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을 사육 동물로 전시하라’…이토 히로부미의 ‘창경원’ 프로젝트[이기환의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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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3.05.29. 오후 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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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가 ‘창경궁 명칭 환원 40주년’을 맞아 올 연말까지 다채로운 행사를 벌인다고 발표했습니다.

아마도 50대 이상의 세대에게는 이 소식이 색다른 감회로 다가왔을 겁니다. 저만 해도 20대 초반까지는 ‘창경원’이었구요.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들고 소풍 가서 사자며, 호랑이며, 하마며, 기린같은 여러 진귀한 동물을 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가 동·식물을 서울대공원에 옮긴 뒤인 1983년 12월 비로소 ‘창경궁’의 명칭을 되찾게 되었죠.

원래는 ‘궁’이었는데, 일제강점 초창기(1911년) ‘동식물을 키우는 동산’인 ‘원(苑)’으로 명칭이 바뀌었죠.

그러나 해방 이후 40년 가까이 ‘창경원’ 이름을 답습했던 것도 퍽이나 기막힌 일입니다.

‘명묘조서총대시예도’. 명종 연간(1555년 이전) 문무대신들이 창경궁 서총대에서 치른 활쏘기 및 시문 시험에서 모두 1등을 차지한 남응운(1509~1587)에게 상급으로 말을 하사하는 내용을 그린 기록화이다. 서총대는 연산군이 ‘작은 아방궁’처럼 화려하게 꾸미려한 시설물이었지만 완성하지 못하고 중종반정(1506년 9월2일) 이후 철거됐다. 그러나 완전 철거되지 않고 왕실의 각종 행사 때 활용됐다.|국립문화재연구원 제공
■창경궁에 웬 ‘작은 아방궁?’

창경궁은 1418년 세종(재위 1418~1450)이 상왕인 태종(1400~1418)을 위해 조성한 궁궐(수강궁)이었습니다.

그러다 성종(1469~1494) 때 대비전의 세 어른을 모시려고 제대로 수리해서 ‘창경궁’이라 했는데요.

대비전 세 어른은 할머니인 정희왕후 윤씨(세조비·1418~1483)와 친어머니인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추존왕 덕종비·1437~1504), 양어머니인 안순왕후 한씨(예종비·1445~1499)였습니다.

이렇게 성종의 효심이 깃든 창경궁은 연산군 시대에 들어 ‘작은 아방궁’으로 전락하는데요.

창경궁 전경. 성종연간인 1480년대에 대비전 세 어른인 할머니 정희왕후 윤씨(세조비·1418~1483)와 친어머니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추존왕 덕종비·1437~1504), 양어머니 안순왕후 한씨(예종비·1445~1499)를 위해 조성한 궁궐이었다.|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1506년(연산군 12) 1월21일자 <연산군일기>에 심상치않은 기사가 보입니다.

“창경궁에 돌로 대(臺)를 만들고 용을 새긴 난간을 만들었다. 1000명은 앉을 만하고 높이가 10길이나 되었다. 이름을 서총대(瑞총臺)’라 했다. 그 앞에 큰 못을 팠는데…밤낮으로 인부 수만 명이 ‘호야(呼耶)!’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서총대’ 이름 유래가 재미있습니다.

“성종 때 창경궁에 한 줄기에 9가지나 되는 ‘파(총·총)’가 나왔다. 나머지 그 자리에 돌을 쌓아 파를 재배했다. 그런데 그곳에 연산군이 음란한 놀이장소를 만들고 ‘서총대’란 이름을 붙였다.”(<소문쇄록>)

창경궁은 연산군대에 들어 ‘작은 아방궁’으로 전락한다. 연산군은 1000명 정도가 앉을 수 있고 높이가 10길이나 유흥공간(서총대) 조성 공사에 들어갔다. 무리한 공사는 민심의 이탈을 불렀다. 공사 감독관들의 가혹한 ‘갑질’ 때문에 인부들이 징벌에 따른 벌금을 무느라 갖고 있던 돈을 탕진했다. 결국 입고 있던 옷의 솜을 빼내어 만든 면포를 무는 일도 있었다.|동아대박물관·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서총대포’를 아십니까

무리한 토목공사에 따른 후유증이 극심했습니다. 공사 강행을 위해 아직 출사하지 못한 진사·생원 중 100명을 뽑아 이른바 가부장(임시부장)직을 맡겨 인부들을 감독하게 했습니다.(<연산군일기> 1505년 12월30일)

그러나 ‘완장을 찬’ 가부장들이 인부들에게 얼마나 ‘갑질’을 해댔는지 원성이 자자했답니다.

