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모이’ 학자·이준 열사 아들…남북 모두 외면한 임정 인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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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04.11. 오전 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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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100돌] 분단의 탁류 휩쓸린 독립운동가



역사의 탁류는 인간의 삶을 뒤흔든다. 탁류 안에서 누군가는 혼탁한 구정물에 몸을 맡긴 채 물길이 안내하는 곳으로 흘러간다. 누군가는 돛을 붙들고 노를 저으며 물길과 맞서다 끝내 자신이 가고자 하지 않았던 길로 나선다. 작고 힘없는 나라에서 벌어진 동족상잔과 분단의 역사는 그 갈림길을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의열단장으로 활약하고, 광복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환국했던 약산 김원봉의 독립유공자 인정을 둘러싼 논란은 광복 74년이 지났어도 한국 사회가 아직 그 탁류 안에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남과 북, 어디서도 기억되지 못한 채 탁류에 갇힌 독립운동가는 약산만이 아니다.

한글학자로서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했다가 해방 뒤 북한으로 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까지 오른 김두봉이 1955년 한 관개시설 준공식장에서 러시아 군인과 악수를 하고 있다. 러시아 보유 북한 관련 영상기록 일부. <한겨레> 자료사진


■ <말모이>의 지식인 ‘김두봉’ “그는 한인학교 어린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주야로 침식을 저버리고 육영의 길에 몰두했던 한글학자요 역사학자였다. 한마디로 골샌님이었다.” 1889년 경남 동래군 기장읍의 한 농가에서 태어난 백연 김두봉에 대한 지난 시대의 회고들은 엇비슷하다. 여섯살에 동학혁명을 겪고, 스무살에 나라가 망하는 꼴을 보았으므로 성장하는 내내 가슴속에 뜨거운 것이 들끓었을 테지만 김두봉의 원형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럿의 회고대로 “그는 천성이 학자”였다.

시절이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현대 한글의 아버지 한힌샘 주시경의 수석 제자로 조선어사전 <말모이> 편찬작업에 참여하고 한글 연구와 교육에 몰두했던 백연은 1919년 3·1운동 뒤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내고 <독립신문>을 편찬했다. 그 시절마저도 백연은 괄괄한 독립투사라기보단 ‘이마에 내천(川)자를 그린 채 쭈그리고 앉아 한글 낱말을 들여다보며 말을 다듬던 학자’로 기억된다. 백범 김구의 부인 최준례가 숨진 뒤 그 비석에 ‘ㄹㄴㄴㄴ해 ㄷ달 ㅊㅈ날 남(단기 4222년 3월19일) 대한민국 ㅂ해 ㄱ달 죽음(대한민국 6년 1월) 최준례 묻엄(무덤) 남편 김구 세움’이라고 새긴 이도 백연이다. 그런 그가 나중에 ‘태항산 호랑이’로 불리며 의용군을 이끌게 될 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던 때였다.

백연은 1942년 김원봉 등 좌파 민족혁명당 인사들이 충칭에서 우파 한국독립당과 좌우연합 의회를 꾸리자 충칭을 떠나 중국공산당 팔로군과 연계한 항일투쟁에 나섰다. 그리고 1945년 8월 화북조선독립동맹의 주석 신분으로 해방을 맞았다. 북한정권 수립에 기여한 백연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등 고위직을 맡았지만 김일성 1인 지배체제를 비판하다 1958년 ‘반당종파분자’로 지목되어 숙청당했다. 약산과 마찬가지로 백연도 북한 혁명열사릉이나 애국열사릉 어디에도 묻히지 못했다. 다만 북한이 여전히 한글전용 원칙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김두봉의 유산으로 짐작된다.

