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비염이 나에게 알려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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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연 (에이컴퍼니 대표·아트디렉터)

우리는 대개 멀쩡해보이지만
혼자 감당하는 힘든 시간 있어
함께하는 작은 공동체 필요해

나의 하루는 열여섯 시간 정도다. 살다보니 누구에게나 이십사 시간이 똑같이 주어지진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여덟 시간은 비염이 장악하고 있다. 종종 새벽 서너 시쯤 숨이 막혀 잠에서 깬다. 몸을 일으켜 코를 풀고, 물을 찾아 메마른 목을 축이고, 재채기를 하느라 한동안 잠들지 못한다. 까맣고 조용한 밤에 가쁜 숨을 쉬며 비염과 싸우고 있노라면 산다는 게 구차하게 느껴진다. 나는 이미 패배한 기분이다.

출근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간지럼과 콧물은 계속된다. 회사에 도착해 커피를 마시며 할 일의 순위를 정하고 메일을 체크하는 동안에도 틈틈이 코를 풀고 재채기를 한다. 비염은 일을 방해하지만 내가 일에 집중하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잠잠해진다. 주로 점심시간을 기점으로 상태가 호전되기 때문에 오전에는 되도록 미팅이나 회의를 잡지 않는다. 지질한 모습은 굳이 보이고 싶지 않다. 나는 오후에 드디어 겨우 평범해지고, 평범함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은 소중하다.

20년 이상 비염환자로 지낸 불편함과 서러움을 떠올리면 앞날이 막막하다. 꽤 오래 노력했지만 나을 거라는 기대는 점점 사라졌다. 여러 병원을 거치며 각종 약을 쓰고, 비중격만곡증 수술도 하고, 유명하다는 한의원도 가보고, 작두콩차와 구아바잎도 끓여 마셨다. 그럼에도 비염은 끄떡없다. 나는 여전히 매일 무너지고 비틀대며 일어서느라 기진맥진한 상태로 살고 있다. 비염이 없다면 어땠을까. 마음껏 코로 숨 쉬고, 상쾌한 아침을 맞으며 시간을 온전히 쓸 수 있다면 어땠을까. 젠장. 내가 시니컬한 건 비염 탓이다.

루게릭병을 앓는 유튜버 ‘삐루빼루’의 채널을 구독하고 있다. 그녀는 몸의 근육이 굳어 스스로 먹지도 씻지도 못하고 화장실에 가거나 침대에 누울 수도 없다. 만성 비염으로도 지옥에 드나드는 사람은 루게릭병 환자의 심정을 제대로 가늠하기 어렵다. 그녀는 자신의 상황을 기어이 찍고 편집해 공개하며 사람들과 소통함으로써 자신을 구하고, 다른 이들을 구한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삶의 무게를 감당해 나가는 모습에 나는 조금 겸손해진다. 그녀는 나의 스타이고 스승이다.

드라마 ‘무빙’을 볼 때는 연휴였고 비염도 그걸 아는지 며칠 내내 극성이었다. 비염과 나는 오래 함께하다보니 서로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 드물지만, 놈은 내가 무척 중요한 상황일 때는 아침에 나타나지 않는 배려를 한다. 하지만 여유가 생겨 방만해질 것 같으면 종일 징징거리기도 한다. 내 상황 때문인지 드라마의 초능력자들이 부럽지 않고 죄다 짠해 보였다. 원한 적도 없는데 날 때부터 주어진 초능력을 빼면 잘난 구석도 없고, 초능력 때문에 죽을 고생을 한다. 소수자라는 점에서 초능력자의 생활도 외롭고 고되다.

최근 뇌전증을 가진 친구와 동료가 됐다. 쓰러지는 걸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어느 밤에 119 응급대원의 전화를 받고, 그가 갑자기 의식을 잃을 수 있음을 실감했다. 예측할 수 없는 시간과 장소에서 기억이 끊어지고 몸을 가눌 수 없게 되는 건 어떤 걸까. 뇌전증에 대해 찾아봤다. 가장 힘든 건 외로움이라고, 학교와 직장에 다니는 게 어려웠다고 고백하는 뇌전증 환자의 영상이 마음에 남았다. 사실 우리 사무실에는 심실중격결손으로 심장 수술을 한 사람도 있고, 한쪽 귀가 들리지 않는 동료도 있다. 원해서 그렇게 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모두 대개는 멀쩡해 보인다. 책임감을 가지고 맡은 일을 잘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내가 그렇듯이 어느 밤과 낮에 혼자서 힘든 시간을 감당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코를 훌쩍거리며 생각한다. ‘오합지졸이라도 좋아. 가끔 소동이 벌어져도 괜찮아.’ 우리가 드라마를 써보면 어떨까. 핸디캡을 가진 멤버들이 모여 무리하지 않으며 외롭지 않게 일하는 회사, 그럼에도 함께 대견한 일들을 해내는 작은 회사를 우리가 만들면 좋겠다. 혼자서는 비범할 수 없으니까.

정지연 (에이컴퍼니 대표·아트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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