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현충일을 도둑맞을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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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04.01. 오후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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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대가 치르고 지켜낸 한국
영웅과 악당은 구별해야 한다
군인의 희생마저 부정한다면
누가 국민의 방패가 되겠나



최원일(오른쪽) 전 천안함 함장이 6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현충일 추념식 후 더불어민주당 이재명(왼쪽) 대표에게 항의하고 있다. 전날 민주당 권칠승 수석대변인은 최 전 함장을 두고 “부하들 다 죽이고 무슨 낯짝으로…”라고 말해 논란을 빚었다. /연합뉴스

2015년 2월 대전 복수초등학교 조시은양의 졸업식에는 ‘삼촌’이 많았다. 시은이는 2002년 6월 29일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한 고(故) 조천형 상사의 딸. ‘아빠 없는 졸업식’에 마음이 쓰여 대전까지 달려간 사람은 참수리 357호정 승조원 대표인 이희완 당시 소령만이 아니었다. ‘연평해전’을 만든 김학순 감독, 그 영화에서 조천형을 연기한 배우 김지훈도 참석했다. “전사자 유자녀는 시은이뿐이라 행사가 있을 때마다 얘기가 나옵니다. 아빠가 안 계시지만 아주 잘 자랐어요.”(김학순 감독)

서해 NLL을 지킨 군인은 이웃의 아들이나 남편, 아버지였다. 조천형 상사가 함포 방아쇠를 잡은 채 숨을 거뒀을 때 시은이는 백일이 갓 지난 아기였다. 아빠를 사진으로만 보며 자란 딸은 중학생 때 엄마에게 “아빠의 뒤를 이어 해군이 되겠다”고 했다. 그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조시은(21)씨는 부경대 해군 학군단에 들어갔고 교육을 마치면 소위로 임관한다. 아버지처럼 조국의 바다에서 방패가 되는 것이다.

천안함 폭침 전사자 고 김태석 원사의 딸 김해나(21)씨, 천안함 폭침 실종자 탐색 구조 작전 전사자 고 한주호 준위의 딸 한태경(33)씨도 해군의 길을 걷고 있다. ‘삼촌’들이 들려준 아버지 이야기, 600만명이 본 영화 ‘연평해전’, 영웅에 대한 예우가 삶의 항로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우리는 좋은 기억뿐 아니라 상처도 소중하게 여긴다. 커다란 대가를 치르고 지켜낸 진실은 더 귀하다. 그것을 훔치려 한다면 싸울 수밖에 없다.

지난 6일 서울현충원에서 추념 리본을 가슴에 단 최원일 전 천안함장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찾아가 항의했다. 최 전 함장은 민주당에서 불거진 “천안함은 자폭”(이래경 전 혁신위원장) “부하들 다 죽이고 무슨 낯짝으로”(권칠승 수석대변인) 등 막말에 대해 그것이 대표와 당의 입장인지 물었다. 이 대표는 답하지 않았다. 2020년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서도 문재인 당시 대통령은 천안함 전사자 유족에게 “폭침이 누구 소행인지 말씀 좀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영웅과 악당을 구별하자는 탄식과도 같다. 지나간 사건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하는 ‘이야기 전쟁’은 그만큼 살벌하고 지저분하게 펼쳐지고 있다. 2010년 다국적 전문가들은 모의실험과 폭발 유형 분석 등 과학적 조사로 천안함이 북한제 어뢰 공격에 의해 폭침됐다고 결론지었다. 법원도 음모론은 사실이 아니라고 판단했지만 전사자와 생존 장병을 모독하는 일이 되풀이된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확증 편향이 진실마저 약탈하는 것이다.

제2연평해전은 김대중·노무현 정부까지 ‘서해교전’으로 불렸다. 이명박 정부 들어 제2연평해전으로 바뀌었고 지난해 처음 ‘승전 기념식’을 열었다. 교전이 승전이 되기까지 20년이 걸린 셈이다. 안보에는 진영이 있을 수 없다. 문 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의 정상회담과 악수는 교과서에 실리는데 북한의 천안함 폭침은 왜 실리지 않는지 의아하다. 진실은 부정하거나 무시하면서 음모를 부각한다면 그 정파에는 표를 주지 말아야 한다.

현충일을 도둑맞을 뻔했다. 호국 영웅들을 추념하는 자리에 악당들이 흙발로 쳐들어올 만큼 이 나라가 허술한가. 이타적인 영웅 이야기는 사람들을 공동 가치로 결속하는 접착제가 될 수 있다. 무엇을 집단적 기억으로 삼아야 바람직한 사회가 될 것인가는 자명하다. 조시은 해군 소위가 아버지의 이름을 딴 ‘조천형함’에서 복무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군인의 헌신과 희생을 예우하고 기억하지 않는다면 누가 다시 국가와 국민을 위해 방패가 되겠나.

해군은 제2연평해전 전사자 고 조천형 상사의 딸 조시은씨가 부경대 해군 학군사관후보생(NROTC)이 됐다고 밝혔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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