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마끼르띠의 인식론, 특히 존재론에 대한 본격적 학술서적
『무상의 철학-다르마끼르띠와 찰나멸』은 인도불교의 인식론과 논리학을 완성한 다르마끼르띠의 인식론 특히 그의 존재론에 대한 본격적인 학술서적이다. 인도불교의 인식론과 논리학에 대한 전반적인 개론서가 나와 있는 것은 있지만 다르마끼르띠의 사상에 대해 이처럼 심오하게 연구하고 있는 책은 국내에서 처음이다. 따라서 이 책은 인도불교 최고의 사상가인 다르마끼르띠를 연구하는 데 길잡이가 되는 최초의 책이 될 것이다.
다르마끼르띠는 누구인가
다르마끼르띠(Dharmak?rti, 法稱, 600∼660)는 7세기 인도불교사상가이다. 서양의 과정철학자 화이트헤드(A. N. Whitehead, 1861∼1947)와 더불어 국제학회가 결성되어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는 유일한 사상가가 다르마끼르띠다. 다르마끼르띠 사상은 7세기 인도사상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인도불교와 티베트불교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관건이 된다.
인식론과 논리학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다르마끼르띠의 사상
다르마끼르띠의 사상은 난해하다. 다르마끼르띠 사상은 원시불교, 설일체유부와 경량부, 중관불교와 유식불교를 근간으로 형성되었다. 그래서 다르마끼르띠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원시불교는 『아함경』, 설일체유부와 경량부는 『아비달마대비바사론』 등의 7론과 세친의 『구사론』, 중관불교는 나가르주나의 『중론』, 유식불교는 세친의 『유식이십론』과 『유식삼십송』 그리고 호법의 『성유식론』 등의 경론을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르마끼르띠 사상은 위에서 언급한 사상을 인식논리학의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집대성한 것이다. 그리고 그 사상은 인식론과 논리학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불교인식론은 디그나가(Dign?ga, 陳那, 480∼540)에서 정초되어 다르마끼르띠에 의해 완성된다. 다르마끼르띠 인식론의 특징은 ‘존재’에 입각한 인식론이 아니라 연기(緣起) 즉, ‘과정’에 입각한 인식론이라는 것이다.
현상세계를 무상한 것으로 볼 뿐만 아니라
현상세계를 구성하는 근원적 존재마저도 찰나멸이라 규정하는 다르마끼르띠
다르마끼르띠의 『무상의 철학』은 ‘모든 것은 무상이다’라는 ‘인간의 직관이 낳은 최초의 막연한 일반화’인 ‘무상’을 다르마끼르띠의 찰나멸성으로 설명하고 있다. 아론의 관점에서 ‘모든 것은 무상이다’라는 명제를 해석할 때 주어인 ‘모든 것’에서 양화사인 ‘모든’ 속에 포함되는 것은 현상세계뿐이며, 본체세계는 제외된다. 왜냐하면 이 현상세계만이 무상하며, 본체세계는 항상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반면 무아론의 관점에서 ‘모든 것은 무상이다’라는 명제를 해석할 때 주어인 ‘모든 것’에서 양화사인 ‘모든’ 속에 포함되는 것은 현상세계뿐만 아니라 본체세계이다. 왜냐하면 현상세계뿐만 아니라 본체세계도 무상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철저한 사상이란 정합적(coherent)이어야 한다. 여기서 ‘정합적’이란 ‘우리의 경험을 설명할 때 사용되는 기초적 관념들이 상호간에 전제되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이 고립될 경우 무의미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W. 제임스) 가령 현상세계가 근원적 존재의 현현이거나 집적 혹은 창조라면 그것은 변화해서는 안 되며, 또한 현상세계의 본질이 무상이라면 그것을 현현·집적하게 하고 창조하게 한 근원적 존재도 무상을 속성으로 가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부정합적인 이론체계를 안고 있는 독단적 실재론은 인간정신이 범하기 쉬운 ‘실체의 오류’를 범하기 마련이다.
