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뷰] 세계 휩쓰는 민주주의의 실패, 한국은 안전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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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3.11.28. 오전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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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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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에 압승’ 자신했던 자유민주주의가 지고 있다
“자연재해와 핵전쟁만큼 민주주의 소멸이 두렵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3일 뉴저지주의 본인 소유 골프장에서 지지자들과 만난 후 주먹을 들어보이고 있다. 그는 방첩법 혐의로 연방검찰에 기소돼 이날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의 연방 법원에 출석했다. 트럼프는 이밖에도 뉴욕 지방검찰에 '성추문 입막음'과 관련한 혐의로 기소된 상태다. 기소가 이어지고 있지만 내년 대선 출마를 선언한 트럼프의 지지율은 오히려 올라가고 있다. /AFP 연합뉴스

교민들이 지난 4월 극적인 탈출에 성공하자 내전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나라 수단에 대한 한국의 관심이 식었다. 하지만 먼 나라의 일이라고 접어두기 전에 수단의 실패를 진지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한국이 속한 자유민주주의 진영이 지금 얼마나 ‘지는 게임’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7개 나라와 국경을 마주한 수단은 침략·내전·독재 등 아프리카 저개발국의 고질적 문제에 시달려 왔다. 1990년대엔 테러리스트의 본거지로 악용돼 미국의 미사일 폭격까지 당했다. 그런 수단의 국민과 군부가 2019년 30년 독재자 알바시르를 내쫓고 민주주의의 길을 선택했을 때 자유 진영은 환호했다. ‘민주주의 클럽’에 오랜만에 새 회원이 합류한다는 희소식으로 여긴 것이다.

그로부터 4년, 선거 한 번 못 치러본 수단의 민주주의는 군부의 권력 쟁탈전이 가져온 내전과 함께 고사(枯死)했다. 미 대사관 직원들은 내전 조짐이 보이자 일찌감치 헬기로 탈출했다. 외교 전문가인 월터 미드는 수단 사태를 대하는 민주주의 종주국 미국의 무능을 지적하면서 “지난 15년간 중동·아프리카에서 시도돼온 민주화는 대부분 어그러졌다. 햄스터가 핵 잠수함 건조(建造)에 성공할 확률이 높아 보일 지경”이라고 썼다.

요즘 국제 뉴스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민주주의의 실패’다. 하루가 멀다고 관련 소식이 쏟아진다. 지난 두 달간의 일만 모아 보았다. 2011년 ‘아랍의 봄’을 열었던 튀니지에선 대통령이 철권통치로 돌아서 지난 4월 야당 대표를 체포했다. 2010년 의회민주주의를 채택한 파키스탄에선 실세인 군부가 지난해 총리 사퇴를 주도한 데 이어 지난달 결국 그를 구속했다. 한때 ‘이슬람 민주주의’의 모범이었던 튀르키예에선 ‘셀프 개헌’으로 선거 규칙을 바꾼 에르도안 대통령이 지난달 재선돼 종신 집권의 길을 굳혔다. 어렵게 민주주의를 이뤄낸 우크라이나는 전체주의 대표 러시아에 영토가 짓밟히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인 2019년 6월 4일 ‘천안문 사태 30주년 추모 집회’에 참석해 홍콩 빅토리아 공원을 가득 메운 시민들(왼쪽 사진). 이듬해부터 홍콩 당국이 코로나 방역을 내세우며 천안문 추모 집회를 금지해 올해도 열리지 않았다. 오른쪽 사진은 지난 4일 친중(親中) 단체가 중국 특산물 판매 행사를 연 빅토리아 공원 전경이다. 중국 정부의 ‘천안문 사태 지우기’와 함께 홍콩에서 표현의 자유가 짓밟히고 민주주의의 불이 꺼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게티이미지·로이터 연합뉴스

천안문 사건 30주기였던 지난 4일, 중국 탄압으로 추모 시위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홍콩의 풍경은 홍콩에서 민주주의의 불꽃이 이제 완전히 꺼졌음을 드러냈다. 미국에선 대선 패배에 불복했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최근 검찰에 2건이나 기소되면서 온갖 성추문과 거짓이 드러났다. 그런데 그의 (공화당 내) 지지율이 약 60%로 오히려 더 올라갔다. 민주주의의 수호자라 여겨졌던 미국도 상태가 심상찮단 뜻이다.

파이낸셜타임스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마틴 울프는 최근 나온 책 ‘민주적 자본주의의 위기’에 “민주주의는 지금 선동적 독재에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고 썼다.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에 이민한 (유대인) 부모님은 민주주의가 압승했다는 안도감 속에 1990년대에 눈을 감았다. 하지만 손자들이 언젠가 맞이할 22세기는 어떨까. 나는 자연재해와 핵전쟁만큼, 전체주의가 창궐하는 미래가 두렵다.” 정치 연구소인 ‘민주주의의 다양성’ 집계 결과 민주화가 진행 중인 나라는 2002년 43국에서 지난해 14국으로 크게 줄었다. 반면 전체주의화되고 있는 국가는 13국에서 42국으로 급증했다. 울프의 노파심이 아니라, 자유 진영이 진짜 지고 있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는 태생적으로 위태하다. ‘개인과 사상의 자유’ 같은 추상적 가치보다는 편을 가르고 선동하는 전체주의적 ‘증오의 동력’이 더 매혹적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몰락을 우려했던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는 민주주의가 혹시라도 유지될 수 있다면, 최소한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고 썼다. 정치인들의 충분히 높은 자질과 탄탄한 관료 조직의 구축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안전한가. 내년 총선을 앞두고 지금 거론되는 깜짝 놀랄 인사들의 출마설, 그리고 공무원 조직의 뿌리 깊은 부패와 무능에 관한 뉴스를 보면서 드는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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