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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마녀재판 (5)2023.07.05.

  폴로뿐만 아니라 자신들까지 깡그리 묶어서 사특한 놈이라고 지적하는 게 분명한 칼로스의 시선과 말투에 모욕감을 느낀 사제들의 얼굴은 잘 익은 토마토처럼 붉어졌다. 트로페가 사제들을 대표해서 나섰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듯한데…….”

“내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오해라고?”

칼로스가 냉랭한 어조로 되묻자, 트로페는 입을 다물었다. 고개가 저절로 공손히 숙어진다. 머리를 빠르게 굴리며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생각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오는 답은 하나뿐이었다.

“송구합니다, 대공 각하.”

바로 몸을 납작 엎드리고, 용서를 구하는 거였다.

“설마 저희 중에 사특한 마귀가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저, 전 마귀가 아닙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와, 반쯤 넋을 놓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데 집중하고 있던 폴로는 마귀라는 단어에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동료 사제들은 모멸감이 어린 눈빛으로 폴로를 쳐다봤다. 동료 사제들의 싸늘한 응대에 폴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대로 있다간 꼼짝없이 마귀로 몰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엄습하면서 손과 발이 덜덜 떨렸다.

“저, 저는 마귀가 아닙니다.”

동료 사제들에게 버림받은 그가 지금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칼로스뿐이었다. 폴로는 칼로스를 향해 넙죽 엎드리며 두 손을 파리처럼 비볐다.

“일평생을 신을 위해 살아온 제가 마귀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제발, 제발 제 결백을 믿어주십시오.”

칼로스가 싸늘하게 웃었다.

“사제들이 그토록 신뢰하는 재판에서 이런 결과가 나왔는데, 자네가 어떻게 결백하다는 걸 믿지?”

“그, 그건…….”

순간 할 말을 잃은 폴로는 주춤하다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이, 이 재판이 잘못된 겁니다! 뭔가,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합니다, 각하!”

간절한 외침에도 칼로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트로페를 돌아봤다.

“그렇다는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지?”

“…….”

트로페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두 손을 꽉 마주 쥐었다. 재판 자체가 잘못됐다면, 재판 결과도 잘못됐다는 의미이니 폴로는 무죄가 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호수에 신성력을 부여하는 등 마녀재판을 준비한 다른 사제들이 잘못된 재판을 준비한 것에 대한 문책을 피할 수가 없었다. 특히 트로페는 이 재판의 책임자였기 때문에 가장 심한 징계를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망설이는 것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번 재판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설령 잘못됐다고 하더라도 양손과 양발이 결박당한 인간이 물에 빠졌다가 멀쩡하게 살아 돌아오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니 폴로는 마귀가 분명했다.

“아닙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마침표를 찍은 트로페가 단호하게 말했다.

“재판은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잘못된 건 저 남자입니다.”

“형제님!”

폴로가 다급하게 부르자, 트로페가 인상을 팍 썼다.

“마귀 주제에 형제님이라는 호칭을 쓰다니. 몹시 불쾌하군.”

“저는 마귀가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손과 발에 찬 수갑과 돌멩이를 풀 수 있었는지 설명해보게.”

“그건……”

그 부분에 대해선 폴로 역시 아는 바가 없었기에 입을 다물었다. 그도 당연히 죽을 줄 알고 체념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손과 발이 자유로워졌고, 그 사실을 자각하자마자 살고 싶다는 본능이 발동되면서 수면 위로 올라온 거였다. 폴로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트로페는 그것 보라는 듯 코웃음을 쳤다. 사제들 역시 폴로를 손가락질했다. 트로페는 다시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칼로스를 향해 허리를 깊게 숙였다.

“신전으로 돌아가는 즉시, 마귀를 엄중하게 처벌하겠습니다. 몹쓸 꼴을 보여드려 정말 송구합니다, 대공 각하.”

칼로스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걸 알면 당장 저놈을 내 눈앞에서 치우도록.”

