 출시한 RTX4090과 RTX4080이라는 GPU에는 더 성능이 좋은 삼성, SK의 것이 아닌 마이크론의 메모리를 쓴다. 결국 우리가 시스템반도체에서 받쳐주질 못하니 메모리 성장도 막히는 것이다. 지금은 메모리반도체가 전체 반도체 시장의 4분의 1 정도밖엔 안 된다. 연평균 성장률은 2022년에서 2030년 사이 9.2% 정도인 반면, AI반도체는 40% 가까운 성장률이 예상된다. 시스템반도체는 지금 우리가 잘하는 자동차, 조선, 방위산업만이 아니라 인공지능, 로봇, 헬스케어를 비롯해 여러 산업의 기반이 된다. 뒷단의 소프트웨어와 앞단의 마케팅, 법률까지 전체 산업을 아우른다. 우리가 1980년대부터 거의 40년간 메모리를 만들어 국민소득 3만달러 중반까지 올라왔다. 10만달러까지 가려면 시스템반도체가 필요하다. 시스템반도체 시장점유율을 2%에서 20%까지 올린다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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