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태의 요가로 세상 보기] 79. 영원히 불타는 생명 에너지, 태양 경배 자세(수리야 나마스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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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가지 자세를 연속으로 이어가는 태양 경배 자세는 몸 전체를 일깨우는 전신 운동 효과가 있다. 시연 임은주(요가명: 수리야).


세상이 빛이 나고 세상이 찬연함은/그대의 공덕이요 만물의 아버지 격/그대 품 그리워하질 않는 이가 있을까

골고루 생명주고 만물을 성장시킨/이 은혜 입지 않은 이들이 있을까요/모든 생물 창조자로고 온 누리를 주재하는

그대 없는 이 세상은 어둠과 죽음일 뿐/존재의 의미까지 상실하고 말것이라/만물이 그대 우러러 찬양 숭배하는 이유

여여히 그 자리에 당당하게 홀로 서서/만물에 균등하게 존재 확인 시킨다네/의미의 씨앗까지도 골고루 뿌리면서

땅위에 나무없인 만물 근원 존재할까/하늘세계 태양없인 철학 의미 빛을 잃어/영원히 불타는 생명 간직하고 있기에

졸시 [태양]이다.

태양은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자 인류 생명 에너지의 원천이 된다. 태양은 모든 우주체 중에서 가장 위대한 힘을 지녔다. 지구상의 모든 동식물들이 태양에너지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적막과 어둠을 걷고 천지 사방에 천년의 빛을 가득 채울 수 있는 것이 유일하게 태양 빛이다. 인도인들은 수리야(surya) 즉 태양을, 병을 치료하는 의사이자 희망을 안겨주는 자로도 여긴다. 태양은 만물을 살아 있게 하는 모든 생명 에너지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리그베다의 “내쫓으라 태양이여, 내 마음의 질병을”이라는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태양이 떠올라 불타지 않는다면 우주는 즉시 황폐해져 버릴 것이고 생명은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인도 고전 우파니샤드 중의 우파니샤드라 불리는 바가바드 기타에서는 태양신 수리야를 생명의 원리(진리, dharma)로 본다.

만물을 존재케 하는 생명의 원리가 최초로 태양에 점화되었다는 것이다. 불과 더불어 태양은 밝음, 선(善), 희망 그리고 신들의 상징이었다.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편)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동방의 해 뜨는 나라’로 불려왔고,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는 ‘아침의 나라’라는 뜻이다. 삼면이 바다로 덮여 있는 자연환경으로 바다에서 뜨는 해와 지는 해를 보아온 겨레였기에 빛에 대한 감수성이 유달리 예민한 것이리라. 고구려 무덤 벽화에서 보이는 삼족오(三足烏)는 세 발 까마귀이며, 고구려인들이 숭배하는 가상 동물로 곧 태양신이었다. 고구려인들은 새가 알, 즉 해를 낳는다고 생각했을 정도이다.

수리야(surya)라고 하는 것은 스바(svar, 해·하늘)에서 온 말로 태양의 실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수리야는 모두로부터 우러름을 받으며, 모든 것을 내려다본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선악 행위를 감시한다고 생각한다. 수리야의 출현은 밤의 암흑을 몰아내고 제사 의식이나 그 밖의 다른 활동을 재촉한다.

그는 간혹 나는 새에 비유되기도 하는데, 때에 따라서는 창공의 보석이라 불리며 때로는 인간세계에 광명과 행복을 가져오는 신으로도 칭송되고 있다. 태양의 빛에 의해 사람들에게는 은혜를, 악마에게는 파멸을 주는 자로서도 대중의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수리야 또는 사비트리(savitr)는 인도의 고전인 베다에서 태양에게 붙여진 두 가지 이름이다. 사비트리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태양을 가리키는 반면, 수리야는 눈에 보이는 일상적인 태양을 지칭한다.

태양은 바퀴처럼 보인다. 그러잖아도 수레바퀴를 좋아하는 인도인들이 수리야를 바퀴로 형상화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태양 숭배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공통으로 찾아볼 수 있는 현상으로, 지식 확장의 근원이 된다. 그러므로 태양 에너지 법칙은 자연과 인간사회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고대 신화에는 태양절이 있고 태양에서 나온 빛이 인간의 종지(宗旨)로 선택되었다. 신라시대에는 동지(冬至)를 태양절로 하였고 동로마 제국 역시 동지 사흘 뒤인 12월 25일을 태양절로 하였다. 일본의 일장기도 태양이 그려져 있고 남미 페루 쿠스코 마추픽추 역시 태양신을 모셨던 흔적이 남아 있다.