지금 당장 에스페르 영지를 떠나라는 의미였다. 아이레네가 마녀라는 걸 밝히고 그녀를 처형하려고 온 건데, 그 목적을 이루기는커녕 오히려 신전의 명성이 실추되는 일이 벌어졌으니 사제들의 입장은 무척 난처해졌다. 일단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게 막아야 해. 불행 중 다행으로 이곳에는 칼로스와 그의 호위 기사, 그리고 아이레네밖에 없으니 칼로스만 침묵해준다면 충분히 묻을 수 있었다. 문제는 상대가 악명 높은 에스페르 대공이라는 거였다. 신전과 상당히 사이가 나쁘기도 했고. 이럴 때는 부탁하기보다 거래를 하는 게 더 효과적이겠지. 기회는 한 번, 칼로스가 반드시 받아줄 수밖에 없는 거래 조건을 내밀어야 했다. 그런 게 뭐가 있을까. 고민하던 트로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칼로스의 옆에 서 있는 아이레네에게 향했다. 그러자 칼로스가 눈썹을 찡그리며 아이레네를 시야에서 지웠다. ……이거면 가능할지도. 좋은 방법을 떠올린 트로페는 크게 심호흡한 뒤, 최대한 담담한 어조로 칼로스에게 말했다.

“저희가 이대로 물러간다고 해도 대공 각하의 연인 분에 대한 마녀 의혹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이번 일을 묻어주신다면, 마녀재판 확인 증서를 쓰겠습니다.”

마녀재판 증서. 마녀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에게 재판을 주관한 사제가 써주는 증서로, 이게 있으면 마녀 의혹을 말끔히 씻을 수 있었다. 문제는 백 명 중 아흔아홉 명은 마녀재판 중에 죽어서 이걸 받지 못한다는 거였지만. 하여간 마녀재판도 받지 않았는데, 증서를 써준다는 게 웃겼다.

“확인하지도 않았으면서, 그렇게 막 써줘도 되는 건가?”

비아냥거리는 말에 트로페는 움찔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가, 이내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대답했다.

“저희가 대공 각하께 저지른 큰 결례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끝까지 아이레네가 마녀가 아니라고 인정하지 않는군. 칼로스는 트로페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중요한 건 증서를 받는 거였다. 칼로스가 처음부터 노렸던 것도 바로 그거였고. 이대로라면 제르딘이 에스페르 영지에 온 뒤의 일도 차질없이 진행될 것이다.

‘술술 잘 풀리는군.’

일이 계획한 대로 잘 풀린다면 기뻐야 마땅하건만, 꺼림칙한 건 만약 ‘그자’가 이번 일에 관여하고 있다면 쉽게 풀릴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그자와 아무 연관이 없는, 신전의 독단적인 행동인가?

“그럼 성으로 돌아가서 증서를 작성하도록 하지.”

칼로스는 풀리지 않는 의문을 가슴에 품으며 돌아섰다. * 성으로 돌아온 칼로스는 트로페만 집무실로 불렀다. 어차피 증서에 사인하는 사람은 트로페인데, 다른 사람들까지 들일 이유가 없다는 게 그의 의견이었다. 마귀라고 판정된 폴로도 감시해야 하니, 트로페는 홀로 칼로스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집무실에는 칼로스뿐만 아니라 아이레네도 있었다. 의혹의 당사자이니 그녀가 있는 건 당연했지만, 트로페는 마음에 들지 않아 입매를 일자로 그렸다. 동시에 정말로 증서를 작성해도 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마녀재판 확인 증서를 발행하면, 나중에 어떤 의혹이 생기더라도 아이레네를 대상으로 마녀재판을 할 수가 없는 터라 더욱 고민됐지만, 이내 어쩔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사제 중에서 마귀가 나왔다고 소문이 나는 것보다 훨씬 나았으니까. 칼로스가 고급 양피지와 깃펜, 그리고 잉크를 트로페에게 내밀었다.

“작성하도록.”

트로페는 바로 깃펜을 들지 않고, 칼로스에게 말했다.

“약속을 지켜주시겠다는 각서부터 써주십시오.”