“가부장들이 툭하면 곤장을 때리고 벌금을 물렸다. 가진 돈을 다 날린 인부들이 입었던 바지의 헌솜까지 빼내서 면포를 만들어 변상했다. 그렇게 만든 무명 빛깔은 질이 좋지 않았다. 지금도 품질 나쁜 베를 ‘서총대포’라 한다.”(<연산군일기>)

‘서총대 친림 사연도’. 1560년(명종 15) 9월 창경궁 서총대에 왕이 행차하여 재상들이 참여한 가운데 베푼 작은 연회 장면을 그린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렇지만 연산군은 ‘작은 아방궁’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전국에서 차출된 인부들이 제때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연산군은 결국 공사를 마무리 짓지도 못한채 중종반정(9월2일) 발발로 폐위됐습니다.

서총대 조성공사는 중종연산군 폐위와 함께 중단되었는데요.(1507년 윤1월5일) 그러나 완전히 철거되지는 않았습니다.

명종(1560년 9월)과 정조(1795년 3월) 등이 이곳에서 연회를 벌이고, 활쏘기 대회를 열었다는 기사가 보입니다.

창경궁은 임금(중종·환경전)과 왕비(명종비 인순왕후·통명전)가 승하하거나 즉위(인종·명정전)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1907년 11월4일 매국내각의 총리대신 이완용과 ·궁내부대신 이윤용 형제가 궁내부 차관이던 일본인 고미야 미호마쓰에게 “순종의 소일거리를 찾아주면 어떠냐”고 부탁한다. 고미야는 이틀 뒤 “그렇다면 창경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 박물관을 조성하면 어떠냐”고 제안한다.
■매국노 형제와 일본인 차관의 은밀한 대화

세월이 흘러 국운이 급격히 쇠하던 1907년 11월4일이었습니다.

당시 매국내각의 총리대신 이완용(1858~1926)·궁내부대신 이윤용(1854~1939) 형제가 궁내부 차관 겸 제실재산정리국장이던 일본인 고미야 미호마쓰(小宮三保松·1859~1935)와 수상한 대화를 나눕니다.

“혼자 떨어진 황제(순종)에게 소일거리가 없을까요.”(이완용·이윤용 형제)

“그래요? 그렇다면 창경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 박물관을 조성하면 어떻습니까”(고미야쓰)

이상하죠. 왜 일본인이 대한제국 황실의 재산관리를 담당하는 궁내부 차관을 맡게 된 걸까요.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조성하겠다는 계획은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의 작품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토는 궁내부 대신(장관)인 민병석과 차관인 고미야에게 ‘박물관과 동식물원의 설립’ 등을 명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뼈아픈 사연이 담겨있죠. 1907년 일제는 고종의 헤이그 밀사사건을 트집잡아 ‘정미 7조약’을 체결합니다.

조약의 핵심은 조선통감이 대한제국의 입법·사법·행정 전반에 걸쳐 통치권을 발휘한다는 것이었죠. 이에따라 초대통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가 대한제국의 각부 차관을 일본인으로 임명했습니다.

이때 이토의 측근인 고미야가 대한제국 황실 재산의 관리를 겸한 궁내부차관이 된 겁니다.

법률가 출신으로 대심원 검사였던 고미야는 이토 히로부미의 신임을 한몸에 받았던 인물입니다. 고미야의 장인이 이토와 같은 조슈번(長州藩·야마구치 지역을 통치한 영지) 출신이었다네요.

이토 히로부미의 주도로 추진된 창경궁 박물관 및 동식물원조성계획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1908년부터 동물원과 식물원이 차례로 조성됐고, 창경궁 각 전각을 진열실로 꾸며 박물관 조성도 이어진다.
■‘순종의 소일거리를 만든다?’

매국노 이완용·이윤용 형제와 고미야 간 ‘수상한 대화’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이미 1905년부터 통감정치를 밀어붙인 일제는 이듬해(1906년) 6월 황제권을 축소시키는 조치를 취합니다.

급기야 ‘궁금령(宮禁令)’까지 내렸습니다.(1907년 7월) ‘궁궐이 무질서하다’는 이유로 궁궐출입을 제한하는 법령을 만든겁니다. 궁중에 출입하려면 일본 경무고문부의 허가증을 얻어야 했습니다. 궁궐 내 인원을 1만명이나 삭감했답니다.

