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유주현의 비욘드 스테이지

"관객도 배우도 울어버린 교감, 그 짜릿함에 뮤지컬 지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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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30. 10:073,185 읽음

[유주현의 비욘드 스테이지]
뮤지컬 ‘광화문 연가’ 김성수 음악감독
김성수 감독은 ‘23’이란 예명으로 영화·드라마·전시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사진 로빈]

뮤지컬은 음악으로 시작해 음악으로 끝난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연주에 대한 관객의 촉각은 통상 예민하지 않다. 그런데 이 사람에 관해서는 좀 다르다. 공연 시작 전 오케스트라 피트에 김성수(52) 음악감독이 잠시 얼굴을 드러내면, 관객은 열광한다. 온몸으로 ‘연주’의 존재감을 발산하는 그의 열정적인 지휘는 피트를 뚫어 버리고, 거기 휘어잡힌 3시간은 감동의 크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무대 체질이란 소리를 듣는데, 재미있어요. 제가 숫기가 없거든요. 뮤지컬 ‘광화문 연가’의 고선웅 작가도 그러더군요. 지휘할 때는 평소와 다른 인격이 되는 것 같다고.(웃음)”

김성수는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개인 콘서트가 매진될 만큼 자체 티켓파워를 가진 흔치 않은 ‘스타 음악감독’이다. 지난해 연말에도 예술의전당 콘서트가 6차례나 잡혀 있었지만, 코로나19 악화로 결국 취소됐다. 연주팀과 연탄 배달에 나서는 등 ‘봉사활동하는 지휘자’로 유명한 그는 개인 콘서트도 기부를 위해 한다고 했다.

군고구마 장사해 번 돈으로 음악 유학
뮤지컬 ‘광화문 연가’. [사진 CJENM]

“2017년 첫 콘서트가 너무 좋았거든요. 그당시 개막 직전 취소됐던 뮤지컬 ‘록키’의 배우들을 무대에 올려 일당을 줄 수 있었고, 게스트들도 공연 수익 기부에 동참해서 뿌듯했죠. 창작자로서 보여주고 싶은 욕심도 있지만, 뮤지컬계가 대중에게 받기만 했지 다시 갚는 것에 인색하지 않나 싶어서 하는 일이에요. 정말 하고 싶은 건 ‘위 아 더 월드’ 같은 대형 콘서트인데, 장기적으로 공연을 봐주는 분들에게 갚아가고 싶은 원대한 꿈이죠. 내년쯤 다시 도모할 겁니다.”

사실 그는 1990년대 미국 유학 후 ‘사운드 수퍼바이저’로 두각을 나타내며 이적·김동률·정재일 등과 함께 활동한 대중음악 프로듀서 출신이다. 뮤지컬에 본격적으로 투신한 건 2015년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부터다.

“전에도 뮤지컬 작업을 간혹 했는데, 좀 얄팍하다고 생각돼 끌리지 않았어요. 그런데 정재일씨 부탁으로 ‘지저스’ 지휘를 하며 무대와 관객 사이에서 통역하고 있다는 ‘현장성’에 매료돼버렸죠. 마이클 리의 마지막 공연 날이었는데, (조용하게 끝나는) 엔딩씬에 원래 박수가 안 나와야 정상이거든요. 그런데 제가 좀 기다리니까 기립 박수가 터지더니 10분 정도 멈추지 않는 거예요. 왠지 뭔가 나올 것 같아서 가지 않았을 뿐인데, 관객도 배우도 울어버린 ‘교감’이 제 손끝에서 시작됐다는 느낌이 짜릿하더군요.”

7년째 오케스트라 피트를 지키고 있지만 그에게 ‘뮤지컬 음악감독’이라는 타이틀은 한참 모자라다. ‘23’이라는 예명으로 영화·연극·드라마·전시 등 폭넓은 영역의 음악을 작곡부터 편곡, 믹싱, 음향까지 두루 책임지고 있다. 대극장 뮤지컬 같은 상업 프로덕션은 생계수단일 뿐, 그는 창작에 목마른 ‘예술가’에 가깝다. 스스로 꼽는 대표작도 ‘?A빠이 이상’ ‘베르나르다 알바’같은 매니어틱한 소극장 뮤지컬이다. 지난해 대구예술발전소가 기획한 ‘글리치&비주얼아트 팬데믹’전도 빼놓을 수 없다.

“화가 10명이 팬데믹을 주제 삼은 작품들을 내놨는데, 작품마다 음악을 들으면서 보는 이머시브 전시라 총 60곡을 작곡했어요. 방 하나에 10개의 작품이 전시되는데, 작품별로 다른 음악이 흐르니 개별 곡들이 독립되면서도 심포니처럼 하나의 곡이 되도록 만든 작업이었죠. 앰비언트, 글리치, 현대음악까지 모든 장르를 동원했는데, 그런 실험적인 작업이 재미있어요. 하고 싶은 게 많아서 도장깨기 하듯 도전하고 있습니다.”

