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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퇴직 후 바로 어학연수를 떠난 의대 교수 김원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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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2021.12.03. 10:133,490 읽음

“코로나19 팬데믹은
진짜 내 모습을 찾는 기회가 됐다”

70년 가까이 살면서 단 한 번도 ‘모범적인’ 삶의 궤도에서 벗어난 적 없었다.
그런 김원곤 교수가 2019년 정년퇴직을 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스페인어를 공부하기 위해
페루로 어학연수를 떠난 것이다. 그것도 코로나19 팬데믹이 막 시작된 시점에.


5년 전, <50代에 시작한 4개 외국어 도전기> 출간 인터뷰 때 만난 김원곤 교수는 그야말로 점잖은 대학병원 의사였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만난 그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야수 같은 에너지를 내뿜었고, <삼국지> 속 관우가 떠오르는 긴 수염, 평생 함께한 운동이 빚어낸 탄탄한 어깨와 가슴 근육은 40대 중반인 에디터보다 활력이 넘쳐 보였다. 김 교수는 “스페인과 프랑스 어학연수 기간 동안 40~50세 어린 친구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저절로 젊어진 것 같다”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군자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는 표현이 있지만 이 정도면 차라리 ‘환골탈태(換骨奪胎)’가 맞는 표현일 듯하다. 영어를 제외한 4개 국어 자격 취득에 그치지 않고 어학연수까지 떠난 그의 용기는 어디서 나온 걸까? 그것도 엄중한 코로나19 시국에 말이다. 그를 직접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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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 중년의 4개 외국어 도전기

저자 김원곤

출판 덴스토리

발매 2015.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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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김원곤 •1954년생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 •흉부외과 전문의. 심혈관 수술의 권위자이자 50대에 근육질 몸매를 만들어 화보를 찍고, 4개 국어 자격증을 취득한 자기 관리의 모범 답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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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페루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저자 김원곤

출판 덴스토리(Denstory)

발매 2021.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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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퇴직 후 바로 어학연수를 떠난 것인가?
아내가 권했다. 20년 가까이 외국어를 공부해왔는데, 기왕이면 현장 연수를 통해 제대로 실력을 닦는 게 어떻겠냐고 하더라. 그러면서 “평생 학교, 병원, 집만 오가며 모범적인 가장으로 살아온 세월에 대한 선물”이라고 했다. 말만 하면 실행하기 어려울 것 같아 아예 퇴임식 때 퇴임사를 빌려 공개적으로 어학연수를 천명하고 못을 박아버렸다.(웃음)

솔직히 코로나19 시국임에도 과감히 떠났다는 게 가장 놀라웠다
사실 페루 연수 계획은 팬데믹 상황 이전에 다 계획되어 있었다. 내가 출국하는 시점이 애매하게 팬데믹 상황으로 넘어가는 시기였던 것뿐이다. 2019년 3월 2일에 출국했는데, 당시만 해도 남미는 코로나19 청정 지대였다. 오히려 주변에서 “코로나19 위험이 없는 곳으로 가서 좋겠다”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물론 가자마자 상황이 돌변했지만.

당시 페루 상황이 어떻게 달라졌나?
에콰도르를 들러 페루의 수도 리마에 도착한 날이 3월 8일이다. 그때는 확진자가 몇 명 생겼다는 뉴스가 떴을 뿐이었는데, 일주일이 지난 3월 15일에 확진자 71명이 발생했다는 뉴스와 함께 확산 방지를 위해 페루 전국에 비상사태가 선포됐다.
그때부터는 다들 아는 대로 모든 일상이 멈췄다. 당연히대면 수업도 금지됐다. 어학원은 급하게 ‘스카이프’ 앱을 이용한 비대면 수업을 편성해줬다.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일대일 수업을 들을 상황이었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물론 컴맹에 가까운 나를 위해 어학원 선생과 직원들이 노트북을 세팅하고 앱 사용법을 속성 과외해주는 수고를 해야 했지만….
페루의 비상사태는 11월까지 무려 8개월간 이어지면서 비상사태 기간만으로 세계 최장이라는 불명예를 얻었다. 사실 그사이 귀국을 할까 고민도 많이 했다. 하지만 ‘1주 후면 끝나겠지’, ‘보름 후면 끝나겠지’ 하며 지내던 차에 결정적으로 귀국하는 비행편 자체가 없어지면서 꼼짝없이 페루에 있게 되었다.

이국 땅에서 두렵지는 않았나?
제일 두려운 건 병원이었다. 평생을 병원에서 보낸 나다. 딱보니 병원 상태가 보이더라. 리마에도 좋은 병원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 병원은 낙후됐다. ‘병원에 갔다가 없는 병도 생기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겁은 났지만 어쩔 수 없이 버텨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만에 하나라도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개인위생에 철저히 신경 쓰고, 외부 접촉은 생활에 필수적인 부분을 제외하고는 최대한 줄였다. 좋아하는 운동도 집 안에서만 했다. 혹시나 싶어서 재활 운동용 튜빙 밴드를 가져 갔는데, 그 질긴 고무 밴드가 다섯번이나 끊어졌을 정도로 열심히 운동했다. 아마 젊은이였다면 갑갑해서 못 견뎠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국 생활 자체가 놀이였다. 슈퍼마켓에 들러 장을 보고, 인터넷을 검색해 생전 해보지 않은 요리도 하고, 인적이 사라진 리마의 공원을 걸으며 한적하고 아름다운 페루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매일 스페인어를 예습, 복습해야 했으니 심심할 여가가 없었다.



