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본 비밀은 없다 토크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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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1. 15:13860 읽음

<각본 비밀은 없다> 발간 기념 토크
2017년 5월 12일 저녁 7시 30분 숨도 작은 강당
대담자: 이경미 감독, 송경원 평론가

*내용 중 일부가 각본 읽기와 영화 관람에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송경원 <씨네21>에서 이 영화에 대해 쓸 때 제목이 ‘이대로 보낼 순 없다’였어요. 2016년 베스트 영화를 꼽을 때 3위에 올라갔고, 개봉 시에 호불호가 많이 갈렸습니다. 극단적으로 지지하는 분도 많고 아쉬움을 표하는 분들도 많았죠. 저에게는 그래서 더 기억에 남았습니다. 영화를 보고 극장을 처음 나왔을 때 기자들끼리 이런저런 표현을 하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는 서로 10분 정도 커피만 마시고 있었어요. 뭐라 이야기를 하기 쉽지 않은 영화였어요. 이 영화는 사람들의 반응조차 재밌었습니다. ‘이야기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영화였고, 최근 한국 영화의 트렌드와 다르죠. 이 영화의 여러 반응에 대한 감독님 심경이 궁금합니다.

이경미 지금 비로소 뒤돌아보니, 그때 제가 정말 운이 너무 좋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영원히 묻히는 영화가 정말 많은데. 영화가 걸리고 일주일 만에 내려갔는데 지하철에서 사 든 <씨네21>에 ‘이대로 보낼 순 없다’는 말이 쓰여 있어서, 울었어요. 전철에서 눈물을 흘린 기억이 나요. 그때부터 인터뷰를 많이 했는데, 그렇게 보아주는 분들이 있어서 재조명되고 제 마음에 있는 말들도 이제 지쳐서 더 못할 정도로 다 했어요. 나중에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행복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 분명해요.

송경원 영화가 나왔을 때부터 이 각본집이 발간되기까지 모든 과정이, 달라요. 최근 한국 영화가 공장에서 찍어내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는데, 그 와중에 이 영화가 나왔다는 게 반갑기도 했고 기쁘기도 했습니다.

이경미 기억이 나는 게, 내부 시사회가 끝나고 영화 관계자들이 ‘이걸 어떡하지’, ‘어떻게 하려고 저러나…’ 표정으로 난감해 했어요.

송경원 일단 각본집 이야기를 하면, 보통 각본집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2000년도 초반 정도에야 시나리오 선집을 보곤 했는데, 그 이후로는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이런 형태의, 더욱이 완성된 영화를 글로 옮기는 각본집이 아니라 각본 자체를 책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이경미 유어마인드 대표가 각본집을 내자고 했을 때, 영화 완성본을 낼지 시나리오 자체로 냈으면 좋겠냐고 물어왔는데 제가 먼저 각본으로서의 완성본을 내자고 했어요. 물론 한편으로는 두려움도 있었어요. 제 주변의 감독들에게는 어떤 공포가 있는데, 어떤 분은 자신의 영화를 극장에서 끝까지 못 보는 사람도 있어요. 왜냐면 끝까지 끝까지 ‘정말 이것이 맞는 걸까’라고 생각하며 만들었기 때문에 그것이 내 손을 떠났을 때 다시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죠. 그 마음을 저도 잘 알아요. 이 영화는 특히 각본과 영화가 차이가 많은데, ‘그 차이에 대한 책임을 내가 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서 기록으로 남기는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영화를 즐기는 분들께 또 다른 재미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가 낫다 각본이 낫다 비판하는 것도 독자 입장에서는 재미가 될 테니까요.

송경원 인터뷰 때 ‘못다한 이야기들이 있고, 각본과 다른 부분들이 있다’고 했을 때 그 부분들이 궁금했는데 실제로 이 책을 보니 생각보다 많이 달라요. 이 각본의 발간 자체가 이 영화와 닮았어요. 제가 좋다고 판단되는 영화의 기준이 몇 있습니다. 보는 사람마다 각자의 잣대를 들이댈 수 있는, 텍스트가 두터운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그 측면에서 이 영화는 무척 좋은 영화입니다. 또 놀란 것은 현재 천편일률적으로 영화의 틀을 깎아가는 한국 영화의 시스템 상에서 이런 영화가 나온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생각했습니다. 이 책을 보았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무모한 일을 하시는 이유가.

