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여의도의 몇몇 정치권 관계자들 사이에 '홍준표 당대표 시나리오'가 거론되고 있다. 홍준표 대구시장이 차기 국민의힘 대표를 맡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국민의힘 대표 선거는 내년 3월쯤 치러질 전망이다. 이제 임기 5개월을 막 지난 홍 시장이 시장직을 던지고 당대표에 도전할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 말 그대로 시나리오일 뿐이다. 다만 차기 국민의힘 대표가 갖춰야 할 요건마다 홍 시장만 한 적임자가 없다며 나오는 얘기인데, 시나리오의 근거는 이렇다.
1. 총선은 수도권 싸움이다. → 홍 시장은 서울(송파·동대문)에서만 4선을 지냈다. 이 중 3선을 지낸 서울 동대문은 국민의힘이 상대적으로 약세인 강북권이다. 그런 지역에서 3선에 성공했으니, 수도권 싸움에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 그의 전국적 인지도도 강점이다.
2. 2030세대를 끌어와야 한다. → 여권의 중진 정치인 중 홍 시장이 가장 큰 장점을 지닌 부분이다. 최근 당대표 후보군으로 자천타천 거론되는 인물 중 총선에서 2030세대의 지지를 이끌어 올 사람이 없다.비록 '이대남'에 한정된 인기이긴 하나, 현재 국민의힘에서 홍 시장 정도의 인물이 없다. 홍 시장은 지난 대선을 거치며 2030세대와 긴밀히 소통해왔다.
3. '바람'을 일으켜야 한다. → 전국 단위 선거는 민심의 바람이 어느 쪽으로 부느냐가 중요하다. 특히 총선에서 유권자들은 인물보다 '당'에 투표하는 경향이 크다. 중앙당이 큰 이벤트를 만들며 여론을 끌고 가야 한다. 홍 시장이 당대표가 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흥행 요소가 될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홍 시장의 미묘한 긴장관계도 사람들의 관심을 얻는 데에는 득이 된다.
'홍준표 대표' 시나리오의 근거들
타임플랜도 꽤 구체적으로 거론된다. 내년 재·보궐선거는 4월 5일로 예정되어 있다. 재·보궐 선거구 확정은 내년 2월 말이다. 이 스케줄에 맞춰 홍 시장이 시장직을 던지면 보수세가 강한 대구시민들이 '당대표 차출'을 양해해줄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돈다.
물론 걸림돌도 적지 않다. 일단 당대표는 당을 장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친윤계 일색인 국민의힘 의원들이 당장 홍 시장을 따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는 윤석열 대통령이 '교통정리'만 해주면 해결될 문제라는 반론도 있다. 대선 경선 당시 1, 2위를 다투며 격하게 맞붙었던 윤 대통령과 홍 시장의 관계도 최근 들어 원만해졌다는 이야기가 많다. 홍 시장은 지난 대선 이후 '하방(下放)'하겠다며 대구시장직에 나섰지만, 그가 국민의힘을 총선 승리로 이끈다면 차기 대선도 다시 노려볼 수 있다는 전망이 이 시나리오를 뒷받침한다. 최광웅 데이터정경연구원장은 "정치는 상상력의 싸움"이라면서 "홍 시장이 국민의힘 안에선 분명히 대선배다. 윤 대통령이 정리만 해준다면 당을 장악하는 데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홍준표 당대표 시나리오'는 가설 수준에서 끝날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이런 아이디어까지 거론되는 것은 그만큼 현재 국민의힘 내부에 '대표 감'이 없다는 현실을 방증한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지난 12월 3일 대구 토론회에서 차기 당대표 요건에 대해"국회 지역구 의석의 절반이 수도권인 만큼 수도권에서 대처가 되는 대표여야 한다"며 "MZ세대에게 인기 있는 대표여야 하고, 공천에서 휘둘리지 않고 안정적으로 공천을 해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주 원내대표는 당권 주자들의 실명을 거명하며 "총선에서 이길 수 있는 확신이 있는 사람이 안 보인다는 게 당원들의 고민"이라고도 했다. 주 원내대표의 이 같은 발언은 그가 윤 대통령을 만난 뒤 나와 '윤심'이 반영된 것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 주 원내대표의 발언 직후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당대표 차출설까지 나왔다. 주 원내대표는 "일반론을 말한 것"이라며 "특정인을 염두에 둔 게 아니다"라고 수습했다.
