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부터 외국인까지 표적 삼아… 범행 실행된 건 없고 모두 허위
발신인은 이름 도용된 日 변호사
13년 전 사이버 폭력 피해자 변호 후, 극우 커뮤니티 타깃 돼 장기간 고통
일본 내에서 협박 관심 줄자 韓 겨냥… 경찰 “日에 수사 협조 요청할 것”
지난해 12월 30일 오전 법무부 대변인실 앞으로 이런 내용의 영문 이메일이 도착했다. 179명의 생명을 앗아간 제주항공 참사가 발생한 바로 다음 날이었다. 발신자는 “31일 밤 한국 도심 여러 곳에 고성능 폭탄을 터뜨리겠다”며 자신의 이름이 ‘가라사와 다카히로(唐澤貴洋)’라고 밝혔다. 법무부는 곧장 경찰에 신고했다.
이틀 뒤 서울 영등포구 국민의힘 중앙당사에도 “폭발물을 설치하겠다”는 내용의 협박 팩스가 도착했다. 자정을 앞둔 야심한 시각, 4분 간격으로 두 차례 도착한 팩스 발신자는 역시 가라사와 다카히로라는 일본인 이름이었다.
● ‘일본발’ 협박 메일 18개월간 30여 건
이렇게 가라사와 다카히로 명의로 일본에서 온 폭파, 살해 협박 메일은 2023년 8월부터 18개월간 30여 건에 달한다. 발송 시기와 수신처는 다양했다. 협박 대상도 내외국인을 가리지 않았다. 지난해 1월 6일에는 외교부로 “서울의 일본인 학교와 일본대사관을 폭파하겠다”는 내용의 팩스가 도착했다.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미국 메이저리그(MLB) 서울 개막전이 열린 지난해 3월에는 “경기 중 폭탄을 터뜨려 오타니 쇼헤이 선수를 해치겠다”는 협박 메일이 접수되기도 했다. 들뜬 마음으로 야구장을 찾은 관중은 때아닌 삼엄한 경비 속에서 까다로운 보안 검색을 거쳐야 했다.
황당한 내용의 협박 메일도 있었다. 어린이날을 하루 앞둔 지난해 5월 4일에는 국내 일부 언론사 등에 “어린이가 많이 찾는 한국 공공시설에 고성능 폭탄을 설치하겠다”는 협박 메일이 도착했는데 “이 테러는 일본인에게 차별적인 발언을 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 대한 보복”이라고 적혀 있었다. 모두 실제 폭발 피해는 일어나지 않았다. 허위 협박 메일들이었다.
● 발신인은 사이버 테러 피해자
일본 언론 등에 따르면 가라사와 변호사는 2012년 3월 일본의 극우 성향 온라인 커뮤니티 ‘2 channel’에서 괴롭힘을 당하던 고등학생의 대리인을 맡았다가 유저들의 반감을 샀고, 이후 그들의 사이버 테러 대상이 됐다. 그의 휴대전화 번호와 개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 등 각종 개인정보가 온라인에 유출됐고, SNS에는 악성 댓글이 쏟아졌다. 집과 일터의 주소까지 공개되면서 누군가는 사무실 현관문 열쇠 구멍을 접착제로 막아놓기도 했다. 가족 묘비에 페인트가 뿌려지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를 사칭한 테러 협박이 일종의 ‘밈(meme)’처럼 일본 전역에 번져 나갔다. 2016년 일본 공영방송 NHK ‘뉴스 워치 9’ 보도에 따르면 그해 일본 전역 주요 도시에 신고된 137건 가운데 73건에 ‘가라사와 다카히로’의 이름이 언급됐다. 2023년 1월 30일 일본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같은 달 23일부터 약 일주일간 일본 전역의 중고교, 대학교에 가라사와 변호사의 이름으로 발신된 폭파, 살해 예고 팩스가 1만5000여 건에 달했다. 사칭 협박이 지속되자, 가라사와 변호사가 소속된 ‘제1 도쿄 변호사회’는 “가라사와 변호사를 사칭해 금전을 요구하는 청구에 주의하라”는 내용의 공지문을 올리기도 했다.
