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저건 쐈다 3억 배상...강력범 맞설 더 강력한 힘, 경찰·시민에 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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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3.08.06. 오후 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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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권총·테이저건 쏘다 문제되면 책임 추궁 당할까봐 소극적
시민은 정당방위 인정 못 받아… 전문가 “공세적 대응 허용해야”

4일 오후 또 다른 흉기 살인을 하겠다는 장소로 예고된 경기 성남시 분당구 오리역 일대에서 경찰특공대가 순찰을 강화하고 있다. /뉴스1

서울 신림역과 분당 서현역의 흉기 난동 사건에 이어 4일에는 대전의 한 고교 내에서 교사가 피습당하고,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서는 흉기를 들고 다니던 남성이 체포되는 등 강력 범죄가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선 ‘공권력의 공세적 대응’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경찰 규칙에는 강력 범죄에 대해 총기까지 사용할 수 있다고 돼 있지만 실제로는 방어적,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신림역 칼부림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도 “칼 버리세요”라며 존댓말을 썼다. 오윤성 순천향대 교수는 “권총이나 테이저건을 쓸 수 있게 돼 있지만 문제가 생기면 경찰관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경향이 강하다”고 말했다. 지난 2017년 난동을 부리는 취객을 막으려다 다치게 한 경찰관은 독직폭행 혐의로 기소됐다. 이 경찰관은 취객에게도 5300만원을 합의금으로 물어줬다.

또 강력 범죄의 표적이 된 시민들이 범인을 제압하려고 물리력을 써도 정당방위로 인정받지 못한다. 함께 술을 마시던 친구가 휘두른 흉기에 찔린 남성이 친구의 손을 쳐 흉기를 떨어뜨린 뒤 발로 무릎과 옆구리를 걷어찼다가 상해죄로 기소되자 정당방위를 주장했지만 지난 2021년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상대방이 흉기를 놓친 뒤에도 폭행한 것은 과도하다는 취지였다.

윤희근 경찰청장이 4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에서 흉기 난동 범죄 관련 대국민 담화 발표를 발표하고 있다./뉴스1

전문가들은 “강력 범죄에 경찰과 시민이 적극 대응할 수 있도록 법적 기준을 바꿀 때가 됐다”고 지적하고 있다. 김성룡 경북대 교수(전 한국형사법학회장)는 “범인이 불특정 다수를 흉기로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상황에서 칼을 빼앗는 것 외에 다른 대응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제압할 수 없게 된다”며 “폭넓은 대응을 허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서현역 흉기 난동은 무고한 시민에 대한 테러”라며 “경찰력을 총동원해 초강경 대응하라”고 지시했다. 윤희근 경찰청장은 “총기, 테이저건 등 정당한 경찰 물리력 사용을 주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경찰은 흉기 소지 의심자와 이상 행동자에 대해 ‘선별적 검문·검색’을 실시할 방침이다. 또 법무부는 ‘가석방 없는 무기형’을 도입하겠다고 했고, 대검찰청은 “법정 최고형 처벌이 되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래픽=이철원

우리나라 법원은 정당방위 범위를 지나치게 좁게 본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논문(2014년)에 따르면, 1953년 형법 제정 이후 정당방위가 인정된 사례는 14건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승재현 한국 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집에 침입한 도둑을 일단 주먹으로 한 번 때려 쓰러뜨린 상태에서 한 번만 더 때려도 유죄가 될 수 있다는 식”이라고 말했다.

59년 전 성폭행범의 혀를 깨문 죄로 성폭행범보다 중한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최말자(77)씨 사건은 정당방위에 대한 법원의 태도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또 2005년에는 아내가 머리채를 잡아당기는 남편의 팔을 뿌리치면서 남편이 바닥에 쓰러져 뇌사 상태가 된 사건에서 1심은 정당방위를 인정했지만 2심은 ‘소극적 방위를 넘어섰다’며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이런 사건들이 알려지면서 각종 커뮤니티에서는 “내가 죽을 상황인데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한국에 정당방위는 없다고 생각하는 게 편하다” “다른 흉기 꺼내서 공격하면 그때는 어떻게 대응하냐”는 글이 잇따라 올라왔다. 흉악 범죄가 빈발하는 상황에서 법원이 현실과 동떨어진 판단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4일 서울역 대합실 TV 화면에 윤희근 경찰청장이 “무고한 시민들을 향한 흉악 범죄는 사실상 테러”라며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는 장면이 생중계되고 있다. /연합뉴스

법원 내부에서도 비판이 나왔다. 2020년 대전지법 구창모 부장판사는 말다툼을 하다 머리채를 잡힌 상태로 상대방 손을 밀어내 다치게 한 사건에서 정당방위를 인정했다. 당시 구 부장판사는 “불법적이거나 부당한 공격이 있으면 그걸 방어하는 것이 폭넓게 허용될 필요가 있다”면서 “우리 사회에서는 ‘싸움이 나면 무조건 맞아라’라는 말이 상식처럼 통용되고 있는데 이는 지극히 후진적이고 참담한 법률 문화의 단면이 노출된 것”이라고 했다.

한편 법원은 경찰의 범인 제압이나 단속 행위에 대해서도 민형사상 책임을 묻고 있다. 작년 1월에는 경찰이 칼을 들고 난동 부리는 사람을 테이저건으로 제압하고 수갑을 채웠는데 이 사람이 의식을 잃고 사망한 사건에서 국가가 3억2000만원을 유족에게 배상하라고 법원이 결정하면서 경찰 내부가 들끓기도 했다.

신호 위반 오토바이를 단속하는 과정에서 운전자가 사망했다는 이유로 경찰이 벌금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2020년 12월 경찰관이 순찰차 근무를 하던 중 신호를 위반하고 도주하는 오토바이를 쫓아가 접근하자 놀란 오토바이 운전자가 경계석과 가로수를 들이받고 사망했다. 이에 법원은 “국민의 생명·신체를 보호하는 경찰관으로서 교통법규 위반 차량을 단속할 때는 안전한 장소로 유도해야 했다”며 업무상 과실치사 유죄를 인정하고 벌금 2000만원을 선고했다.

또 2019년 교통법규를 위반한 운전자가 단속 경찰관을 붙잡자 경찰이 운전자를 넘어뜨려 다치게 한 사건에서도 법원이 운전자에게 4억4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했다.

김면기 경찰대 법학과 교수는 “강력 범죄에 대해 선제적,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어떤 상황에서, 얼마만큼 공권력을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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