신중현

음악만 하는 것도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연극 ‘타이터스 안드로니커스’의 각색 및 연출을 맡았을 정도로 드라마 자체에 대한 애정도 크다. 알고 보니 영문학을 전공했고 음악은 거의 독학으로 마스터했단다. “부모님이 음악을 못하게 하셨거든요. 누나가 다니던 피아노 학원에 몰래 찾아가 1주일 동안 렛슨을 받았는데, 선생님이 ‘얘는 천재’라고 하는데도 외면하셨죠. 음대를 보내달라고 하니 12만원짜리 기타 한 대 사주시더군요.(웃음) 대학 때 군고구마 장사를 해서 돈 모아 유학을 갔는데, 학교는 잘 안 나가고 지휘·편곡 같은 것들만 개인 렛슨을 받으러 다녔죠. 결국 지금 필요한 것들을 배운 셈이네요.”

지금 공연 중인 ‘광화문 연가’는 고 이영훈 작곡가의 곡들로 엮은 주크박스 뮤지컬이다. 워낙 국민가요들이라 편곡이 까다롭지 않았을까. “주크박스는 두 가지 접근법이 있어요. 이야기가 노래를 그대로 품느냐, 아니면 노래를 이야기에 녹여 변형시키느냐죠. ‘광화문 연가’는 원곡 재료를 살리는데 집중해달라는 주문이라 심플했어요. 가장 신경 쓴 건 대극장에 맞는 오케스트레이션 포맷이었죠. 유명한 곡은 아니지만 이영훈 작곡가가 러시아까지 오가면서 공들여 녹음했다는 연주 앨범 중에 골라서 1, 2막 서곡을 만들었는데, 다행히 이영훈 재단 측에서도 만족하시더군요.”

이문세, 편곡된 ‘옛사랑’ 훔쳐가고 싶다 해
서태지

노래방에서 곧잘 부르는 곡들이라고 만만한 건 아니다. 대가수 이문세가 불렀던 노래들은 뮤지컬 스타일로 소화하기 어렵다. “뮤지컬에서 절대적인 가창력이 중요한 건 아니거든요. 노래 한 곡 끝내주게 부르는 게 오히려 흐름에 방해가 될 때도 있어요. 특히 ‘광화문 연가’는 누구를 설득하려는 듯한 뮤지컬 창법이 아니라 팝적으로 자연스럽게 불러야 하니까요. 주인공을 나눠 맡은 윤도현·엄기준·강필석이 가창력도 제각각이고 매력도 다 다른데, 노래와 연기 등 여러 능력치가 합쳐져서 각자 나름의 종합선물세트가 된 것 같아요.”

대중음악계에서 가요 편곡의 내공을 쌓은 그는 주크박스 뮤지컬 ‘섭외 0순위’다. 록의 대부 신중현의 곡들로 만든 ‘미인’이 공연을 앞두고 있고, 2016년 서태지의 곡들로 만든 ‘페스트’도 직접 각색해 내후년 공연 예정이다.

“‘광화문 연가’는 이문세님이 와서 보시고 ‘옛사랑’ 편곡을 훔쳐가고 싶다고 해주셔서 힘이 났던 기억이 있어요. ‘페스트’도 모든 사람이 가장 걱정한 게 편곡이었는데, 자랑같지만 서태지님이 새 프로덕션의 대본 각색까지 제게 맡기더군요. 신중현 선생님은 전혀 생각 못 한 방식으로 편곡된 것이 즐겁다고 하셨구요. 원작자를 예상 못 한 방식으로 만족시켜야 하고, 처음엔 리스펙트로 시작하지만 나중엔 그걸 버려야 제대로 편곡할 수 있다 생각하는데, 대부분 잘 받아주셔서 제가 아직 살아남은 것 같아요.(웃음)”

이문세

셰익스피어를 좋아하고, 그 위대함이 소네트에 있다면서 웬만한 연극 연출가보다 깊은 사랑과 이해를 드러내며 삼천포로 빠지는 그를 보고 있자니 ‘예술가의 수다란 이런 걸까’ 싶다. ‘찐 예술가’라면 대극장 뮤지컬 같은 상업 프로덕션에도 자기 지문을 남기고 있을 터.

“드라마 자체에 대한 관심이 아니면 제가 뮤지컬을 할 이유가 없거든요. 피트 안에서도 극에 몰입하고 있고, 편곡할 때도 좋아하는 영화에서 영감을 얻어요. ‘광화문 연가’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를 떠올리며 작업했죠. 소위 작가주의 영화를 심리적 레퍼런스 삼는달까. 그런 지적 허영심과 솔직함 사이 어딘가, 제 지문이 있을 것 같네요.”

유주현 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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