증서를 발행했는데, 칼로스가 손바닥 뒤집듯이 뜻을 바꾸면 곤란하니, 반드시 각서가 필요했다. 트로페는 이에 칼로스가 불쾌해하더라도 굴하지 않고 밀고 나가리라고 굳게 마음을 먹었는데, 뜻밖에도 칼로스는 순순히 그렇겠다고 대답했다. 각서를 먼저 작성하고, 그다음에 양피지에 마녀재판 확인 증서의 양식에 맞춰 글을 적었다. 마지막에는 신성력을 부여한 특수한 밀랍을 부어 그 위에 인장을 찍었다.

“여기 있습니다.”

칼로스는 증서에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한 뒤, 아이레네에게 보여주었다.

“이걸 세상에 공표하면, 그 누구도 널 마녀라고 손가락질하지 못할 것이다.”

증서를 확인한 아이레네의 눈시울이 약간 촉촉하게 젖었다. 칼로스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며 물었다.

“모처럼 누명을 벗었는데, 왜 우는 거지?”

“……기뻐서요.”

아이레네는 소중한 증서에 눈물이 떨어질세라 황급히 옆으로 치우며 대답했다.

“누명을 벗은 게 너무 기뻐서……우는 거예요.”

“기뻐도 눈물이 나오는 건가. 신기하군.”

놀리는 듯한 말투에 아이레네의 귓불이 약간 붉어졌고, 칼로스는 그 모습이 사랑스럽다는 듯 작게 웃었다. 졸지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된 트로페는 불만스레 입술을 실룩거리면서도, 뜻밖의 눈으로 칼로스와 아이레네를 쳐다봤다. 소문의 칼로스는 피도 눈물도 없는 데다가 인육을 즐겨 먹는 냉혹한 악마였다. 그런데 이리도 다정한 모습을 보이니, 이상했다. 아무리 난폭한 폭군이라도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된다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 괴리감이 느껴졌다. 역시 저 여자가 진짜 마녀인 건 아닐까? 그래서 칼로스를 홀려, 순한 양으로 만들었다는 게 훨씬 신빙성이 있었다.

“왜 그렇게 보는 거지?”

서릿발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고막을 두드리면서, 정신이 번쩍 든 트로페는 고개를 격하게 저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칼로스는 못마땅한 눈으로 트로페를 바라봤다가, 다시 온화한 눈빛으로 바꾸며 아이레네에게 말했다.

“고단할 테니, 오늘은 이만 방에 가서 쉬어라. 나중에 방으로 가겠다.”

아이레네가 집무실을 떠나자마자, 트로페는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부디 이번 사건을 묻어주겠다는 약속을 꼭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칼로스의 눈썹이 비스듬하게 기울어졌다.

“각서까지 썼는데도, 나를 믿지 못한다는 건가?”

“어휴, 그럴 리가요! 그냥 확인차 물어본 겁니다.”

비굴한 표정이 저절로 나왔다. 허둥지둥 일어선 트로페는 허리를 깊이 숙이며 인사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트로페가 돌아서는 그때, 문이 열리더니 태양을 녹여놓은 것 같은 짙은 황금색 머리칼의 남자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입니다, 스승님.” 

그 남자는 바로 루만 제국의 황태자, 제르딘이었다. 신전은 에스페르 가문만큼 황실과 사이가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좋은 편도 아니었다. 서로가 가진 권력을 빼앗으려고 아웅다웅하면서도, 상대가 필요할 때가 있어 완전히 무너뜨리지는 못하는 애매모호한 관계였다. 그런데 황태자가 나타났으니, 트로페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이 사제는 누구입니까?”

제르딘이 그를 쳐다봤을 땐, 발발 떨며 고개를 푹 숙였다. 제 소개를 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렸다.

‘괜찮을 거야.’

황태자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라긴 했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제르딘은 아무것도 모를 테니까. 이제 막 이곳에 도착한 그가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아, 사제 중에 사특한 존재가 나왔다더니, 그것 때문에 온 모양이군요.”

그러니 괜찮을 거라고 희망을 품었건만, 그 희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산산조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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