일본 경시청은 익명화 프로그램을 이용한 메일과 팩스 탓에 범인을 잡는 데 어려움을 겪다가 2023년 가라사와 변호사를 사칭해 도쿄음악대학 등 도내 2개 대학에 “30만 엔을 지불하지 않으면 교내에 폭탄을 터뜨리겠다”고 협박 팩스를 보낸 20대 남성 두 명을 체포했다. 이들은 인터넷상에서 만나 함께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전해졌다. 두 남성은 재판에 넘겨져 도쿄지방법원에서 위력에 의한 업무방해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는데, 이 범인들이 처음 체포됐던 때가 2023년 8월이었다. 우리나라에 처음 협박 메일이 오기 시작한 즈음이다.
● 일본서 관심 주춤하자 한국 겨냥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허위 테러 협박을 일삼는 이들은 ‘관심’을 가장 큰 목적으로 한다”며 “일본에서 해당 장난이 십수 년간 이어지며 반응이 사그라든 만큼, 한국으로 표적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특히 한국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한 것을 두고 한일 양국 간 부정적인 감정이 계기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만종 한국테러학회 회장은 “기본적으로 한국의 사건 사고나 정치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의 소행인 것으로 보인다”며 “한국에 대한 악감정이 허위 테러를 발송하는 계기가 됐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본에서 이런 독특한 사이버 테러가 생긴 이유로는 일본의 뿌리 깊은 왕따 문화(무라하치부·村八分)’가 지적됐다. ‘무라하치부’란 옛 일본에서 마을의 관습을 깨거나 미움을 산 사람을 배척했던 풍습을 의미한다. 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는 “가라사와 변호사에 대한 ‘무라하치부’가 인터넷 공간에서 벌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 경찰력 낭비, 주민 불안 “인터폴에 수사 요청”
테러의 표적이 된 시설이나 건물 상인들의 경제적, 심리적 피해도 있다. 국민의힘 당사 테러 협박이 있었던 다음 날, 당사 건물 내 한 식당 점주는 “경찰특공대가 이 건물에 폭발물이 설치됐다며 찾아와 셰퍼드 수색견을 데리고 곳곳을 수색했다”며 “어제는 화재경보기 오작동으로 건물에 사이렌이 울렸는데, 순간 ‘실제로 폭발물이 터진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호흡 곤란이 올 정도였다”고 했다.
경찰은 지난달 일본 등과 국제 공조 수사를 벌일 방침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범인 특정에 난항을 겪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인터폴을 통해 일본 경찰에 협조를 요청하는 동시에, 외교 경로를 통한 국제 형사사법 공조를 진행할 예정”이라며 “다만 일본 내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다수 발생했으나, 일본 경찰의 수사에 진전이 없어 수사에 난항을 겪고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피의자가 잡히면 현행법상 허위 테러 협박 등을 통해 행정력, 공권력을 낭비하게 한 혐의로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죄가 성립된다. 형법 137조에 의거해 5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할 수 있다. 이는 폭력 또는 위협이 전제돼야 하는 일반적인 공무집행방해죄와는 다르게 단순한 허위 신고나 거짓 정보만으로도 성립될 수 있다. 경찰 병력 동원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가 이뤄질 가능성도 있다.
다만 전문가들은 해외발 테러 협박의 경우 수사가 어려울뿐더러 처벌하는 데도 난관이 있을 것이라고 우려한다. 김재윤 건국대 로스쿨 교수는 “현행법상 허위 신고에 대한 처벌 규정이 있지만 반복적으로 하거나 문제가 심각하지 않은 이상 처벌이 미미하다”며 “형법은 법률상 적용 범위를 대한민국 국민에 한해 규정하고 있기에, 국내법으로 처벌하기 위해서는 많은 상황이 고려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