이경미 그러니까요. 제가 좀 무모한 편이에요. 이 영화를 완성하는 동안 계속 공포에 휩싸였어요. 어떤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는지 제 눈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 영화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도박이라고 생각했어요. 만약 이 영화가 상업적으로도, 비평적으로도 실패하게 된다면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멈출 수 없었어요.

사운드 믹싱을 다 마쳤어요. 그런데 개봉일이 내년으로 늦춰진 거예요. 2015년 개봉에서 2016년 개봉으로. 늦춰져서 편집을 바꿨습니다. 개봉일이 늦어지면서 다시 보니, 고치고 싶은 게 또 생기죠. 영화 작업에서 사운드는 대부분 후반의 후반 작업이다 보니 많은 영화에서 가장 소홀하게 다뤄져요. 그런데 개봉일이 밀리면서 사운드에 대한 고민을 다시 했더니, 더 수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논문처럼 주석을 달아서 사운드 수정을 요청했어요. “사운드 작업을 왜 다시 하려는 겁니까”, “아니, 더 좋은 길이 있는 걸 알았는데 어떻게 포기합니까.” 그래서 믹싱을 다시 해서 최종본이 되었는데 저는 그때 제가 평생의 운을 다 썼다고 생각해요. 그 선택 하나로 지금처럼 영화를 좋게 봐주는 분들이 많이 생긴 것 같아요.

송경원 그와 관련해서 이 영화는 제작자들이 고생했겠구나, 감독이 정말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겠다는 지점이 느껴지는 영화라서 제작 과정이 궁금했습니다. 각본집을 보면서도 든 생각은, 실제로 이 각본이 나왔을 때가 촬영 ¼ 지점이었단 말이죠. 이후에 크게 바뀐 지점들을 짚어주신다면.

이경미 첫 번째로는 배우의 영향이 컸어요. 각본을 쓸 때는 손예진 씨가 캐스팅되기 전이었고 막상 그를 만나고 촬영 현장에 들어갔을 때 카메라를 통해서 본 예진 씨의 모습이 각본을 쓸 때 상상하지 못했던 매력이 있어서, 그 매력에 빠졌어요. 예진 씨가 <비밀은 없다> 전까지 보여준 적 없는 모습, 넋이 나간 모습이 신기하고 더 살리고 싶었어요. 그에 맞춰서 영화의 톤도 바꾸기 시작했죠.

또 하나는 제가 직관적으로 움직이는 편이라, 현장에서 배우들과 설정된 미술과 모든 것이 갖춰진 상태에서 새로운 그림이나 대사가 떠오르는 면이 있어요. 최근의 타이트한 현장에서 쓰기에 위험한 방식이긴 하지만, 각본은 각본대로 가지고 가되, 바뀌어가는 연홍에 맞춰서 이 영화의 톤을 다시 어떻게 맞출 것인가 생각하며 썼어요.

예를 들면 각본집보다 실제 영화는 훨씬 더 교차가 많고, 진실을 풀어주는 포인트가 달라요. 이것은 제가 편집을 하면서 이 영화는 연홍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 전체가 연홍의 멘탈과 같다’고 생각하면서 방향을 다시 잡았어요.

또 하나는, 각본집을 이 상태로 발간하게 된 이유와 맞물리는데, 이것을 어떻게든 기록으로 남겨서 나중에 제 영화가 막 흥행하고 막 사람들이 옛날 <비밀은 없다>를 다시 주목해줄 때를 위해 기록으로 남기자. 넣고 싶은데 뺀 씬들이 있어요. 부부 정사 씬. 미옥이가 종찬을 죽이는 씬. 그 편집본을 쓰지 못한 결과는 내부시사 결과 ‘너무 불친절하다,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진단이 내려져서 그 버전을 포기했어요. 그 버전이 지금보다 더 파워풀해요. DVD에 삭제된 씬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정사 씬은 악용될 우려가 있어서 DVD 수록도 하지 않았습니다.

