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분식집 문을 열면 밥 짓는 훈기가 나를 와락 안아 주었다. 이모님이랑 이런저런 얘길 나누다가 학창 시절 유학했던 곳이 이모님 고향인 걸 알았다. “전라도에서 유학했는데 본가는 강원도고요. 근데 가족들은 흩어져 살고…이래저래 복잡해요.” 이모님은 갓 지은 밥을 살살 퍼담으며 말했다. “사연이 많은가 보네. 사는 게 참 그렇지. 그래도 어디라도 따순 데 맘 붙이고 살다 보면 살아진다.” 덮밥처럼 덮어두면 동향 사람이라고 한 주걱 더 담아주었다.
설을 앞두고, 집엔 내려가느냐고 이모님이 묻기에 대답했다. “연휴도 짧고 바빠서요. 혼자 보내요.” 명목은 취업 준비였지만 안팎으로 사정이 여의찮았다. 그러자 이모님이 꽁꽁 묶어둔 봉지를 내밀었다. “나물 조금 무쳤어. 설에는 여기도 문 닫으니까. 추석보단 설이 더 마음이 쓰여. 겨울이라 춥잖아. 추운데 배고프면 서럽거든. 그저 맛있게 먹어. 복 많이 받고.” 양손 묵직하게 돌아가던 겨울밤. 그믐달이 빙그레 웃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단칸방에 달랑 나 혼자였어도 설날에는 나물 비빔밥을 비벼 먹었다.
어느덧 십수 년이 지났다. 분식집은 오래전에 사라졌고 그 동네는 찾아갈 일이 없다. 이모님은 잘 지낼까. 고향에 돌아갔을까. 은혜는 어떻게 갚을까. 돌아보니 ‘그래도 맘 붙이던 따순 데’가 내게도 있었다. 복은 베푸는 거라고 이름도 모르는 이모님이 알려주었다. 마음 쓰는 데 인색하지 말자. 덮어두고서 베풀며 살아야지. 빙그레 웃는 그믐달을 올려다본다. 밥 짓는 사람의 마음을 알게 된 지금에야 속절없이 뭉클, 마음이 뜨거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