농경민족에게 태양이야말로 먹고사는 문제의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는 존재였다. 다른 문명권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태양을 신성시했다. 영웅을 태양에 비유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만 보더라도 태양에 대한 인간의 경외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태양과 별을 비롯해 발광생물을 포함한 빛을 내는 존재는 아름답다. 그런데 빛을 내는 근원의 에너지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에너지를 버릴 때 비로소 빛을 낸다는 점이다. 즉 에너지를 흡수한 물체가 들뜬 상태(여기 상태, 勵起 狀態)가 되면 불안정하므로 에너지를 방출하여 안정된 상태가 되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과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아폴로는 제우스의 아들이면서 빛의 신이다. 제우스는 번개라는 빛으로 자신의 바람기를 방패로 삼고 타인에게는 심판과 공격의 도구로 이용한 반면에 아폴로는 이 빛을 모든 어둠을 밝히는 용도로 사용하였기에, 신 중에서도 고귀한 인품을 지녔다는 평을 받는다는 스토리도 전해지고 있다.

인도의 동쪽 끝 벵골만에 위치한 코나락(Konarak)에는 아름답고 화려한 힌두사원이 태양의 빛을 받으며 서 있다. 이 사원은 오리사(Orissa) 주(州)의 가장 유명한 사원인 ‘태양 사원’이다.

이 화려한 태양 사원은 강가(Ganga) 왕조(1238~1264)에 세워졌다고 추정되는데, 태양의 신 수리야를 숭배하기 위한 힌두 사원이다.

힌두 신화에서 태양의 신 수리야는 7마리 말이 이끄는 마차를 타고 하늘을 가로질러 달린다. 인도인들의 거대한 상상력이 마침내 지상에 건축된 것이다.

태양 사원 하단에는 24개의 마차 바퀴가 있는데, 그 지름의 크기는 거의 3m에 이른다. 한쪽 면의 12개 마차 바퀴는 1년의 열두 달을 의미한다.

한편 상단에는 태양의 신 수리야가 동해의 빛을 가득 받으며 말 위에 앉아서 하늘을 날아오를 듯한 기상을 보여준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바가바드 기타를 주 해석한 비노바 바베는 태양이 간직하고 있는 참모습을 ‘욕망 없는 활동’이라고 말한다.

“동녘에 떠오르는 태양이 ‘나는 저 어둠을 살라 버릴 거야, 어두운 지상에 빛을 비춰 새들은 지저귀게 하고, 꽃을 피어나게 하고, 사람들이 즐겁게 일하도록 할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활동하는 것이 아니다. 태양은 그저 하늘에 떠올라 그 빛으로 세상을 비출 뿐이다. 우리는 태양이 활동한다고 말하지만 태양은 그저 존재할 뿐이다. 태양은 말한다. “빛은 나의 본성일 뿐이네. 꽃이나 새를 보게 향기를 내뿜는 것이 꽃의 본성이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이 새의 본성이듯이 세상에 빛을 비추는 게 나의 본성일세. 나는 내가 빛을 발한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네. 나에겐 내 존재 자체가 빛일 뿐이네”라고.(고진하)

그러나 제 본성에서 멀어진 인간은 그렇지 못하게 된다. 참자아를 망각한 인간은 자기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보시나 적선, 봉사 등 착한 일을 행할 때도 행위 뒤에 오는 결과를 생각하게 되고, 사랑할 때도 손익을 따지게 된다. 행위 그 자체의 순수성을 잃어버린 상태가 되는 것이다. 순수성을 잃어버린 사랑은 소유욕에 불과하며, 순수성을 상실한 자선도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려는 과시욕에 불과할 뿐이다.

크리슈나는 이처럼 행위의 순수성을 상실한 오늘날의 아르쥬나들에게 충고한다. “행위의 결과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말라. 언제나 만족해하며 철저하게 독립적이 돼라. 그러면 비록 이 행위의 한 가운데 있다고 해도 그대는 행위하지 않는 사람이다.”(바가바드 기타)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은 행위 그 자체가 되라는 것이다. 행위 그 자체가 되어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노자의 가르침처럼 ‘공수신퇴(功遂身退)’ 즉 공을 이루되 그 공에 머물지 말아야 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자기의 사사로운 욕심을 온전히 비우라는 말이다.

