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과거 ‘마은혁 헌법재판관 후보자 임명 보류’ 사건과 유사한 권한쟁의 심판에서 국회의원(청구인)에 대한 권한 침해를 확인하고도 “국회의장(피청구인)이 특정한 조치를 할 의무는 없다”고 결정한 것으로 2일 전해졌다. 권한 침해 사실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특정 국가 기관에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하라고 강제할 수 없다는 취지다.
헌재는 지난달 27일 국회가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을 상대로 낸 권한쟁의 사건에서 “마 후보자 임명 보류는 국회의 권한을 침해한 것”이라면서도 “마 후보자에게 재판관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헌재가 결정할 수 없다”고 했다. 법조계에서는 “그간 헌재의 결정 사례에 비춰보면, 최 권한대행이 반드시 마 후보자를 임명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해석이 나온다.
이 사건은 2009년 민주당 등 당시 야당 의원들이 여당 주도로 진행된 신문법·방송법 의결이 잘못이라며 김형오 국회의장 등을 상대로 낸 두 건의 권한쟁의 심판과 관련 있다. 야당 의원들은 먼저 “법안 심의·의결권을 침해당한 것, 법안이 무효인 것을 확인해달라”며 권한쟁의를 청구했는데, 헌재는 야당 의원들의 권한이 침해당했다면서도 두 법이 무효는 아니라고 결정했다. 그러자 야당 의원들은 “헌재가 권한 침해를 인정했는데도 국회의장이 입법 절차를 다시 밟지 않는 등 조처를 하지 않았다”며 다시 권한쟁의를 청구했다.
헌재는 2010년 11월 두 번째 권한쟁의 사건에서 “앞선 권한 침해 확인 결정에 따라 국회의장이 구체적인 조치를 해야 한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헌재가 의원들의 심의·의결권이 침해됐다고 판단했다고 해서, 이에 따라 국회의장이 재입법 등에 나설 의무는 없다는 것이다. 한 변호사는 “헌재가 국회의장에게 권한이 침해된 의원들을 위한 조치를 하라고 강제할 수 없다는 의미”라고 했다.
법조계에서는 이 사건과 마찬가지로 최 권한대행에게도 마 후보자를 임명할 의무가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인호 중앙대 교수는 “헌재는 앞선 권한쟁의 심판에서 국가기관에 특정한 의무 이행이나 지시를 명령하는 것은 권력 분립 원칙에 어긋난다고 결정한 것”이라며 “이번 사건에서도 국회의 재판관 선출권이 침해됐다는 것이 인정됐지만, 최 권한대행이 헌재 결정에 구속돼 마 후보자를 임명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대법원과 국회도 헌재의 결정에 여러 차례 따르지 않고 있다. 헌재는 1997년 이후 5차례 대법원 판결을 취소했지만, 대법원은 “헌법상 최고 법원인 대법원 판단을 외부 기관이 다시 심사할 수 없다”며 모두 거부했다. “대법원이 헌재가 위헌으로 본 법률을 근거로 잘못 재판·판결했다”는 헌재 입장과 “법률 해석은 법원의 고유 권한”이라는 대법원 입장이 좁혀지지 않은 것이다.
국회는 헌재의 위헌·헌법 불합치 결정에 따른 법 개정을 미루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낙태죄다. 헌재는 2019년 4월 낙태를 처벌하는 형법 조항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국회의 입법 시한을 2020년 12월까지로 정했다. 하지만 4년이 지났는데도 국회 입법은 이뤄지지 않았다. 국회는 헌재의 헌법 불합치 결정 17건, 위헌 결정 18건 등 총 35건의 법률을 손보지 않고 있다.
법조계 관계자는 “마 후보자 임명 보류는 대통령 탄핵 심판 재판부 구성, 권한대행과 거대 야당 간 정치적 갈등 등이 복잡하게 얽힌 문제”라며 “헌재의 결정에만 구속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