지지율 1위는 '비윤' 넘어 '반윤'으로
주 원내대표의 발언과 별개로 '2030+수도권'의 표심을 끌어올 수 있는 정치인이 차기 당대표가 되어야 한다는 명제만 놓고 보면 반론의 여지는 없다. 여야를 막론하고 '2030+수도권'에서 이기는 정당이 총선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의힘 안팎에선 '2030+수도권'의 과업을 달성할 당대표 후보군이 실제 보이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1위를 하고 있는 후보는 '비윤'을 넘어 '반윤' 행보를 걷고 있는 유승민 전 의원이다. 유 전 의원은 최근 윤 대통령·친윤계와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넌 것처럼 맞붙고 있다. 유 전 의원은 지난 12월 12일 KBS라디오에 출연해 지난 6월 경기지사 선거에 대해 언급하며 "대통령 측에서 정말 별별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가지고 저를 떨어뜨리더라"라고 했다. 그는 "경기도에 국회의원 지역구가 59개 있는데 그곳 당원들을 거의 못 만날 정도로 당시 대통령 측에서 정말 심하게 했다"고 밝혔다. 유 전 의원은 또 친윤계를 향해 "지금 국민의힘을 보면 좀 한심한 생각이 드는 게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사람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이라며 "대한민국이 무슨 왕이 있는 왕정이 아니지 않나. 권력에 아부해서 공천받고 떡고물이라도 나눠 가려고 그러는 거 아니겠나"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러자 친윤계도 반박에 나섰다. 최근 당권 도전 의사를 밝힌 권성동 의원은 지난 12월 13일 "자의식 과잉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 결합하면 피해망상이 된다"며 "대통령 측이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해 자신을 낙선시켰다는 유 전 의원의 인식이 바로 그것"이라고 직격했다. 권 의원은 "(경기지사 경선 당시) '윤심은 민심'이라고 말했던 당사자가 유 전 의원 아닌가. 국회 소통관 기자회견 자리에서 대통령으로부터 응원 전화를 받았다며 '윤심 마케팅'을 하지 않았나"라고 했다. 이어 "그래놓고 경선에서 패배하자마자 안면몰수했다. '윤석열과 대결'에서 졌다며 '권력의 뒤끝' '자객의 칼'을 운운했다"며 "이런 분이 '승복'을 입에 담은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라고 비판했다.
차기 전당대회 룰 개정이 나오는 이유도 유 전 의원과 친윤계 사이 악연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민의힘 내에선 현행 7 대 3(당원 투표 70%·일반 국민여론조사 30%)에서 9 대 1 또는 10 대 0으로 바꿔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당원들의 표심 반영 비율을 높이면 유 전 의원은 불리해지는 반면 친윤계 의원들은 유리해진다.
정진석 비상대책위원장도 지난 12월 13일 "당원들의 대표인 당대표는 당원들이 뽑는 것이라는 의견들이 많은 것 같다"고 했다. 당원투표 비율을 늘리면 민심과 거리가 멀어질 수 있다는 지적에 대해 정 위원장은 "작년에 이준석 전 대표를 뽑은 전당대회의 책임당원이 28만명인데 지금 이 순간 책임당원이 약 80만명으로 거의 3배 가까이 늘었다"면서 "당심과 민심이 분리될 이유가 없다. 당원들의 의사가 더 많이 반영되는 것이 정당민주주의를 구현하는 길"이라고 했다. 현재 거론되는 당권 주자 중에선 권성동·김기현·조경태 의원 등이 당원 투표 비중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이러한 룰 개정에 거리를 두고 있는 당권 주자는 유승민·안철수·윤상현 의원 등이다.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친유승민계로 꼽히는 정치인들도 당원투표 반영 비율을 늘리는 전당대회 룰 개정에 반대하는 의사를 밝혔다. 유 전 의원과 가까운 사이인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지난 12월 1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1등 자르고 5등 대학 보내려고 하는 순간 그게 자기모순"이라고 밝혔다. 이 전 대표는 "상식선에서는 어떻게 입시제도를 바꿔대도 결국은 대학 갈 사람이 간다"며 "그런데 정말 상식의 범위를 넘어서 입시제도를 바꾸면 문과생이 이공계 논문 쓰고 의대 가고 그러면서 혼란스러워진다. 그거 잡으면서 시작했잖아요"라면서 이같이 주장했다. '입시제도를 바꿔 1등을 자르고 5등 대학 보낸다'는 비유로 전당대회 룰 개정을 비판한 것으로 해석됐다. 김웅 의원도 지난 12월 15일 "2004년 이후 18년간 우리 당은 국민 여론조사를 50~30% 반영해왔다" "그 18년간의 전당대회는 당원의 축제가 아니라 당원의 장례식장이었나"라면서 전당대회 룰 개정을 비판했다. 김 의원은 "전대 룰 변경에 대해 어떤 장식을 해봐도 그것이 유승민 포비아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총선 득표에 도움 될 후보가 안 보인다
수시로 윤 대통령을 향해 격한 비판을 이어가고 있는 유 전 의원이 당대표가 되는 상황은 친윤계는 물론 윤 대통령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여권에는 '이준석 사태'를 겪으며 대통령과 여당대표가 대립하는 상황이 재현되어선 안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유 전 의원이 여러 여론조사에서 1위를 얻고 있지만 실제로 당선될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드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친윤계 주자들의 강점은 '윤심'을 등에 업고 당 장악력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불필요한 갈등이나 잡음을 최소화해 국정 운영을 뒷받침하는 안정적인 집권 여당 대표의 역할도 해낼 수 있다. 문제는 앞서 주 원내대표의 발언처럼, 친윤계 주자 중에선 '2030+수도권'의 표를 얻어 총선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을 만한 후보군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국민의힘 한 전직 의원은 "윤 대통령과 좋은 합을 이룰 수 있는 당대표가 필요해 보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라면서 "총선을 이끌어야 하는 이번 대표는 전국을 다니며 각 지역 후보들의 득표에 도움을 줘야 하는데, 현재로선 그럴 만한 사람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