여기에 일제는 헤이그 밀사사건 이후 강제 퇴위된 고종을 덕수궁에 머물게 하죠. 새로 즉위한 순종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도록 합니다. 고종과 순종은 연금된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순종의 새로운 거처로 낙점된 창덕궁은 수리공사에 들어가고요. 당시 공사 총책임자가 궁내부 차관인 고미야였습니다.

이때 이완용·이윤용 형제가 순종의 소일거리를 마련해주자고 제안한 거구요. 그 말을 들은 고미야가 이틀만인 6일 ‘창경궁 동식물원 및 박물관 설립계획’으로 맞장구 친 겁니다. 1912년 발간된 <이왕가박물관 소장품 사진첩>에 쓴 고미야의 서문에 나와있습니다.

설립된 박물관에 진열될 유물수집은 큰 문제를 일으켰다. 일본인들이 한반도 전역에서 파헤친 도굴품들을 창경궁 박물관이 구입한 것이었다.
■“창경원은 이토 히로부미의 작품”

그런데 이 무렵 궁내부에 근무했던 일본인 곤도 시로스케(權藤四郞介)는 더 구체적인 증언을 합니다.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가 궁내부 대신(장관)인 민병석(1858~1940)과 차관인 고미야에게 ‘박물관과 동식물원의 설립’ 등을 명했다는 겁니다.(곤도의 <이왕궁 비사>, 1926)

그런 거창한 계획은 고미야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을 겁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주도한 계획을 이완용 형제가 제안하는 형식을 취했을 가능성이 짙습니다. 아니면 원래 계획하고 있던 와중에 이완용 형제가 ‘황제의 소일거리’ 운운하니까 ‘옳다구나’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창경궁 내 박물관 및 동식물원 설립 계획은 일사천리로 추진됩니다.

1908년 봄부터 경성에서 사립동물원을 경영하고 있던 유한성이라는 인물을 스카웃했구요. 유한성이 보유중이던 곰·원숭이·낙타·사슴·공작·타조 등을 구입하여 동물원을 만들었구요. 그리고 일본인이 주동이 되어 식물원도 조성했습니다.

당시 5~20원에 거래되던 고려청자는 창경궁 박물관이 시장에 나서자 천정부지로 솟았다. ‘청자 포도 동자무늬 표주박모양 주전자 및 받침대는 950억원(10억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구입했다. 또 국보 반가사유상(옛 83호)은 2600원이라는 천문학적인 거액을 주고 사들였다. 왕립박물관이 출처가 불분명한 도굴품을 세탁해준 셈이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박물관도 모습을 갖춰갔습니다. 창경궁 내의 경춘전·통명전·명정전·양화당 등의 각 전각을 수리해서 진열관으로 사용했습니다. 진열품 수집도 시작되었는데요. 이게 큰 문제였습니다. 19세기 말부터 한반도 전역에 도굴꾼이 득세하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개성과 강화도 등 고려 왕·귀족의 무덤을 일본인들이 마구 파헤쳐 고려자기를 수중에 넣었는데요.

바로 이러한 도굴품들을 막 문을 연 창경궁 박물관이 사들인 겁니다.

예컨대 당시 고려자기 값은 대략 5~20원 사이였는데요. 그런데 박물관측은 ‘청자 포도 동자무늬 표주박모양 병’의 경우 곤도 사고로(近藤佐五郞)라는 골동품업자에게서 950원이라는 고가에 구입했어요. 지금 돈으로 10억원 가량 된다고 합니다.

불상 같은 유물도 옛 절터에서 무단반출한 경우가 태반이었습니다. 그중에 1912년 가지야마 요시히데(楣山義英)에게서 당시 돈 2600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사들인 국보 반가사유상(옛 83호)이 있습니다. 왕립박물관이 출처가 불분명한 도굴품을 세탁해준 셈입니다.

‘창경궁’ 명칭이 공식적으로 ‘원’이 된 것은 1911년 4월26일이다. <순종실록>은 “박물관과 동식물원이 창경궁내에 있기 때문”이라 했다..
■도굴품 세탁소가 된 박물관

그렇게해서 궁궐이었던 ‘창경궁’은 박물관 및 동식물원이 조성된 ‘창경원’으로 격하되었는데요.

‘궁’ 명칭이 공식적으로 ‘원’이 된 것은 1911년 4월26일인데요.(<순종실록> 부록)

순종은 “진기한 동식물과 문화유물들을 백성과 함께 즐기고 싶다”면서 ‘창경원’의 대중관람을 지시했습니다.