“유럽, 남미, 우리나라 사람들이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봉쇄 조치에 반응하는 양상이 많이 다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시키면 잘 따른다. 유럽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격렬하게 반발한다. 페루는 겉으로는 잘 따르는 것처럼 보이는데 집에 가면 안 지키더라.”


비대면 수업만으로도 연수 효과가 충분했나?
처음에는 ‘이역만리까지 와서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기도 했다. 아날로그 세대다 보니 이런 첨단 수업이 익숙지 않을뿐더러 거부감도 들었다. 그런데 막상 경험해보니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잘만 활용하면 현장 수업의 공백을 거의 메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경험은 오히려 내 사고방식과 인식의 영역을 넓히는 기회가 된 것 같다. 나이 들었다고 새로운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걸 체험한 것이다.프랑스 연수를 떠난 올 초는 코로나19 사태가 최악이었다 애당초 어학연수를 계획할 때 스페인, 프랑스, 중국, 일본 순서로 각각 3개월씩 머물고 중간에 3개월씩 국내에서 재충전을 하는 2년짜리 계획을 세웠다. 그게 코로나19 때문에 미뤄진 것뿐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떠난 건 아니다. 연초부터 프랑스 정부의 방역 지침과 행정처분이 어떻게 변하는지 두달간 매일 관찰했다. 동시에 프랑스의 감염자 수 변화 추이
와 중증 환자 비율 변화도 꼼꼼하게 체크했다. 무엇보다 대면 수업이 가능한 상황인지 파악해야 했다. 이 시기 프랑스는 백신 접종률이 빠르게 증가하면서 확진자 증가 추세가 확연 하게 꺾이고 있었다.
그렇게 두 달을 지켜본 후 2월경에 가도 되겠다는 판단이 서 두 달간 준비를 했고, 4월 25일에 출국했다. 20주 어학연수 코스를 마친 후 지난 10월 5일 귀국했는데, 이 모든 게 열악한 페루에서, 심지어 팬데믹에 대한 준비도 전무했던 상황에서 나를 지켜낸 경험이 큰 힘이 된 것 같다.

프랑스에서의 생활은 어땠나?
국내 언론에는 거의 보도가 안 되는데, 프랑스는 백신 접종 완료자라면 거의 완벽하게 일상을 회복했다. 환자 수는 늘지 않고 사망자 수도 줄고 있는 추세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나 실내에서 수업을 하거나 모임을 가질 때 정도를 제외하면 마스크도 쓰지 않는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 돌아다니는 상쾌한 기분을 오랜만에 만끽했다.

두 차례의 연수 성과를 자평한다면?
스페인어와 프랑스어는 A1·A2·B1·B2·C1·C2로 등급이 올라가는데, 나는 연수 전에 이미 스페인어 B2, 프랑스어 B1 자격증을 갖고 있었다. 연수를 떠나기 전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객관적인 증거를 제시하는 게 목표였다. 스페인어는 수준에 맞는 반이 없어서 일대일 수업을 했는데, 담당 강사의 객관적인 평가를 받는 게 목표였다. 실제로 연수를 마칠 때 강사 추천서에 후한 평가를 받았다.
프랑스어는 20주 연수를 마치기 전에 잠깐이라도 고급반으로 승급해 C클래스의 수업을 듣는 게 목표였는데, 7주 만에 최고 수준인 C1 클래스로 월반해 마지막까지 수업을 들었다. 그런 면에서 두 차례 연수 모두 대단히 성공적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남은 중국어, 일본어 연수도 성공적으로 끝내는 게 최종 목표다.

봉쇄가 풀린 후 처음 먹어본 페루 요리 ‘오코파’


스스로 ‘자유로워졌다’고 했는데, 무슨 뜻인가?
내가 연수를 떠나기 전에 가장 먼저 배운 게 뭔지 아나? 바로 ‘달걀 프라이’다. 자기 밥도 혼자 못 챙겨 먹던 내가 생존을 위해 인터넷을 찾아가며 음식을 만들어 먹고, 내 생활에 필요한 모든 일을 혼자 하게 됐다. 이번 연수는 의대 교수, 한 가정의 모범적인 가장 김원곤이 아니라 ‘자연인’ 김원곤을 발견하는 기회였다. 연수를 떠나기 전까지 나는 소위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 있는 사람일지는 몰라도 개인으로서는 ‘무능인(無能人)’이었다. ‘자유로워졌다’는 의미는 내가 평생 달려온 인생의 궤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해봤다는 의미도 있지만, 자연인 김원곤이 그간 발현하지 못했던 능력과 가치를 찾아 진정 자유로운 개인으로 거듭났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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