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범죄자들이 원하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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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성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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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성원 사회부 기자

검경 수사권 조정·검수완박
부작용 현실화… 재판마저
지연, 형사사법 원칙 무너져

몬테네그로에서 검거된 테라폼랩스 공동창업자 권도형(33)씨 송환 문제를 놓고 국내 피해자들이 그를 미국으로 보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권씨는 전 세계적으로 피해 규모가 약 50조원으로 추정되는 ‘테라·루나 코인 폭락 사태’ 주범으로 지목된다. 권씨는 현지 법원에서 “미국이 아닌 한국으로 가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법조계에선 국내 가상화폐 관련법 미비로 권씨 처벌 여부가 불투명하고, 형량도 미국에 비해 현저히 낮을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본다. 한국이 범죄자가 원하는 나라로 전락했다는 조소도 나온다.

단순히 권씨 한 명의 사례로 치부해선 안 된다. 범죄 혐의자들이 한국 형사사법 체계를 만만히 보는 풍조가 팽배해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2021년 1월 시행된 검경 수사권 조정과 2022년 5월 공포된 이른바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은 범죄 수사 환경을 완전히 흔들어 놨다. 검·경 수사권 조정은 검찰의 수사지휘권을 폐지하고, 경찰에 1차 수사 종결권을 부여하는 내용이 골자다. 검수완박법으로 검찰 직접 수사권이 축소됐다. 경찰의 수사 주체성을 강화한다는 취지였으나 수사 현장의 책임소재가 불명확해졌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과거에는 경찰이 고소·고발 사건을 다 검찰로 넘겨야 했고, 검사가 사건을 전적으로 책임져야 했다. 사건 하나에 한 개의 ‘형제번호’(사건번호)가 붙었다. 하지만 수사권 조정 이후 검찰이 보완수사 요청으로 경찰에 사건을 보내면 사건번호가 바뀌고 더 이상 검사 사건이 아니게 된다. 요즘 검찰 안팎에선 검사가 미제 사건을 남겨놓고 골머리를 앓을 이유가 없다는 말이 나온다. 사건 ‘핑퐁’에 지친 서초동 변호사들 사이에선 이대로 몇 년 더 지나면 검찰에 수사를 제대로 할 줄 아는 검사가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는 우려마저 나온다.

경찰에선 업무 과중으로 ‘수사 부서 탈출은 지능순’이라는 말이 나온다고 한다. 경찰에 따르면 사기범죄 검거율은 2017년 79.5%에서 2022년 58.9%로 대폭 떨어졌다. 신종 사기가 판을 치는데 국가 범죄 대응 역량이 쫓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원석 검찰총장은 최근 월례회의에서 “고소인·피고소인, 피해자는 물론 검찰, 경찰, 변호사 모두 현재의 사법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신뢰하지도, 만족하지도 못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라며 “현재 시스템이 범죄자에게 유리하게 잘못 설계돼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살펴봐야 한다”고 했다.

험난한 과정을 거쳐 피의자가 기소돼도 선고까진 하세월이다. 형사 합의 사건(불구속) 1심 평균 처리 기간은 2018년 159.6일에서 2022년 223.7일로 급격히 늘었다. 정치인 등 유력자들 재판은 1심만 3~4년 걸리기 일쑤다. 재판 지연 원인은 판사 수 부족도 거론되지만, 2020년 고법 부장판사 승진제 폐지 등 수평적 문화 도입도 원인으로 지목된다. 법복을 벗은 많은 판사들이 ‘법원에 남아 열심히 일할 이유가 사라졌다’고 입을 모은다.

1·2심에서 유죄가 선고돼도 요즘 법원은 불구속 재판을 강조하며 피고인들을 좀처럼 법정구속하지도 않는다. 입시비리 혐의로 2심까지 실형을 받은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는 법정구속되지 않은 상태로 창당을 하고 총선에 출마했다.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된 송영길 소나무당 대표는 재판에서 “조 대표도 법정구속 안 됐는데, 왜 저는 활동을 못하는지 수긍이 안 된다”고 되레 목소리를 높인다. ‘왜 나만 갖고 그러느냐’는 식인데, 법원이 자초한 일이다.

검찰 권한 줄이기와 수사권 조정, 법원 내 수평적 문화 도입과 불구속 재판 원칙 강화 모두 좋은 의도로 시작된 정책들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그 결과물이 범죄자들이 형사사법 체계를 우습게 보는 현상으로 이어지게 된 것은 아닌지, 정치권과 법조인들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 봐야 한다. 형사사법 시스템은 정치 문제가 아닌 공동체 질서 수호의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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