송경원 삭제된 씬들은 여러 요소를 고려해서 어쩔 수 없이 뺀 것에 가깝나요.

이경미 어쩔 수 없이 뺐다기보다 ‘이 버전은 이 버전대로 저 버전은 저 버전대로 좋았다’고 말하는 것이 맞는데요. 엔딩의 미옥의 씬을 끝까지 고민하다가 뺀 이유는 영화가 끝났을 때 -저는 카타르시스를 느꼈는데- 이것이 연홍의 멘탈을 중심으로 편집되는 과정에 있다 보니 ‘이 엔딩이 연홍의 복수를 허무해지게 만든다’는 의견에 설득이 되었어요. 그때 제안되었던 건 ‘그렇다면 해외판은 죽는 것으로, 국내판은 이 버전으로 하자’ 서로 타협을 했지만 해외판이 끝내 만들어지지 못했죠.

송경원 지금 이 책, 그리고 이 행사까지 포함해서 저는 주요한 기록이라고 생각하는데, 지금 한국 영화계가 중요한 모멘텀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지금 영화 산업의 축이 이미 바뀌어버려서 방향을 바꾼다는 게 불가능한 지경이 되었어요. 그때 이 영화를 보고 그 축을 바꾸는 영화가 나왔다는 사실에 놀랐고, 이런 행사조차 그러한 움직임의 하나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 하나 각본과 영화가 사투리의 설정이 좀 다른데, 이유가 있나요.

이경미 가장 큰 것은 연홍의 사투리가 하나로 통일된 거예요. 사실 정말 예민하신 분들은 연홍이 중간에 아주 잠깐 경상도 사투리를 흉내 내는 걸 들을 수 있는데, 기본적으로는 서울말과 전라도 사투리만 들리게끔 했어요. 왜 그랬냐면, 예진 씨가 제안했어요. 경상도 사투리도 하고 전라도 사투리도 하고 서울말도 하면 너무 복잡해진다고 의견을 내었는데 제가 그걸 수긍한 이유는, 그렇게 하면 예진 씨의 전라도 사투리가 조금 더 임팩트 있게 들리기 때문이었어요. 더 강하게 필요한 지점에 툭툭- 나오게끔 한 거죠.

송경원 그 사투리가 어색하다, 연기하는 것이 보인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이경미 제가 이 영화에서 사투리를 너무 중요하게 생각해서, 연출부를 각 지역 출신으로 뽑았어요. 배우 오디션을 볼 때도 경상도 인물을 뽑을 때는 경상도 출신 연출부가 있고, 전라도 인물을 뽑을 때는 전라도 출신 연출부가 동석했고, 두세 번 반복해서 감수도 했어요.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관객은 저게 맞다고 하고, 어떤 관객은 틀리다고 해서 도저히 맞출 수가 없어요. 특히 미옥이 같은 경우에는, 그 배우가 대구에서 평생을 산 아이에요. 그런데 또 어떤 분들은 그 대구 사투리가 어색하다고 해요.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송경원 그 디테일이 집착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영화의 경우는 대부분 ‘뭐 이런 것까지 신경쓰지?’라는 점이 있습니다. 각본 상에는 정치와 무속에 관한 에피소드가 조금 더 비중이 있습니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요.

이경미 정치에 대한 부분은, 제가 찍으면서 재미를 못 느꼈어요. 확실히 촬영 시에 재미를 못 느끼는 부분은 편집 시에도 덜어지는 것 같아요. 이 영화에서 정치와 관련된 부분은 애초부터 맥거핀 장치로 쓰려고 작정을 했기 때문에 더 그랬어요. (영화 화면을 보며) 여기 한국당이라고 나오는데 지금 생겨버렸어요. 사람이 생각하는 게 비슷해요. 찾다가 ‘한국당’ 없어서 썼더니.