액면 그대로라면 외로운 황제(순종)의 소일거리 좀 만들어달라고 징징 짠 것이 이완용 형제이고, 일제가 시혜를 베풀듯 만들어준 위락시설이 ‘창경원’이었다는 거죠. 그것을 순종이 ‘백성들과 함께 즐기고 싶다’고 공중관람을 허락한거구요.

그러나 ‘창경원’ 조성 이후 일제강점기의 경성 안내서에는 순종 이야기는 쏙 빠져있습니다. “경성 박물관 및 동·식물원은 최초에 이토 히로부미가 왕가의 오락을 겸하고 공중의 관람에 이바지 할 목적으로 계획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일제의 의도는 간단치 않았죠. 대한제국과 황실의 위상이 추락되고 왕제가 더 이상 존경과 위엄이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창경궁에 동식물원과 박물관을 조성·개방한 겁니다.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경성안내>는 “경성 박물관 및 동·식물원은 이토 히로부미가 왕가의 오락을 겸하고 공중의 관람에 이바지할 목적으로 계획했다”고 설명했다..
■순종을 투명그릇에 가둬 전시했다?

‘원(苑)’자의 본뜻이 ‘울타리를 쳐서 짐승과 나무를 키우는 곳’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창경원 조성을 기획한 고미야가 평소 소름끼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조선병합에 대해 외국에서 일본이 이왕가를 후히 대우하고 있음을 모르는 자가 많다. 왕가의 실정을 알려야 한다. 창덕궁(창경궁 포함)은 ‘투명한 유리그릇에 넣은 물체’처럼 명백하게 누구에게라도 보이는 것이 좋다.”(<이왕궁 비사>)

고미야 등은 “일본이 이왕가를 얼마나 후히 대우하고 그들이 얼마나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누리는지 외국인들의 오해를 푸는데 커다른 효과가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아니 순종을 ‘투명한 유리그릇에 넣은 물체’처럼 전시한다는 게 무슨 이야깁니까.

‘순종을 창경원 사육장(유리그릇)에 넣은 동물(물체)’로 취급했다는 것이 아닌가요. .

그렇지 않아도 반대의 목소리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유서깊은 궁전 건물을 박물관으로 조성해서 불상과 고기물, 시체를 넣었던 관곽마저 진열하고 일반인들이 흙묻은 발(土足)로 출입케하는 일이 말이 되냐”는 여론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제는 그와 같은 여론을 일축했습니다.

창경원 조성 건설을 책임진 고미야 미호마쓰는 “조선병합 이후 외국에서 일본이 이왕가를 후히 대우하고 있음을 알게하는 게 중요하다. 실정을 알려야 한다”면서 “따라서 창덕궁(창경궁 포함)은 ‘투명한 유리그릇에 넣은 물체’처럼 명백하게 보이는 것이 좋다.”고 강조했다.


■밤벚꽃놀이, 일탈의 장소로 전락한 ‘창경원’

그렇게 개방된 창경원은 갈수록 태산이 되었습니다.

일본 본토에서 산업 시찰단과 수학여행단이 몰려들었구요. 일제의 의도대로 외국인들의 관람도 이어졌습니다.

1918년 무렵부터는 그 유명한 벚꽃놀이가 ‘창경원’에서 시작됩니다. 서울에 머물던 일본인이 1908~9년 사이 창경궁 등에 심은 벚꽃나무가 화려한 꽃을 피운 겁니다.(1939년 4월 16일 매일신보)

창경궁은 그때부터 해마다 4월이 되면 ‘놀이동산’으로 전락하게 되죠. 급기야 1924년 봄부터는 ‘창경원 밤벚꽃놀이’(야앵·夜櫻)가 시작되구요.

이제는 순종을 ‘창경원의 사육장(유리그릇)에 넣은 동물(물체)’로 취급했다. 고미야 미호마쓰의 글에 적나라하게 나와있다.
“창경원 동물원의 울타리를 이룬 벚꽃가지에…꽃봉오리가 맺기 시작…해마다 꽃이 필 때마다 밤에도 열어달라는 여론이 많았다…금년 봄 벚꽃이 만발하는 2~3주일간 야간개장하고 수천개의 전등을 장식할 계획….”(동아일보 1924년 3월11일)

“모두 마음이 들떠서 야앵! 야앵! 말하느니 야앵이요, 가느니 야앵이라. 분을 한껏 바르고 향수를 뿌린 모던 걸에게 장난을 걸 때 양복 친구들의 시선은 으슥한 곳으로 혹은 젊은 여자들의 다리로 꽂혔다.”(<별건곤> 1930년 5월·1933년 4월)

창경원은 일탈의 장소로 전락하고 만 겁니다. 그나마 순종의 생전에는 매주 목요일에는 휴장되었습니다.