다르마끼르띠는 현상세계를 무상한 것으로 볼 뿐만 아니라 현상세계를 구성하는 근원적 존재마저도 찰나멸이라 규정한다. 이 책의 저자 타니 타다시(谷貞志)의 표현에 의하면 존재(A)는 자신의 비존재(-A)를 본질로 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며, 대상의 자기동일성을 근간으로 하는 통상의 논리로는 증명할 수 없다. 따라서 다르마끼르띠는 이것을 시간성의 시점에서 찰나멸성·순간적 존재성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증명하는 데 필생의 철학적 노력을 기울였다. 다르마끼르띠는 찰나멸 논증을 통하여 근본원질을 전제한 형이상학적 실체, 신을 전제한 종교적 실체, 언어의 영원성, 외계실재론, 유물론 등의 잘못된 견해, 전도된 견해를 비판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지금 다르마끼르띠인가?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철학의 모험’에 발을 내딛고자 하는 이 책의 의도는 첫째, 다르마끼르띠의 ‘순간적 존재성의 철학’이라는 ‘시간성의 이론’을 종래의 ‘비시간적 기호·존재의 논리’에 대결시키는 데 있다. 이 문제는 인도 철학의 영역을 뛰어넘어 현대 철학의 최전선에서 부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르마끼르띠를 둘러싼 당시의 주변 사상유형은 현대에서도 대략 생각할 수 있는 패턴을 반복하고 있어 놀라울 정도로 지금과 유사하다. 이미 니체(F. Nietzsche, 1844∼1900)가 예언했던 최고 가치의 붕괴(니힐리즘)가 깊이 침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도그마의 절대화에 근거한 전체주의적 징후, 광신적 종교집단의 난립, 순수한 민족이라는 신화에 기초한 민족주의 등의 ‘고착된 배타적 분파주의’가 동시에 혼재하는 한복판에서, 철학은 모던(modern)에서 포스트모던(postmodern)의 유행으로, 이전의 가장 중요한 문제, 실존의 문제를 망각한 것처럼 유행을 쫓아 바쁘게 배회하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이들 모든 사상을 논적으로 돌리는 용기가 필요하다. 물론 다르마끼르띠의 사상이라고 해도 비판적으로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을 기술하고자 하는 나 자신의 생각도 그때그때 항상 비판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둘째, 우리들 자신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르마끼르띠의 ‘순간적 존재성의 철학’에서 회광반조(廻光返照)하는 데 있다. 그것에 의해서 우리에게 상식이 되고 있는 시간 의식을 변혁하여 새로운 차원에서 ‘자기 자신의 죽음과 삶’을 생각해보고 싶다. 다르마끼르띠는 최초로 ‘무상’의 의미를 논리적으로 ‘삶의 지속을 절단하는 죽음’에서 ‘순간적 존재성’으로 변환시켰다. 이미 이 책의 처음에 기술한 바와 같이 나는 이 ‘순간적 존재성의 철학’에 의해서 ‘시간이라는 존재 속에 텅 빈 사체가 되어 백골이 되어버린 무상’의 기저에 있는 ‘존재에서 분리된 시간 그 자체’를 해체함과 동시에 ‘약동하여 섬광처럼 빛나는 순간을 발현하는 무상’으로 전환하는 것에 도전하고자 한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 했다.
다르마끼르띠는 ‘모든 존재는 찰나멸’이라 했다.
신은 죽은 것이 아니라 찰나멸할 뿐이다. ‘신이 죽었다’라는 니체의 선언은 서양 실체중심주의에 대한 사망선고이다. ‘모든 것은 찰나멸’이라는 다르마끼르띠의 선언은 모든 맹신적 신앙의 종교나 언어·문자·분별적 사고에 매인 철학에 대한 사망선고이다. 지혜 없는 신앙은 맹목일 수밖에 없고, 실상에 대한 통찰 없는 언어·문자·분별적 사고는 지적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무상’이라는 붓다의 말이나 ‘모든 것은 찰나멸’이라는 다르마끼르띠의 말은 무시이래의 아견(我見)·아상(我相)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것이다. 자기 부정 없는 철학, 자기 부정 없는 종교는 자기를 억압할 뿐만 아니라 타자를 억압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