무속과 관련된 부분은, 각본 집필 시에 유독 반대가 많았어요. 불편해하는 의견이 많았는데 저는 이 불편함을 계속 넣어야 하겠고. (무속의 비중을 덜어내니) ‘그러면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불편하게 만들지’하는, 오히려 더 창의적인 방법을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그 방법이 저에게 음악과 사운드였어요.

송경원 방금 이야기하신 불편함과 낯섦이 이 영화를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인 것 같고, 이 영화에 호감을 느끼는 분들이 가지는 쾌감의 시작이죠. 이 영화는 힘을 주는 장면에서는 교차 편집이 심해지고 호흡이 굉장히 빨라집니다. 실제로 각본을 보면 아시겠지만 150씬이 넘습니다. 최근의 경향 중 하나는 2시간 영화가 70씬이 채 안 되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에 비하면 거의 2배가 넘는 씬 넘버가 많습니다. 이유가 있다면요.

이경미 제가 교차 편집을 좋아해서, 자주 씁니다. 그렇다 보니 각본부터 교차 편집을 미리 써요. 보통은 각본부터 텍스트를 교차해놓진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교차되는 횟수만큼 씬을 넘깁니다. 그래야 현장에서 오해가 없어요. 스탭들이 일할 때 서로 헷갈리는 일이 없어요. 반면 단점은 투자사와 제작사에 각본을 보낼 때 “왜 이렇게 씬 넘버가 많아요?” 이야기를 꼭 들어야 하는 거예요. 그걸 감당하는 것 하나 빼고는 괜찮아요.

송경원 각본의 문장은 감독님이 직접 다듬는 거죠?

이경미 제가 ‘이렇게까지 집착하니 일이 많지’하는 부분이, 각본을 읽으면서 이 대사의 호흡이 제 호흡과 맞아야 해요. 어느 날은 이 호흡이고 어느 날은 저 호흡일 때가 있잖아요, 그럼 그때마다 고쳐요. 이 부사를 여기에 넣는 게 좋은지 저기에 넣는 게 좋은지 그때 문장의 비율이 뭐가 좋은지 고민하고 있으니 시간이 더 필요해요. 이 책이 그렇게 쓰여졌어요. 저는 늘 그렇게 써요.

송경원 저는 이 시나리오를 보면서도 계속 감독님이 생각나는 거예요. 이를 테면, 민진을 묘사할 때 ‘아직 아이의 얼굴. 예쁘다’라고 쓴다거나. ‘사무국장, 멋쩍은 웃음. 잘생겼다’라든지. 문장 뒤에 간략하게 따라오는 예쁘다, 잘생겼다, 이런 부분이 평소 감독님 같았습니다.

이경미 사실 예쁘다 잘생겼다 주관적인 표현이잖아요. 그 예쁨을 설명하기 위해 머리칼이 어떻고 바람이 어떻고 문장을 소비하는 게 싫어요. 그렇게 정리하고 넘어가는 걸 좋아해요.

송경원 또 빠지게 된 장면들이 있을까요.

이경미 부검실 장면은, 아마 (보면) 의견이 분분할 것 같아요. 너무 잔인해서 뺐어요. 부검실 장면 찍을 때 신지훈 씨에게 미안했죠. 그때 고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자신이 죽은 모습을 스스로 알고 본다는 게 미안했어요. 배우가 의연하게 버텨주었죠.

송경원 알고 있는 배우든 신인배우든 못 보던 표정을 꺼낸다는 게 대단했습니다. 현장에서 연기를 이끌어내는 요령 같은 게 있을까요.

이경미 이번에 DVD가 나오면서 스스로 충격을 받았어요. 일단 현장에서 너무 불량하게 껌을 씹고 있고. 배우에게 의견을 물어볼 때 굉장히 친절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제가 너무 강하게 “오케이? 오케이?” 하고 있어서 충격 받았어요. 저는 잘 모르겠으니 (동석한) 신지훈 양에게 물어볼까요.

