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열사 묘역 위치도 '아리송'…국가가 관리 나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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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2.08.15. 오후 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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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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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77주년을 맞은 광복절 뉴스 전해드리고 있습니다. 혹시 유관순 열사의 묘소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광복을 맞기 전에 순국한 유관순 열사의 묘역에 대해서는 그 위치를 정확히 말할 수 없는 상황인데요. 국가가 나서서 열사를 기릴 장소를 관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임상범 기자의 보도입니다.

<기자>

경기도 구리시와 서울 중랑구 경계에 있는 망우역사문화공원.

1973년 폐장할 때까지 서울 관내 최대 규모의 공동묘지였던 곳입니다.

수천 기 묘들 가운데 한용운, 오세창, 방정환 등 독립운동가들의 묘역도 보입니다.

모두 국가등록문화재로, 국가 예산으로 관리되고 있습니다.

그 한 켠에 유관순 열사의 흔적이 있습니다.

3·1 만세운동을 주동한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던 그는 옥중에서 수감자들과 함께 만세를 불렀고 모진 고문 끝에 1920년 9월, 열여덟 꽃다운 나이에 순국했습니다.

모교 이화학당에서 장례를 치르고 열사가 묻힌 곳은 이태원 공동묘지.

하지만 일제는 묘의 정확한 위치를 철저히 비밀에 부쳤습니다.

이후1930년대 들어 도심 재개발을 이유로 이태원 공동묘지가 망우리로 옮겨졌습니다.

그런데 일제가 이 과정에서 유관순 열사의 유골을 무연고자 유골과 뒤섞어 버렸습니다.

[한철수/향토사학자·작가 : 일제는 철저하게 자기들이 한 잘못 또는 실수에 대해서 남들이 아는 것을 두려워했겠죠. (그래서) 무연고 무덤에 포함을 시켜서 2만 8천 기에 같이 섞어서 아마 여기로 모시지 않았나.]

무덤은 있으되, 유골은 찾을 수 없는 상황이 된 겁니다.

유관순의 무덤이 맞느냐 아니냐 따져보자는 시도도 있었지만, 번번이 흐지부지됐습니다.

관할 지자체나 기념사업회, 문화재청 누가 하나 적극 나서지 않다 보니 국가등록문화재로도 지정되지 못했습니다.

[문화재청 관계자 : 그 무덤의 주인공의 후손이 이제 문화재로 해달라고 신청을 해야 되는 상황이고, 저희가 강제로 지정을 하거나 행정명령처럼 이렇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어린 학생이자, 여성이었고 후사도 없이 떠난 유관순은 그 평가나 기림에 있어 약자의 위치였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서훈도 3·1운동 100년만인 2019년에야 1등급으로 승격됐습니다.

순국 100년이 넘어 기억 밖으로 사라진 열사의 누운 자리, 이제 국가가 나서 챙길 때입니다.

(영상취재 : 신동환, 영상편집 : 이기은, CG : 성재은)

기자 프로필

국제부 임상범 기자는 2000년 SBS 공채로 입사했습니다. 사회부 사건팀과 기획취재팀, 정치부 등을 거친 임 기자는 2004년에는 국가 홍보 전략의 문제점을 지적한 '세계 교과서 속의 한국'을 심도깊게 취재해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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