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 원수의 걸작(1950년)

인천상륙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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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한국전쟁에서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미합동참모본부와 해군 등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맥아더는 인천을 선택했고 그의 예상대로 인천의 적 방비태세는 엉성했다. 유엔군은 쉽게 인천을 탈환하고 전 전선을 무너뜨렸다.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하다

맥아더가 참모들과 함께 해상 멀리에서 인천상륙작전을 관찰하고 있다.

한국전쟁에서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한국전선을 최초로 시찰한 6월 29일에 이미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했다고 한다. 태평양전쟁 중 상륙작전의 대가로 이름을 떨친 그는 북한군의 거칠 것 없는 진격에 일격을 가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 수단은 적 배후에 상륙작전을 감행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적 공격을 막지 못하고 전선 곳곳이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와 같이 배후를 칠 생각을 한 것은 맥아더가 아닌 다른 장군이라면 참으로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간만의 차가 심한 인천의 자연적 조건으로 작전의 반대에 부딪히다

그러나 인천을 상륙지점으로 선택하는 데 대하여 미합동참모본부와 해군 및 해병대 측은 강력하게 반대했다. 인천의 자연적 조건이 대규모 상륙작전을 하기에는 부적절한 곳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인천 앞바다는 간만의 차가 매우 심하기 때문에 상륙작전을 할 수 있는 날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맥아더가 계획하는 9월의 경우 15일부터 3일간이 가능하고, 이때를 놓치면 다음 한 달을 기다려야 한다. 또한 상륙 가능 날짜에도 밀물이 꽉 들어차는 아침과 저녁 두 차례 각각 3시간 정도의 제한된 시간 내에 행동을 완료해야 한다.

두 단계를 요하는 상륙, 높은 벽의 해안 등의 문제로 다른 상륙지 선정을 요구받다

둘째, 인천항은 대규모 상륙함대가 자리잡기에 협소할 뿐만 아니라 항구에 이르는 해상 접근로가 제한되어 있다. 상륙작전은 인천항에 앞서 먼저 월미도를 점령해야 하므로 아침에 월미도, 저녁에 인천을 점령하는 2단계를 거쳐야 한다.

셋째, 높은 벽의 상륙해안을 기어오르기가 어렵고, 그것을 극복한 다음에는 곧 시가지에서 적과 교전해야 한다.

인천항
인천상륙작전이 벌어진 다음날 인천항의 모습.

미합동참모본부는 육군 및 해군참모총장을 파견하면서까지 맥아더에게 인천이 아닌 다른 상륙지를 선정하는 방안을 검토하도록 요구했다.

맥아더, 적의 의표를 찌르는 기습효과를 위해 인천 상륙을 강행하다

그러나 맥아더는 여러 사람이 반대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인천을 선택했다. 즉, 아군뿐만 아니라 적도 어렵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의표를 찔러서 공격하면 전략적 기습효과를 올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적은 인천을 허술하게 지키고 있었다.

상륙부대로서 13,000여 명의 한국인을 포함한 해병과 보병 각 1개 사단이 편성되다

맥아더는 상륙작전부대로서 해병과 보병 각각 1개 사단을 편성하고 한국군을 각각 1개 연대씩 배속시켰다. 미 제7보병사단은 약 8,600명의 카투사 병력을 포함하고 있어 상륙작전에 참가한 한국인 총병력은 13,000명에 이르렀다.

약 20%에 해당하는 이 병력은 인천시가지에서 적을 소탕하고 민간인 복장으로 숨어 있는 적을 모두 색출해냄으로써 지대한 공을 세웠다.

더글러스 맥아더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관찰하고 있다.

유엔군, 허술한 인천의 방비를 뚫고 서울로 진출하다

맥아더가 예상한 대로 인천의 적 방비태세는 엉성하기 짝이 없었고, 9월 15일 새벽부터 개시한 상륙작전에서 유엔군은 약 2,000명밖에 되지 않은 적을 쉽게 제압하고 인천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약 3일 후부터 유엔군은 김포와 영등포 두 방향으로 진출, 서울을 포위하기 시작했고, 9월 28일에는 서울을 완전히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월미도 폭격
인천상륙작전 전에 미국 해군이 월미도를 사전 폭격하고 있다.

인천의 성공과 함께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기 시작하여 38도선 이남을 모두 회복하다

이와 같이 인천에서 대성공을 거두자, 남쪽의 낙동강 선에서도 국군과 유엔군은 9월 23일에 전 전선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인천 소식이 알려지면서 적 사기가 걷잡을 수 없이 떨어지고 도주병이 나오더니 드디어 전 전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상륙작전 개시 후 약 보름 만에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 이남을 모두 회복했다. 적은 약 10만 명의 병력을 잃었으며 북으로 도주한 자는 3만 명이 채 안 되었다.

UN군의 전진
상륙에 성공한 UN군 군인들이 방조제를 기어 넘고 있다.

맥아더, 대담한 착상과 결단력으로 승리를 이뤄내다

맥아더 원수의 걸작 중에서도 걸작인 인천상륙작전은 전쟁사에서 전통적인 승리의 비법이 되어온 '망치(Hammer)'와 '모루(Anvil)'의 원리를 적용해 이루어낸 것이었다.

즉, 낙동강에서부터 정면공격에 의한 반격은 엄청난 손실이 따르므로 인천에 상륙해 모루를 만들고, 낙동강에서부터 망치를 휘둘러 그 안에 있는 적을 섬멸하는 개념의 작전을 구사한 것이다.

인천상륙작전 지도

이 작전은 맥아더 원수의 대담한 착상, 결단력, 필승의 신념으로 이루어낸 20세기의 칸나에(Cannae) 전투라고 평가할 수 있다.

본국 정부와 해군 및 해병대 측 우려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혀 동요하지 않는 그는 마치 승리의 신으로부터 계시라도 받은 듯한 모습을 보이고 부하들에게 확신을 주었다. 맥아더가 아니었다면 인천상륙작전과 같은 빛나는 승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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