신지훈 촬영할 때는 감독님이 씬에 대해 가장 간절했겠지만 저 역시 그 장면을 최고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 했기 때문에 강압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던 것 같아요.

이경미 우리 지훈이가 꿈이 많아요. 말을 아끼네.

송경원 저희가 인터뷰를 하고 싶었는데 타이밍이 맞지 않아 못한 배우가 손선생을 맡았던 최유화 배우입니다.

이경미 최유화 배우는 이 영화를 하기 전에 단역으로 몆 군데 출연했어요. 이 역할은 신인을 캐스팅하고 싶었어요. 이 영화가 미스테리 스릴러잖아요. 간략한 내용을 이야기하면 “아빠가 범인이구나”라고 다 알아채요. 그래서 저는 시나리오 쓸 때부터 그것을 숨기는 장치를 만들어야 했어요. 처음 보는 얼굴이 많으면 사람들의 의심이 분산됩니다. 최유화 배우를 캐스팅을 한 이유는 오디션을 볼 때 자기가 미란다 커를 닮았다고 말하는데 그게 너무 기가 막혀서 잊혀지지 않는 거예요. ‘아, 이상한 사람이다’ 하면서 캐스팅했죠. 경상도 출신이 아니라 사투리를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할 수 있다는 위험성이 하나 있었고요. 너무 예쁜 사람이 초반에 등장하면 의심을 사기 쉬운데 이 배우가 실제로 보면 굉장히 미인이거든요, 아름다운 배우에요, 그래서 이 사람을 어떻게 예쁘지 않게 보일 것인가가 미션이었어요. 미란다 커 닮았다는 이야기에 그런 위험성을 안고 캐스팅했어요.

송경원 감독님이 장편 영화를 두 편 만드셨는데, 여성 캐릭터에 대한 접근방식이 궁금합니다.

이경미 <미쓰 홍당무>의 미숙, 그리고 <비밀은 없다>의 연홍도 있지만, <미쓰 홍당무>의 종희, 그리고 <비밀은 없다>의 미옥과 민진도 저에게는 모두 같은 맥락이에요. 다른 영화를 보면서 ‘이렇지 않아’라는 생각이 들 때, ‘내가 그렇게 만들어봐야지’라는 것이 저에게 여성 캐릭터를 만드는 동력이 돼요. 민진 미옥 같은 경우, 다른 영화에서 흔히 십 대를 다루는 방식들을 보면서 답답하다고 느껴왔어요. 내가 경험했던 십 대 시절과 내가 알고 있는 십 대에게는 영화들에서 이렇게 보여주는 면만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

<미쓰 홍당무>의 미숙 같은 경우는, 비호감 왕따 짝사랑 스토커 여자애가 어디까지 가는가-를 보여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에게 괜찮은 면이 있다는 걸 무척 말하고 싶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 제가 지나치게 미숙에게 경도되었어요. 각본을 쓸 때 그에게 이입이 되어야 대사가 써지니까, 그렇게 계속 쓰다 보니까 미숙처럼 말하고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사람들이 다 싫어하고, 밉상인 짓만 하고, 다른 영화에서는 조연의 조연으로만 쓰일 캐릭터들도 주인공으로 놓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재미있고 매력이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어요.

