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엔화 환율 가늠자로 통하는 '100엔=1000원' 기준이 무너진 지도 이미 수개월째다. '글로벌 위기가 발생하면 엔화가치가 오른다'는 외환시장의 오랜 공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올 들어 30% 추락, 주요국 중 최대
달러당 110엔대를 유지하던 엔·달러 환율이 치솟기 시작한 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인 지난 3월부터다. 5월엔 달러당 130엔을 넘어서더니 지난달엔 140엔대까지 치솟았다. 이후에도 엔저 추이에는 제동이 걸리지 않았다. 이달 6일 달러당 145엔을 찍더니 급기야 17일엔 149엔을 넘어섰다. 엔·달러 환율이 달러당 149엔대를 기록한 것은 이른바 '버블 경제' 후반이던 1990년 8월 이후 32년 만에 처음이다.
미국 달러가 독주하는 '킹달러' 시대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일본 엔화는 주요국 통화 중에서도 낙폭이 가장 크다. 올 들어 이달 17일까지 엔화 가치는 29.5% 빠졌다. 이에 비해 같은 기간 유럽연합(EU) 통화인 유로는 15.5%, 영국 파운드는 19% 하락했다. 스위스 프랑의 가치는 9.2% 낮아지는 데 그쳤다.
엔화 환율이 급락하면서 한국 원화와 비교해도 가치가 낮아졌다. 지난 17일 원·엔 환율은 100엔당 960원을 기록했다. 지난 3월 '100엔=1000원' 환율이 깨진 이후 7개월째 900원대를 지속하고 있다. 지난 7월엔 100엔당 940원대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완화정책 고수, 美와 벌어진 금리차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지난 13일(현지시간) 미 워싱턴DC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 회의 후 기자회견에서 "일본은 지금은 금리를 올릴 필요가 없고 적절하지도 않다"며 "미국은 소비·설비투자 등을 중심으로 경기가 회복되고 있지만 일본 경제는 회복 속도가 늦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미국과 유럽의 물가상승률은 각각 8%, 10%에 달하지만 일본은 2% 수준으로 안정적인 만큼 금융완화를 계속하겠다"고 강조했다.
일본 경제가 역성장할 위기에 놓인 것도 일본은행이 완화적인 통화정책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로 꼽힌다. 일본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올 1분기 -0.2%, 2분기 0.9% 등으로 위태로운 상황이다.
엔·달러 환율이 심리적 저항선인 달러당 150엔을 넘어설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일본 당국이 외환시장에 개입할지 여부에도 관심이 쏠린다. 일본 금융당국은 지난달 22일 장중 엔·달러 환율이 달러당 145엔을 넘어서자 달러를 팔고 엔화를 사들였다. 이는 1988년 이후 처음으로 외환시장에 개입한 것이다. 스즈키 슌이치 일본 재무상은 이날 내각회의 후 기자회견에서 "과도한 변동이 있다면 단호히 대처하겠다"며 시장 개입에 나설 수 있음을 시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