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이코노미스트] 반도체 보조금 전쟁의 승자와 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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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 반도체 기업 보조금주면
사회후생 지출은 감소하지만
미래 경제와 산업혁신 위해
천문학적 자금지원 경쟁
韓만 참여 안하면 최악 선택




죄수들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란 여러 플레이어가 무엇인가를 각자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상호 신뢰에 따른 공동의 이익을 선택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서로 믿음을 확인할 수 있는 정보 교환이 불가능하거나 플레이어들 간 반복적인 선택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결국에는 각자 자신만의 이익을 위한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죄수들의 딜레마는 경제학, 정치학, 외교학 등 여러 분야에서 발전돼온 이론으로 개인이나 집단 혹은 국가의 의사 선택 기본 원리 중 하나로 잘 알려져 있다. 몇 가지 잘 알려진 사례를 들어보자.

우선,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의 핵 군비 경쟁이다. 두 국가가 동시에 핵 감축을 하는 것이 모두에 좋으나, 실제로는 양 국가가 핵 비축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 또 다른 예는, 흔히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정치인들의 상호 비방전이다. 선거에서 경쟁하는 정치인들이 서로 비방을 하지 않는 것이 모두에게 좋으나 상대방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선거가 흙탕물이 된다.

현재 세계 반도체 산업 정책을 보면 우리는 죄수들의 딜레마 상황에 처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 유럽, 일본 등 주요 선진 국가들은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에 대한 초거대 규모의 보조금을 지급하는 정책을 동시에 취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아직 이러한 정책을 계획하고 있지 않다. 이는 마치 소련이 핵 비축을 선택할 시 미국은 핵을 감축한 것에 비유할 수 있고, 상대 정치인이 비방전으로 나올 때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요컨대 세계는 현재 '반도체 보조금 전쟁' 상황이며, 우리는 현 상황을 죄수들의 딜레마 이론 관점으로 심각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주요 국가들이 이러한 초거대 규모의 반도체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은 사실 공동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정책은 아니다. 각 국가의 재정은 주로 인프라스트럭처 구축, 도로, 철도, 항만, 국방비, 공공재 및 공공서비스 등 국민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지출을 하도록 계획돼 있다. 이러한 예산의 일부를 특정 기업에 몰아주는 것은 그 기업에는 이익이 되지만 주어진 재정 수준에서는 공공지출이 감소해 국민의 경제적 후생 손실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반도체 산업이라는 특성을 잘 생각해보면 각 국가의 선택은 좀 더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어떤 이는 반도체를 쌀에 비유하기도 한다. 과연 그러하다. 그런데 문제는 쌀과 달리 반도체를 잘 만들 수 있는 기업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자본이 많다고 반도체를 금방 만들어낼 수 없고, 축적된 반도체 기술 수준이 높지 않으면 제품 불량률이 높거나 부가가치가 높은 부품이 될 수 없다.

왜 일본 정부가 TSMC라는 하나의 기업을 자국에 유치하기 위해 10조7000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을까? 왜 유럽연합(EU)은 기업의 반도체 연구 지원에 11조2000억원이라는 보조금 지급 계획을 세웠을까? 왜 미국은 삼성에 9조원, 마이크론에 8조원 등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기업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했을까? 이는 현재의 사회 후생 감소를 초래하더라도 미래의 경제 성장과 산업 기술 혁신을 위해 기업들에 대한 직접적인 보조금 지급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과연 세계 반도체 보조금 전쟁에 뛰어들 수 있을까? 반도체 기업 보조금 정책에 대해 우리 정부 내에서 아마 찬반 논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민들도 이 정책에 대해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수들의 딜레마 이론이 말해주듯이, 한국이 보조금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비합리적이며 차선도 아닌 최악의 선택이 될 것이다.

[허정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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