연홍 같은 경우는 한국의 남성들이 부담스러워하고 가까이하고 싶지 않아 하는 상이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고 지금 변하고 있기도 한데. 너무 드세지 않고 자기 주장을 펴지 않고 보호해주고 싶은 모습도 있고 다 드러내지 않고 숨기는 면이 있는 걸 신비로움으로 여기는 여성 캐릭터에 대해서 ‘그렇지 않고 자갈밭에 던져놔도 혼자 굴러갈 수 있는 사람도 있어’라는 걸 말하고 싶었어요. 손선생을 만나면서 새빨갛게 립스틱을 바른 장면이 있는데 개봉 직전까지 말을 많이 들었어요. ‘애가 없어졌는데 엄마가 빨간 립스틱을 바르는 건 비호감이다’라는 의견들. 보면 드레스도 등이 파여 있어요. 선생 만나러 왔는데 등이 다 보여요. 하지만 이런 심리를 아는 사람도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송경원 이것이 이 영화를 보면서 ‘다르다’, 혹은 ‘낯설다’고 느끼는 부분이죠. 저 장면의 모습이 있을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충분히 가능한 인물인데도 우리가 어색해하는 것은 대부분의 영화들에서 그렇게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야기 상의 공식이죠. 슬픔은 어떻게 표현한다, 어머니는 어떻게 표현한다, 이런 공식들을 따라가는 영화들이 공산품 영화들인 것이고. <비밀은 없다>는 전부 비껴나 있어요.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이것이 진짜일 수 있어요. 제가 재밌게 생각했던 것 중 하나는, 감독님이 여성을 그릴 때 늘 여성끼리 둘 혹은 세 인물을 엮어서 그리는 것 같아요. 여성 캐릭터를 이렇게 쌍을 짓는 이유가 있다면.

이경미 각본을 쓸 때는 인식하지 못했어요. 친구 작가가 ‘언니는 항상 성인 여성과 어린 여성을 화해시키는 것이 화두인가봐’하는데 정말 그런 거예요. <미쓰 홍당무>도 그렇고 <비밀은 없다>도 그렇고 주인공 여성이 외롭게 혼자 싸우는 게 공통점인데, 외로운 상황일 때 이 인물이 이 영화가 끝난 후에도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우리는 그렇게 계속 살아가니까- 희망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게 이야기를 만들 때 제가 최후까지 가져 가고 싶은 판타지인데요. 이 주인공 여성이 희망으로 가져갈 수 있는 판타지는 무엇일까, 어쩌면 이 여성이 자라면서 거쳤을 중간 상, 혹은 이 성인 여성이 어렸을 때 해보지 못해서 되고 싶은 어떤 것으로 연결시켜 떠올리더라고요.

송경원 영화의 중간까지는 ‘이게 뭐지’ 하면서 끌려간다면 마지막 대사로 인해서 모든 실이 꿰어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저는 엔딩과 친구의 입을 빌어서 듣는 딸의 마음 “지켜줘야 한다고”하는 마지막 대사가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인데, 감독님이 생각하는 중요한 장면이나 대사가 있다면.

이경미 개봉한 직후에 이런 말을 했다가 욕을 들었는데요, 저는 제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괜찮은 것이나 마음에 드는 것을 꼽으라는 질문이 어려워요, 좋아하는 장면과 대사가 많아서. <비밀은 없다>에서는 ‘생각하자, 생각하자’ 같은 경우 혼자 되뇌이고 주문을 거는, 제 일상 언어에요. ‘생각하자, 생각하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생각하자’라고 늘 말해요. 사람이 미쳤을 때와 정상일 때는 기름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항상 정신을 붙들지 않으면 여러 사람에게 폐를 끼친다고 생각하고요.

마지막 대사는, 각본 후반에 나왔고 우여곡절이 많아요. 저는 항상 각본을 쓰면서 ‘내가 쓰는 이것이 뭘까’ 하고 길을 찾는 편이에요. <비밀은 없다> 같은 경우 마지막 그 대사가 그 길을 찾는 등대 같은 역할이었는데, 제가 그 대사를 촬영할 때 뺐어요. “멍청하다고” 부분에서 끝냈어요, 지금 시나리오대로. 편집 중간에 편집 기사님이 제가 썼다 지운 대사를 자막으로 입혀놓은 거예요. 그걸 끝까지 고민했던 이유는, 그것이 제가 찾던 정수의 대사이지만 그걸 말하지 않고 전달하면 가장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녹음만 해놓고 끝까지 고민을 했어요. 그러다 마지막에 넣는 걸 택했어요.

송경원 오늘 찾아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면서 마지막으로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경미 아마 이게 공식적으로 <비밀은 없다> 관련된 마지막 시간인 것 같고 그래서 더 뜻깊었습니다. 이렇게까지 사랑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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