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행도구 보더니 '동공 지진'…정재승 뛰어든 新거짓말탐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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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2.07.23. 오후 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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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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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비밀은 없다'(2015)에 나오는 폴리그라프(거짓말 탐지기) 검사 장면. 사진 영화 캡쳐
경찰이 첨단 뇌과학을 활용한 거짓말 탐지기를 개발하고, 관련 장비를 운용할 인력을 채용한다. 22일 경찰에 따르면 경찰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손잡고 진행하는 ‘과학치안 공공연구성과 실용화 촉진 시범사업’의 일환으로 2025년 말까지 뇌파를 활용한 거짓말 탐지기 기술과 장비를 개발하기로 했다. 기초 연구용역은 뇌과학자인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가 맡았다.경찰은 기술 개발이 완료되면 검증을 거쳐 이르면 2026년부터 실제 수사에 해당 기술을 시범적으로 도입할 계획이다. 경찰 관계자는 “진술 허위 여부를 자동으로 분석하고, 감정관의 주관이 덜 개입돼 객관성과 신뢰성을 높일 방법을 찾다가 해당 사업을 제안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맥박부터 뇌파·시선까지 분석
경찰에 따르면 새로 개발되는 거짓말 탐지기는 피검사자의 생리적 반응과 뇌파, 동공의 움직임을 인공지능을 통해 분석해 거짓말을 판별한다. '폴리그라프'라고 불리는 기존 거짓말 탐지기에 뇌파·동공 분석 기능을 더한 것이다. 거짓말을 하게 되면 ‘인지적 부담’이 생기고, 이로 인해 맥박이 빨라지거나 땀이 많이 나는 등의 변화가 생기는데, 폴리그라프는 이를 측정해 피검사자가 허위 진술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파악한다.

뇌파 분석의 경우 피검사자의 특정 물건 등에 대한 인지 여부를 알려준다. 예를 들어 살인 사건 피의자에게 범행 도구와 다른 물건을 함께 보여줄 경우, 범행 도구를 볼 때만 다른 관측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 또 동공의 움직임을 통해 시선을 추적할 수도 있다. 정 교수는 “사건 현장 사진을 제시하면, 사건에 관련되지 않은 일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사진을 탐색한다. 하지만 범인은 흉기에 더 집중하기도 하고, 일부러 중요한 정보를 안 보기도 한다”고 말했다.
정재승 카이스트 뇌인지과학과 교수. 중앙포토
경찰은 1962년부터 진술의 신빙성을 판별하는 데 폴리그래프를 활용해 왔다. 현재 전국에 총 48개의 폴리그라프 기기를 배치해 1년에 1만건(지난해 기준) 이상 거짓말 탐지기 검사를 진행하고 있다. 경찰은 현재 뇌파 분석 장비도 11대를 갖추고 있지만, 운용 인력이 없어 장비를 놀리고 있는 상황이다. 경찰청은 지난달 16일 기술 개발과 실무 적용을 맡을 뇌파분석관(경장급) 5명을 뽑겠다는 채용공고도 냈다. 뇌인지과학 등 관련 분야 석사학위 이상 소지자가 대상이다. 경찰관계자는 “올해부터 단계적으로 연구 및 활용 분야를 넓혀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 교수 연구팀은 주요 사건에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을 활용하는 방안도 구상하고 있다. 정 교수는 “피검사자가 질문에 기억을 더듬어 답하고 있는 것인지, 이야기를 창작하고 있는지를 뇌의 어느 영역이 활성화되는지를 통해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만약 목격자라면 사건 당시를 기억할 때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넘기는 해마나 근처의 대뇌 피질이 활성화될 것”이라며 “반면 이야기를 창작하는 뇌의 영역은 전전두엽 근처에 따로 마련돼 있고, 측두엽도 관여한다”고 덧붙였다.

폴리그라프 한계 극복할까
경찰이 첨단 거짓말 탐지기 개발과 뇌파분석 활용범위를 늘리는 건 그동안 법정에서 증거능력을 인정받지 못해 온 폴리그라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다. 학계에 따르면 폴리그라프 검사의 정확성은 90% 이상이다. 그러나 피검사자가 다른 이유로 긴장해도 이상 반응을 보일 수 있고 사이코패스나 훈련받은 피의자는 거짓말을 해도 동요를 느끼지 않는 경우도 있다. 때문에 법원은 증거로써의 가치를 낮게 평가해 왔다.

1986년 이후 대법원은 폴리그라프 검사 결과가 증거 능력을 인정받으려면 ▶거짓말을 하면 반드시 심리 상태의 변동이 일어나고▶이것이 일정한 생리적 반응을 일으키며▶이를 통해 피검사자의 말이 거짓인지 확인할 수 있다는 등의 전제조건이 모두 충족돼야 한다는 요건을 반복 설시해 왔다. 이 조건을 모두 충족하더라도 검사 결과는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하는 정황 증거로만 인정된다는 게 법원의 태도였다.

뇌파 분석, 미래 법정 바꿔놓을까
새로운 거짓말 탐지기가 나와도, 국내 법정에서 실제로 증거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뇌파 분석이 처음 도입된 직후인 2005년 법원은 살인 사건 피의자 구속영장 발부 사유를 설명하면서 뇌파 분석 결과를 제시한 적도 했지만, 현재 법원은 뇌파나 fMRI 등도 증거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실제로 구체적인 범죄 사건에 적용해 보고, 재판이나 다른 증거를 통해 맞는지 확인해보는 데이터가 쌓여야 할 것”이라며 “지금 상황에선 독자적인 증거 능력을 주장하긴 쉽지 않다”고 말했다.

살인죄로 기소돼 종신형이 선고됐던 테리 해링턴이 2000년 뇌파 분석 검사를 받고 있다. 사진 심리학자 래리 파웰 박사 홈페이지
뇌파 분석 등 기술을 사법 영역에 도입하려는 시도가 빨랐던 미국에선 뇌파 분석 결과를 법정 증거로 인정한 사례도 있다. 대표적으로 1978년 살인 혐의로 종신형이 선고됐던 테리 해링턴이 2003년 아이오와 주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아이오와 대법원은 해링턴의 뇌파 분석 결과를 증거로 인정했다. 뇌파 분석 결과 해링턴이 범행 현장 등에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문과는 관계 없는 이미지. 뇌를 촬영한 기능적 자기공명영상 일부. AFP=연합뉴스
다만 fMRI의 증거 능력에 대해선 아직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2012년 의료 법인을 운영하는 로렌 셈라우 박사는 의료 사기 등으로 기소되자 자신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증거로 fMRI 영상을 제출했다. 하지만 미 법원은 “해당 기술은 현실에서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고, 셈라우 박사가 받은 검사는 연구에서 이뤄진 것과는 다르다”며 증거로 인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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