인도의 한 성인 이야기도 흥미롭다. 어느 날 그는 “저를 통해서 좋은 일이 이루어지되, 제 자신이 알아차리는 일이 없게 해주십시오”라며 신께 소원을 빌자 신은 그 소원을 들어준다. 그때부터 그 성인이 걸어갈 때마다 그의 뒤에 생기는 그림자가 닿은 땅은 치유의 땅이 되었다. 그래서 병자들이 치유를 받고, 땅이 기름지게 되고, 샘들이 다시 솟고, 삶의 고달픔에 시달린 사람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게 되었다. 그러나 성인은 그것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왜냐면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그의 그림자에만 집중되어 있어서 그 성인을 잊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기는 잊힌 채 자기를 통해서 좋은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성인의 소원은 충분히 성취된 것이다.(앤소니 드 멜로)

모름지기 이 성인 속에는 ‘나’라는 것이 없다. 태양이 세상을 비추면서 비춘다는 자의식이 없듯이 성인의 행위는 오직 무심(無心) 그 자체다. 자비의 씨앗을 뿌려도 그것을 뿌렸다는 의식이 성인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바로 카르마 요가(Karma Yoga)의 본질인 것이다.

태양도 마찬가지다. 만물에 빛을 나누어줄 때 차별이 없다. 태양은 무심하게 만물에 골고루 빛을 나누어 줄 뿐이다. 모름지기 태양과 만물 사이에는 사이가 없다. 그러기에 태양은 늙는 법이 없으며 그래서 태양은 오늘도 젊다.

아울러 ‘태양 경배 자세’를 하면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반대에 있는 어둠이다. 어둠이 있기에 밝음도 있는 것이다. 어둠은 삶의 깊은 휴식이고, 있음(유, 有)을 잊게 하는 무(無)의 세계이다. 빛이 사라지면 어둠이 자리 잡는다.

바가바드 기타(8~26)에서는 “빛과 어둠은 이 세상의 두 가지 영원한 원리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밝은 조건은 교감신경계의 흥분을 촉진하고, 어둠은 부교감신경의 흥분을 촉진한다. 따라서 낮 동안의 산성으로 변한 혈액은 아침에 알칼리성 혈액으로 바뀐다.

“밝은 조건은 작용의 긴장이고, 어두운 조건은 휴식의 안정이며, 밝은 조건은 차별을 아는 길이고, 어두운 조건은 휴식의 안정이며, 어두운 조건과 눈감은 명상은 차별성을 그치고 공통성을 깨치는 길이다. 밝음은 수직 활동을 촉진시키고, 어두움은 수평 활동의 수면을 촉진시킨다. 이렇게 상대 성질을 이루어 한쪽에 치우친 문제를 반대 성질이 치유하는 조화가 생명의 영원한 법칙이다.”(김광백)

“현대는 밝은 조건에 치우친 문제로 가득 차 있다. 일찍 불을 끄고 잠드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다. 침실에 방범등이나 가로수 등의 불빛이 들지 못하게 하여 칠흑 같은 어두움을 먹어야 한다. 그것이 곧 대약(大藥)이기 때문이다. 빛으로 지친 것은 어두움으로 치유시키고, 어두움으로 지친 것은 빛으로 치유시켜야 한다. 나무들은 밤에 불빛을 받으면 잎만 무성하고 열매 맺기가 어려워지며 생명력이 약화된다.”(김광백)

이상의 것들이 또한 요가의 ‘상응(相應)의 원리’와도 일맥상통한다.

아울러 저 밝고 환한 승리와 성공의 환호성 뒤안길에 있는, 어둠의 무거운 존재와 실패로 인한 좌절감에 빠져 있는, 낙망의 깊은 시름 소리 내는 자들에게도 귀를 열고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용기를 북돋우는 격려의 목소리도 들려주어야 한다. 엎어진 자에게, 힘들어하는 자에게 손도 내밀어 주고, 슬픔과 고통받는 자의 눈물도 닦아주고,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수행자가 되기를 태양 경배 자세가 일깨워 주고 있는 듯하다.

12가지 자세를 연속적으로 이어가는 태양 경배 자세는 몸 전체를 일깨우는 전신 운동 효과가 있다.

수리야(surya)는 태양, 양(陽)의 기운을 뜻하고, 나마스카(namaska)는 인사, 맞이하다, 경배를 의미한다. 이 자세는 새벽에 태양이 떠오르는 새로운 기운을 경건하게 받는 의식으로서 전통적인 빈야사(vinyasa) 요가 형식이다. 신체의 음양을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는 하타 요가에서 본 행법에 앞서 준비 행법으로 활용하는 추세이다.

“옴 브 브바흐 스와하, 탓 사비투르 바렌얌 바르고 데바스야 디마히, 디요 요 나흐 프라조다야트.”(Om Bhu Bhaha Swaha Tat Savitur Varenyam, Bhargo Devasya Dimahi, Dhiyo Yo Nah Prajodayat). 가야트리(Gayatri) 만트라 전문이다.

