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절대로!" 구로다 돌직구에 쏟아지는 우려[김보겸의 일본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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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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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J, 인플레 우려에도 "금리인상 절대 안해"
애매하게 말하는 중앙은행 총재, 이례적 돌직구 왜
현재 '인플레 2%' 일시적이라 판단한 듯
"구로다 완강함, 지는 싸움 될라" 우려도
[이데일리 김보겸 기자] 일본인의 말하기 특징으로는 ‘혼네(本音·속마음)와 다테마에(建前·겉마음)’가 따로 있다는 점이 꼽힌다. 법보다는 칼이 가까웠던 전국시대를 거치며 속마음을 표현했다가 자칫 화를 입을 수 있으니 마음과는 다른 말을 하는 것이 보편화됐다는 설명이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사진=AFP)


한 마디에 주가와 부동산이 출렁이는 중앙은행 총재들도 모호한 표현을 쓰긴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다테마에가 지배하는 일본의 중앙은행 총재라면 어떨까. 지난 21일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BOJ) 총재는 물가 상승과 엔화 약세에도 “금리 인상은 절대 없다”고 강조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함축적 의도가 많아 ‘일본은행 문학’이라는 표현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래서일까. 일본 언론들도 “이례적으로 강한 표현을 두 번씩이나 사용해 (금리인상 가능성을) 확실히 부정했다”(아사히신문), “금융완화 미세 조정조차 단호히 부인했다”(니혼게이자이신문)며 구로다의 완강한 발언에 집중했다.

구로다, 왜 시장에 돌직구 날리나

일본의 현 상황은 제로금리 고집으로 일관하기에는 만만치 않다. 6월 소비자물가는 3개월째 2%대를 넘고 있는데, 이는 7년만에 최고치다. 6월 기업물가지수도 9.2%로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엔달러 환율은 24년 전 수준인 136엔대로 내려앉았다. 원화 대비로도 100엔에 963원 수준으로 약세다. 상황이 이런데도 “금리인상은 없다”는 구로다의 확인사살에 엔화 약세에 속도가 붙는 모양새다.

“경제 회복과 고용 안정 상황이 나아졌다고 판단되면 금융완화 정책 재검토를 고려하겠다”정도로 모호하게 말하는 것이 중앙은행 총재의 미덕일진대, 구로다는 왜 오히려 시장과 정면으로 맞붙는 것일까.

먼저 일본의 현재 경제 상황이 일본은행이 지난 8년간 그려 온 그림과 맞아떨어진다는 해석이 있다. ‘돈으로 경기를 끌어올리겠다’는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아베노믹스’ 파트너로 낙점된 구로다는 취임 직후인 2013년 4월부터 ‘물가상승률 2%’ 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 그야말로 돈을 찍어냈다. 기업과 가계가 소비를 하면 기업 수익이 늘고, 임금과 물가도 차례로 오르는 선순환을 기대하면서다.

하지만 버블 공포를 겪은 일본인들은 풀린 돈을 쓰기보다는 저축하기 급급했다. 결과는 만성 디플레이션. 이런 상황에서 드디어 2%대 인플레를 달성했으니 일본은행으로서는 반갑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일본은행은 현재 인플레가 일시적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작년 발표한 물가전망에서 2023년에는 에너지 가격 상승의 영향이 줄면서 물가상승률이 1.4%가 될 것이라 봤으며, 2024년은 1.3%로 내려갈 것이라고 관측했다. 이 때문에 구로다는 당분간 금융완화를 계속해야 한다고 강하게 말한 것으로 보인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는 지난 21일(현지시간)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인상하는 빅스텝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사진=AFP)


엔화 가치 하락을 두려워하지 않는 구로다의 모습이 ‘기축통화국으로서의 자신감’ 아니냐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엔화와 마찬가지로 국제통화기금(IMF) 기축통화 기준을 충족하는 유로화를 쓰는 유럽연합(EU)도 인플레 우려에 백기를 들었다. 구로다가 “금리인상은 절대 없다”고 발언한 같은날 유럽중앙은행(ECB)이 기준금리를 시장 예상치보다 두 배 올린 0.5%포인트 인상(빅스텝)에 나서면서다. 다나카 사토시 다이이치생명경제연구소 수석이코노미스트는 “ECB가 빅스텝에 나선 건 달러 강세에 대한 대항 조치와 유로화 약세를 경계하기 위한 측면이 있다”고 분석했다.

ECB가 마이너스 금리를 탈출한 데에는 20년 만에 유로화가 달러의 패리티(등가)를 밑돈 데 대한 우려가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사진=AFP)


구로다 고집, 지는 싸움으로 이어질까

시장에선 오히려 구로다의 돌직구가 ‘지는 싸움’으로 끝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먼저 엔화 약세가 하나의 흐름으로 굳어질 수 있다는 우려다. 쿠마노 히데오 다이이치생명경제연구소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엔화 약세 시그널이 강할수록 추세가 생겨버릴 수 있다”며 이같이 지적했다. 그가 인용한 것이 환율 이론에 정통한 루디거 돈부시 미국 메사추세츠공과대학(MIT) 전 경제학과 교수의 이론인데, 환율에는 자기실현적인 변동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모두가 엔화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실제로도 엔화 가치가 하락한다는 의미다.

안 그래도 외국계 헤지펀드들은 “구로다가 지는 싸움을 하고있다”며 엔화를 내다 팔고 있는데, 이들이 더더욱 투기적 의도를 가지고 공격적으로 엔화 매도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이 쿠마노의 설명이다. 엔화 가치 떨어지면 당장 수출기업들은 좋겠지만 가계나 내수용 기업들에게 치명타로 돌아와 일본 경제가 수렁에 빠질 수 있다.

구로다가 유지하겠다고 밝힌 수익률곡선통제(YCC) 정책 역시 본고장인 미국에서조차 ‘눈물로 막을 내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훼손될뿐더러 막대하게 사들인 부채가 중앙은행의 재무위험을 높인다는 부작용 때문이다. 타카히데 키우치 노무라증권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지금이야말로 미국의 YCC 실패 사례를 바탕으로 YCC를 포기해 금융정책을 정상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구로다의 금융완화책은 일본 경제의 고질병인 디플레를 해소하기 위해 부작용을 알고서도 실시한 측면이 있다. 일본 경제에 유동성을 수혈하는 동안 정부는 재정을 건전화하고 기업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등 체질개선이 동반됐어야 하지만 금융완화에만 의존하면서 지는 싸움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비판을 받게 됐다. 구로다가 금융완화를 시작했을 때와 현재는 상황이 바뀌었다. 디플레에 시달리던 일본도 인플레를 걱정할 단계에 이르렀으며, 아베노믹스에도 마침표를 찍을 때라는 요구가 빗발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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