순종의 산책 겸 관람일이라는 이유였죠. 그러나 순종이 서거한(1926년 4월 26일) 이후인 1927년 7월1일부터는 창경원 전체가 연중무휴로 개방되었습니다. 창경원은 그 때부터 서울 시민의 유일한 위락지이자 유흥지가 된 겁니다.

창경원 설립을 두고 반대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유서깊은 궁전 건물을 박물관으로 조성해서 불상과 고기물, 시체를 넣었던 관곽마저 진열하고 일반인들이 흙묻은 발(土足)로 출입케하는 일이 말이 되냐”는 여론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그와 같은 여론을 일축했다.
■창경원과 청와대?

어떻습니까. ‘창경궁’ 명칭 회복 40주년 기념행사를 계기로 ‘창경궁(원)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살펴보았는데요.

지난해인가요. 일반에 개방된 청와대에서 패션잡지의 화보촬영 소식이 전해지자 ‘창경원’이 소환되었죠.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전락시킨 일제 강점기가 연상된다는 비판이 일었습니다.

저는 이러쿵저러쿵 평가를 내리지는 않겠습니다. 본래 역사는 받아들이는 자의 몫이니까, 주어진 팩트를 토대로 독자 여러분이 나름의 평가를 내리면 됩니다. 정치적으로 부침을 거듭해온 청와대가 나중에 어떻게 변모할지도 잘 모릅니다.

다만 살펴보았듯이 창경궁에 600년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담겨있죠.

창경원의 벚꽃놀이는 1918년 무렵부터 시작된다. 서울에 머물던 일본인들이 1908~9년 사이 창경궁 등에 심은 벚꽃나무가 10년 정도가 지나 화려한 꽃을 피운 것이다. 해마다 4월이 되면 창경원은 ‘놀이동산’으로 전락했다. 급기야 1924년 봄부터는 ‘창경원 밤벚꽃놀이’(야앵·夜櫻)가 시작된다.
지금의 청와대에는 그보다 더 오래된 1000년의 역사가 깃들어있다는 점을 절대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1101~1104년 사이에 조성된 고려 남경터가 자리잡고 있었고, 조선시대 내내 공신과 그 후손들이 국왕을 위해 충성을 맹세한 ‘회맹단’이 존재했으며, 경복궁 중건(1865~68)과 함께 궁궐의 후원이었고, 그 후에는 조선총독의 관저로 기능했죠.

해방 이후 역대 대통령들의 공간으로 존재한 것은 1000년 중 80년도 안된 짧은 기간에 지나지 않죠.

어떤 경우든 청와대의 공간과 관련된 역사성을 제대로 연구·공부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고고학과 역사를 공부하는 연구자들도 선뜻 나서는 이들이 별로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제2의 창경원 소리를 들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이것이 창경원, 창경궁 이야기 하면서 불쑥 청와대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입니다. 물론 창경궁의 완벽한 복원 정비도 부탁드립니다.(이 기사를 위해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와 한국문화재재단이 자료를 보내주었습니다.)

<참고자료>

김찬송, ‘창경궁박물관 설립과 변천과정의 연구’, <고궁문화> 11호, 국립고궁박물관, 2018

박소현, ‘제국의 취미-이왕가박물관과 일본의 박물관 정책에 대해’, <미술사논단> 18호, 한국미술연구소, 2004

목수현, ‘일제하 이왕박물관의 식민지적 성격’, <미술사학연구> 227, 한국미술사학회, 2000

송기형, ‘창경궁박물관’ 또는 ‘이왕가박물관’의 연대기‘, <역사교육> 72, 역사교육연구회, 1999

국립문화재연구원, <조선왕조 행사기록화>, 2011

이왕가박물관 편, <이왕가박물관소장품사진첩>, 경성, 1912·1918

하라다 도요지로(原田豊次郞), <이등(이토 히로부미)공과 한국>, 조선신문사, 1919

곤도 시로스케(權藤四郞介), <이왕궁 비사>, 조선신문사, 1926

경성협찬회 편, <경성안내>,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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