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칼럼] 50인 미만 사업장 중대재해처벌법 유예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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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 준비 中企 1.2% 그쳐…범법자 양산·기업 도산 우려
정부, 안전장비 등 지원하고 의무사항 구체적 제시해야
허현도 중소기업중앙회 부산울산중소기업회장
“30년 무재해 사업장인데도 요즘 중대재해처벌법만 생각하면 잠이 안 옵니다. 아무리 충실히 준비한다 해도 사고는 일어나기 마련인데,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소규모 사업장 대표의 하소연이다. 이처럼 내년 1월 68만 곳 50인 미만 사업장의 중대재해처벌법 확대 적용을 앞두고 경기침체로 힘든 영세 중소기업인들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법을 적용할 사업장의 준비 상황이다. 최근 중소기업중앙회 조사에 따르면 50인 미만 사업장의 80.0%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에 준비하지 못 했다’고 답했다. 특히 ‘아무 준비도 못했다’는 곳은 29.7%에 달하고, ‘모든 준비를 마쳤다’는 기업은 1.2%에 불과했다. 중대재해처벌법상 의무를 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사업주가 1년 이상 징역 또는 10억 원 이하의 벌금 등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특히 소규모 사업장은 사업주 역할이 절대적이어서 구속되거나 징역형을 받아 부재 시 폐업 가능성이 높고 근로자도 일자리를 잃게 될 우려가 크다.

현장에서는 안전관리와 재해예방의 중요성과 법의 취지,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투자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지만 법 시행 이후 1년 8개월이 된 현재도 법의 내용과 적용 범위 등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형편이다. 소규모 사업장에서는 대부분 사업주가 제품 개발부터 영업까지 1인 다역을 소화하고 있어 자체적으로 대비하기에 어려움이 크기 때문이다. 턱없이 부족한 인력과 자원으로 안전관리 시스템도 제대로 구축하기 힘든 실정이다. 전문가의 힘을 빌리려 해도 쉽지 않다. 법 시행 이후 대기업, 공기업 등에서 안전관리자를 대거 채용하면서 중소기업까지 전문인력이 오지 않는다. 컨설팅 업체에 맡겨도 비용이 수천만 원이 든다.

더 큰 문제는 중대재해처벌법 의무사항이 구체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컨설팅 업체, 정부, 공단 등에서 지적하는 내용도 달라 어떻게 준비해야 할 지도 오락가락하는 실정이다. 현장의 혼란을 잠재우려면 시행령 개정을 통해 의무사항을 구체화해서 필요한 조치가 무엇인지, 실질적으로 지배·운영·관리하는 책임이 있는 경우는 어떤 사례인지, 안전·보건 관계 법령은 어떤 것인지 등 법률 전문가가 아닌 중소기업 현장에서도 쉽게 알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하게 제시해야 한다.

그렇다고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중대재해처벌법을 지키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다. 1인 다역을 수행하면서 시간을 쪼개 설명회도 참여하고 있으며, 정부 컨설팅도 받는 등 노력을 기울이는 사업주들이 많다. 사업장 내에서 중대재해가 발생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은 사업주도 마찬가지다. 소기업이라고 해서 중대재해 예방에 나서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사업주가 노력하면 준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 다음 법을 시행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정부는 산재 예방을 위해 지원을 확대해 중소기업이 안전 확보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난해 기업들이 산재를 입은 근로자 보상과 재해예방을 위해 납부한 산재보험료가 8조 3000억 원에 달했지만, 산재예방을 위해 기업에 지원된 금액은 1조 원 수준에 그쳤다. 현장에서는 중소기업 공동안전관리자 지원사업 신설, 안전투자혁신사업 상시화, 스마트 안전장비 보급 등 필요한 정부 지원들이 많다. 또 법령이나 제도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소규모 사업장에 의무교육 실시도 필요하다. 재해예방의 핵심은 경영자, 안전보건관리자, 현장관리자 등이 법령의 시행목적을 충분히 이해하고 산업재해에 대한 경각심을 갖는 데 있다. 그저 처벌받는 것이 두려워서 강제로 이끌려 가듯 수동적으로 준수하는 모습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지원과 준비가 법 시행 전인 4개월 안에 완료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오히려 준비를 포기해 버리는 기업들이 대거 나타날 수 있으며, 범법자 양산과 기업 도산으로 기업과 근로자 모두 피해를 보게 될 수 있다. 따라서 사후적으로 사업주를 처벌하는 것보다 실질적인 중대재해 예방에 나서는 것이 산재 감소에 효과적일 것이다.

필자는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중대재해처벌법 적용을 2년 이상 유예하고 전폭적인 지원과 관심으로 개별 중소기업 산재 예방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생각한다. 법을 준수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성급한 법 적용은 많은 중소기업을 폐업 위기로 내몰 뿐 산재 예방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솝 우화 ‘해님과 바람’에서도 나그네의 외투를 벗긴 것은 따뜻한 해님이었다. 무언가 변화시키고자 할 때는 필요성을 인식시키고 준비하는 것이 강압적인 처벌보다 효과적이다.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유예기간 부여를 통해 실질적 예방이 이뤄질 수 있도록 정부와 국회가 함께 나서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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