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 19% 오를 때 집값 149%↑… 사라진 건 노동의 가치 [이슈&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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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격차 때문에, 체면 때문에

2012년 이후 10년간 직장인 실질임금 총액은 불과 19% 느는 데 그쳤다. 이 기간 서울 아파트 평균 매매가격은 148% 올랐다. 평범한 직장인이 성실히 저축한 임금으로 ‘내 집 마련’을 하긴 점점 어려워진 최근 10년이었음은 분명하다. 근로소득은 무력해지고 자산의 격차는 확대되는 사이 사람들 틈에서 중요해진 것은 부동산 시장의 영리한 진입 시기였다. 부동산값 폭등의 주범으로 몰린 ‘영끌족’이 몰락한 후에도 주택시장 불평등은 진행 중이다.

한국에서 유난한 가상자산 투자 열풍과 ‘명품’ 등 현시적(눈에 드러나는) 소비 경향은 결국 집값 격차라는 거대한 현실과 관련돼 있다. 가상자산이 도박·투기라면서도 투자를 멈추지 않는 이들은 “임금 저축으로 뚜렷한 미래를 그릴 수 없다”는 현실을 큰 명분으로 삼고 있다. 전통적인 부자가 아닌 이들이 수입차와 명품을 사들이는 모습에, 관련 업계는 “미래의 집을 포기하고 현재의 다른 소비를 늘렸다”고 풀이하며 판촉을 강화하고 있다.


25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월평균 실질임금은 2012년 275만2000원에서 지난해 327만4000원으로 10년 사이 18.96% 증가했다. 같은 기간 서울 아파트 평균 매매가격(KB부동산 기준)은 5억780만원에서 12억6420만원으로 148.95% 올랐다.


소득과 주택 가격의 상승 폭 차이는 KB부동산이 집계하는 PIR(소득 대비 집값 비율)지수에서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PIR지수는 모든 소득 분위와 주택가격 분위를 대상으로 조사되지만, 일반적으로 소득 3분위 가구가 중위가격(가격 3분위) 주택을 구매할 때를 기준으로 한다. 2012년 12월 PIR은 9.5배였다. 소득을 모아 내 집을 마련하기까지 9.5년이 걸린다는 의미다. 이 수치는 2022년 11.9배로 늘었다. 그나마 집값이 한창 뛰었던 2021년 12월에 19.9배까지 치솟았다가 내려온 수치다.

유주택자와 무주택자의 전체 자산 격차도 커진 것으로 확인된다. 아파트는 한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자산인데, 주택이 감가상각 대상이 되는 국가들과 달리 한국의 아파트는 건축 연한이 일정 기간 지나면 ‘재건축 프리미엄’이 붙는다. 진장익 중앙대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는 “특히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주택 자체를 자산으로 여기는 경향이 굉장히 높은데 실거주 위주의 정책을 펴는 건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노동시장에서의 무력감은 사실상 투기인 투자열풍을 부르고, 불로소득을 쫓는 열풍 틈의 일부 성공담은 다시 노동시장의 무력감으로 순환되고 있다. 경기 부천 지역에서 노동 문제를 상담하는 이동철 한국노총 중앙법률원 부천상담소 상담실장은 “100인 미만 사업장에선 임금이 최저임금에 연동돼 오르는 상황에 대한 상실감이 크다”고 말했다. 그에게는 “주식 투자가 어그러져 직장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는 사연도 접수되고 있다.

과거에는 그나마 노동자들의 해외 파견 등 노력이 뒷받침되면 큰 소득이 가능한 환경이었다는 말마저 나온다. 부천 지역 노동자들은 박봉에도 사교육에 열을 올리는 경우가 많았다. 열악한 노동자 지위를 자식에게 물려주기 싫어서라고 했다. 이 실장은 “임금을 현실적으로 올리고, 교육 등 필수적인 부분은 사회적으로 보장하는 부분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집값에 도전하기 어려워졌다는 판단하에 늘어난 경제활동의 모습은 때로 지속 불가능한 것들이다. 이른바 ‘명품족’ 일부는 현재의 소득으로 주택 등 정작 중요한 것을 소비할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있다. 백화점업계와 명품 브랜드 업체들은 “청년층이 새로운 고객이 됐다”고 입을 모으지만, 법률구조공단에 상담을 요청하고 법원에 개인회생을 청하는 청년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영혼까지’ 끌어모은 대출로 자산에 투자하는 이들은 때로 더욱 큰 부담에 직면한다. 주택 거래가 막히고 금리가 반전되며 더 큰 부담을 짊어진 ‘하우스 푸어’가 급증했다. 실체를 말하기 어려운 가상자산에 건 운명은 더욱 위태로운 것으로 평가받는다.

결국 국민일보가 보도해온 현시적 소비의 증가, 위험자산 투자의 증가는 모두 집값과 떼어 설명할 수 없는 것이며, 이 반대쪽에는 노동의 가치가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은 청년이 집값 상승에 따라 일의 가치를 포함한 생각과 느낌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확인하는 ‘일의 가치 변화와 고용정책의 미래’ 보고서를 최근 펴냈다. 확인된 청년층의 변화는 우울감과 회의감 등 부정적 감정 증가, 현재를 위한 소비의 증가, 주식과 가상자산, 복권 구매의 시작 등이었다. 심층면접에 응한 한 청년은 “‘오늘만 살아야지’ ‘돈을 모아서 뭐해’ 주의가 많아졌다”고 했다. 또 다른 청년은 “지금부터 정규직으로 일해도 집 하나도 못 산다”며 “딱히 돈을 모으지 않는다”고 했다.

노동연구원은 “집값 상승이 일이 중요하다는 가치에 급진적 변화는 일으키지 않은 듯하다”면서도 “일부 청년에게는 일이 열심히 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을 들게 한다”고 설명했다. 이 흐름은 청년층의 결혼·출산 관련 불확실성 증가, 부모로부터의 경제적 독립 연기 등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노동연구원의 결론이었다. 경제 전문가들은 “성실히 일해 노동의 대가를 저축하는 일이 허망한 일이 아니라고 여기는 사회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공통적으로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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