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대]90대 노병이 남기는 6·25 참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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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성 강원6·25참전경찰 국가유공자회 고문




필자는 올해 94세다. 1948년 경찰에 투신한 직후 6·25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경험은 잊히지 않고 지금도 생생하다. 정전 70주년을 맞아 그 기억을 기록으로 남겨보고자 한다.

전쟁 발발 직후 충남 보령지구 전투에 참전하기 위해 경주에 집결했다. 포항 육군 3사단에 배속돼 북한군 5사단의 남하를 방어했다. 김석원 사단장의 지휘 아래 야간 돌격전과 포항시가전 등에 참전했다. 1950년 9·28 서울 수복 후 강원경찰 전투경찰 제9대대 소속으로 화천발전소를 지켰다. 북한군 패잔병과의 공방전을 벌이고 주문진경찰서로 원대 복귀해 연곡면 유등지서에 배치됐다. 그해 11월30일, 새벽 3시께 공비 출현 신고를 받았고 순경 5명은 함께 출동했다. 새벽 4시에 유등지서로 돌아와 보니 이미 공비들에게 점령당했고, 이들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공비들은 우리의 손과 팔을 묶고 오대산 쪽으로 끌고 가다가 퇴곡리 논바닥에 꿇어 앉혔다. 총살을 하려고 했다. 총살 직전에 마을 이장인 권오규씨와 눈이 마주쳤다. 권씨는 공비 책임자인 정치부장에게 총살은 안 된다고 설득했다. 총살이 잠시 유보됐다. 10㎞ 떨어진 삼산리 횟골 독가에 감금됐다. 12월1일 새벽 2시께 목재소 사장이 제사를 지내고 난 음식을 갖고 찾아왔다. 경비 근무 중인 공비들이 잠들었다고 알려주었다. 곧바로 맨발로 탈출해 철갑령 산길을 하루종일 걸었다.

직접 겪은 전투 상황은 하나만 소개하고자 한다. 1950년 9월4일 비 내리는 날 새벽이었다. 육군 제3사단에 배속(당시 소속은 원주경찰서)된 필자는 포항 북쪽 C고지 참호에 배치됐다. 인민군 5사단은 아군 진지를 급습하여 수류탄 공격을 했다. 울진경찰서 중대장 이쌍우 경감 등 7명이 한순간에 전사하는 것을 바로 옆에서 보았다. 군인 환자는 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 하지만 경찰은 울산향교에 임시 마련된 수용소에서 며칠 쉬다가 귀대했다. 차라리 빨리 전사하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휴전 무렵인 1953년 5월 육군에 입대해 5군단 정보처, 육군정보학교 등에서 복무하고 1955년 9월 의가사 제대하여 경찰에 복직했다. 이후 강원도 내 각 경찰서 및 강원경찰청 수사과장, 양구경찰서장, 삼척경찰서장 직무대행 등으로 근무한 후 1990년 12월에 정년퇴직했다.

필자는 2011년 강원6·25참전경찰국가유공자회장에 선출되어 6년간 일했다. 재임 기간 군·경·학생·시민이 하나가 되어 북한군과 맞서 싸운 춘천대첩과 춘천내평지서전투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애썼다.

내평지서전투는 6·25전쟁 발발 직후 춘천시 북산면 내평지서에서 지서장 노종해 경감 등 11명이 북한군 2사단 4연대 3,000여명과 맞서 3시간가량 교전하며 춘천침격을 3시간 이상 지연시킨 전투였다. 이들의 희생은 국군 6사단이 춘천 남쪽에 저지선을 구축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줌으로써 춘천지구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초석이 되었다.

필자는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동상 건립을 국가보훈처·강원도·춘천시에 적극 건의했다. 마침내 2015년 소양강 댐 시민의 숲에 기념 동상이 건립되었다. 매년 6월24일에 ‘춘천내평전투 호국영웅 추념식’ 행사를 하고 있다.

지금의 자유는 참전 경찰을 비롯하여 수많은 군인과 시민의 호국정신으로 얻은 값진 것이다. 6·25전쟁의 실상을 널리 알리고 북한을 경계하여 대한민국을 지켜 나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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