‘말모이 학자’ 김두봉
1919년 상하이 망명
임시정부서 독립신문 편찬
1942년 충칭 떠나 ‘무력투쟁’
해방 뒤 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일성 비판하다 1958년 숙청


‘이준 열사의 아들’ 이용
아버지 순국 3년 뒤 간도로
독립군 연해주 사령관
청산리·봉오동전투 참여
북에서 숙청설 제기되지만
애국열사릉 묻혀 논란


‘광주학생운동 주역’ 장재성
1929년 시위 주도 4년형
남한 단독정부 반대하고
북 공산당대표자회의 참석했다고
7년형 복역중 6·25 발발 처형
5·16 뒤 서훈도 취소


‘헤이그특사 사건’ 이준 열사의 아들로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군 동로군 사령관을 지낸 이용(이명 이종승). 1931년 11월 이용은 간도에서 공산당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된다. 사진은 당시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


■ 이준 열사의 아들, 독립군 사령관 ‘이용’ 대한민국임시정부 소속 최초 독립군 동로군(연해주) 사령관이었던 이용(이명 이종승)은 그 삶조차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의 아버지를 모르는 이는 별로 없다. 아버지 이준 열사는 고종의 밀사로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갔다가 비분강개하여 순국했다. 이용은 그 3년 뒤인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조선을 떠나 간도로 갔다.

뛰어난 군사지휘 능력을 갖춘 걸로 평가받았던 이용은 줄곧 군인으로 활약했다. 김좌진이나 홍범도에 견줄 법하다.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출범한 뒤인 1920년 연해주 지역 독립군 사령관으로 임명됐고 그해 10월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에도 참여했다. 1922년엔 고려혁명군이 조직되자 러시아 지역을 맡는 북부사령관에 임명됐다. 러시아가 영토 내 한인 독립군의 해산과 무장해제를 강제한 뒤엔 무대를 만주로 옮겨 북만주사관학교에서 군인 양성을 이어갔다.

1945년 8월까지의 활동을 고려하면 그는 명실상부한 독립유공자지만 월북한 탓에 휴전선 이남에선 철저하게 잊혔다. 이용의 광복 전후 행적에 대해서도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함남 북청 출신인 그는 광복 뒤 북한에 터를 잡고 첫 내각에서 도시경영상(장관)·사법상 등을 지냈다. 하지만 고향인 북한으로 돌아가기 전 해방공간에서는 좌우합작을 지향하는 중도 성향의 신진당 간부로 활동했다. 1954년 숨진 데 대해서도 중국 쪽 자료를 근거로 한 ‘숙청설’도 제기되지만 그가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힌 탓에 설왕설래에 그치고 있다. 부자가 모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삶을 바쳤음에도 아버지 이준은 열사로, 아들 이용은 무명의 군인으로 기억되는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다.

장재성
■ 월북인사도 아니건만 기억되지 못한 이들 김원봉이나 김두봉처럼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하지 않았지만 사회주의 운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이들도 있다. 월북하지 않은 이들은 남쪽에서 죽음을 맞아야 했다.

11월3일을 ‘학생의날’로 기념하게 된 배경인 광주학생운동(1929년) 주역 장재성은 시위를 주도하고 징역 4년형을 받았다. 4·19혁명 뒤 민주당 정부가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했지만 5·16 군사쿠데타 뒤 서훈은 취소됐다. 그의 공산당 활동 때문이었다. 남한의 단독정부를 반대한 그는 1948년 북한의 공산당 대표자회의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6·25가 발발하자 좌익사범으로 처형당했다.
이관술


광복 직후 여론조사에서 여운형, 이승만, 김구, 박헌영과 함께 가장 뛰어난 정치 지도자 5명 중 1명으로 꼽혔으나 지금은 기억하는 이 없는 이관술도 한국전쟁과 더불어 학살됐다. 동덕여고보 교사였던 이관술은 일제강점기 노동자와 학생을 조직해 일본의 제국주의를 공격하는 데 삶을 바쳤다. 수배를 당하면 농부로 위장해 살면서 가까이에 있는 이들을 조직했다. 그의 삶이 더욱 위태로워진 건 광복 뒤였다. 1946년 이관술은 조선공산당의 재정부장을 맡았다가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으로 무기징역을 받게 된다. 정판사 위폐사건은 조선공산당 인사들이 남한경제 교란을 위해 정판사라는 인쇄소에서 위조지폐를 찍어내 유통해 실형을 받은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이관술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5천여명의 정치범과 함께 대전의 한 골짜기에서 총살됐다. 하지만 정작 정판사에서 인쇄했다는 위폐는 단 한 장도 존재하지 않은 걸로 확인됐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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