요가생리학에서는 인체에 나디(nadi)라는 에너지 통로가 있다고 보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이다(ida), 핑갈라(pingala), 수슘나(sushumna) 나디이다.

수슘나가 척추를 따라 중앙을 관통하고 있다면, 이다와 핑갈라는 그를 중심으로 각각 왼쪽 오른쪽에 위치한다. 그리고 여기서 이다와 핑갈라는 각각 달과 태양을 상징하고 음기와 양기를 대표하며, 자율신경계의 양 날개로서 길항작용을 통해 우리 몸의 항상성(恒常性, homeostasis)을 유지하는 교감신경, 부교감 신경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동양의학에서 양기는 상승하고, 확산되는 기운을 의미하듯, 요가 생리학에서는 태양은 몸에 활력을 주고, 생동감을 북돋워 주는 에너지를 대표한다. 이때 간뇌 천장에 위치한 내분비선인 송과선이 호르몬을 자극하여 분비시키게 한다는 것이 바로 태양 빛이다. 그래서 아침이면 우리 몸의 생체리듬이 깨어나 활동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라고 ‘자야’ 등 요가 고수 등은 설파하고 있다.

이 아사나는 서로 짝을 이루는 자세의 연결로 근육에 긴장과 이완을 자연스럽게 하고, 탄력성을 높인다. 전후좌우 상하를 고르게 운동시켜 심신의 안정감과 균형감을 키워준다.

자세의 뒤틀림, 척추 측만, 굽은 등을 펴게 하여 바른 자세를 갖게 하고 머리가 맑아진다.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면역력을 높여준다. 임산부는 자제하며, 다만 골반 교정 등 산후조리 차원에서는 유익하게 활용할 수 있다.

태양 경배 자세와 더불어 달 경배 자세(찬드라 나마스카)도 있다. 태양 경배 자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파니샤드에서는 이렇게 표현한다. “사람 안의 아트만(atman)과 태양 안의 아트만(atman)은 하나이다.”(타이트리아 우파니샤드)

“사람 안의 참모습과 태양 안의 참모습이 다르지 않다. 그 참모습을 아트만이라 부른다. 문제는 지금도 태양은 그 참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데, 사람은 자기 내부에 있는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탐욕과 무지의 비늘이 눈을 덮고 있어, 제 속에 감춰진 자기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석학들은 한탄하고 있다.

얼마 전 필자를 이 세상에 존재케 해주신 한 분을 떠나보내 드리고 돌아오면서, “울면서 온 세상, 갈 때는 웃으면서 가볍게 떠나고 싶다”는 소망 하나 가슴에 품어 보았다. 어떤 것으로 쳐도 깨어지지 않고, 어떤 것으로 불태워도 결코 불태워지지 않는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그 무엇 하나, 영원히 불타는 태양 닮은 생명 에너지 하나 간직하고 싶다는 소망, 그게 과연 어떤 것이고 어떤 모습일까? 그러려면 지금부터라도 어떤 자세로 남은 인생을 준비할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이 가을이 한결 깊어진 듯하다.

바가바드 기타에 나오는 사랑의 신 크리슈나가 자신의 참모습(아트만)을 간직한 태양을 스승으로 삼아서, 그 숭고한 불멸의 가르침에 힘입어 우리의 잃어버린 참모습과 절대성 자리의 본성(本性)을 되찾아야 한다고 눈짓하고 있는 듯하다.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뜨는 해와 지는 해가 말해주고 있다. “하루를 떠오르는 해처럼 시작하고, 지는 해처럼 장식하라”고.



[수리야 나마스카라/ 최진태]

사람과 태양 안의 참 모습이 동일하지/태양은 그 참 모습 고스란히 간직했다만/인간만이 자기 참모습 못본다니 이를 어째

자신의 참 모습을 간직한 태양 스승/숭고한 가르침에 잃어버린 참 모습과/그대의 절대성 자리 본성일랑 되찾기를

하늘에 높이 떠서 그 빛으로 세상 비춤/보아라 저 태양의 욕망없는 제반 활동/아니지 활동이 아닌 공수신퇴(功遂身退) 바로 그것

빛 발하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지/그대에겐 그대 존재 그 자체가 빛이로군/완벽한 까르마 요기 고수님을 경배하오

열두 자세 이어 간다 물흐르듯 춤을 추듯/몸 전체를 일깨우는 전신 운동 효과 만점/상(相)안내고 베풀어 주는 그대 무심(無心) 찬탄하오



최진태 부산요가지도자교육센터(부산요가명상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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