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군경 보는 앞 조선인 학살 장면, 14m 두루마리 그림에 생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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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3.08.28. 오전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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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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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토대지진 학살 100년]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그림… 100년만에 日서 공개
‘조선인이 방화’ ‘조선인 폭동 경계’… 당시 日정부-언론이 유언비어 유포
“日정부, 조사-책임있는 조치 해야”
《“100년 가까이 공개되지 않았던 조선인 학살 그림을 펼쳐 보겠습니다.” 26일 일본 도쿄 신주쿠 고려박물관. 14m 길이의 두루마리 그림이 펼쳐지자 관람객들은 눈을 떼지 못했다. 아라이 가쓰히로(新井勝紘) 고려박물관장은 “일본 간토(關東)대지진 당시 이뤄진 조선인 학살 장면이 이 정도로 생생히 담긴 그림은 흔치 않다”고 말했다. 1923년 9월 1일 발생한 대지진으로 극심한 혼란을 틈타 재일조선인 수백∼수천 명이 무고하게 학살됐다. 그로부터 100년, 일본 정부는 여전히 당시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일본 일각에서는 “역사를 직시하자”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다. 》
1923년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일본인들에게 무차별 학살을 당하는 장면이 묘사된 그림. 1926년 일본 화가가 그린 그림으로 일본 고려박물관이 경매로 낙찰받아 일반에 공개했다. 도쿄=이상훈 특파원 sanghun@donga.com
26일 오후 일본 도쿄 신주쿠 고려박물관. 민간 박물관인 이곳에서 의미 있는 이벤트가 열렸다. 간토(關東)대지진 100년을 맞아 당시 조선인 학살 장면을 담은 두루마리 그림이 일반에 공개된 것이다. 길이 14m, 폭 36cm의 긴 그림에는 1923년 9월 1일 일본 수도권을 강타해 10만 명 이상이 숨진 간토대지진 참상이 영화 필름처럼 담겨 있었다.

1923년 간토대학살 당시 일본 자경단원들이 학살당한 조선인의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다. 동아일보DB
1926년 기코쿠(淇谷)라는 이름의 화가가 그린 그림에는 평온했던 마을이 지진으로 혼란에 빠지는 모습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생히 묘사돼 있다. 집이 부서지고 화재가 일어난 장면이 지나가자 누런 일본군 군복을 입은 이들이 일반인과 함께 칼, 죽창을 들고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을 무차별하게 죽이는 장면이 담겨 있다. 붉은 피를 흘리는 장면도 선명했다. 잔인한 학살 장면이 끝나는 그림 후반부에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쌓인 시체들이 불타는 모습이 담겼다. 관람객 40여 명은 펼쳐지는 그림 속 장면에 눈을 떼지 못했다.

아라이 가쓰히로(新井勝紘) 고려박물관장(전 센슈대 역사학 교수)은 인터넷 경매로 2년 전 이 그림을 입수했다. 그는 “당시 일본에서 조선인은 인간 대우를 받지 못했다. 군인, 경찰, 일반 시민이 공공연히 보는 앞에서 조선인을 죽이는 장면이 이를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일본 정부는 간토대지진이 발생한 9월 1일을 ‘방재의 날’로 정했다. 지진 대비를 잘해야 한다는 교훈을 새기기 위해서다. 하지만 나라를 잃고 살던 조선인들이 일본인의 손에 무고하게 학살당한 사실은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한일 양국이 진정한 미래지향적 관계로 나아가려면 간토대지진의 역사적 진실을 일본이 올바로 인식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 ‘우물에 독 풀었다’며 무차별 학살
일제강점기인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도쿄, 요코하마 등 일본 수도권 일대에 최대 규모 8.3의 강력한 지진이 발생했다. 다음 날까지 규모 6 이상의 여진이 이어지면서 일본 정부 공식 기록으로 10만5385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고 수십만 명이 다쳤다.

큰 피해로 극심한 혼란이 이어지면서 유언비어가 퍼졌다. 지진 당일인 1일에는 “사회주의자와 조선인 방화가 많다”, 다음 날에는 “불령선인(불온한 조선인)의 습격이 있다” 등의 소문이 나돌았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지낸 일본 내무상 미즈노 렌타로(水野錬太郎)는 ‘도쿄 부근에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경계 통지를 주요 기관에 내렸다.

앞서 지진 4년 전인 1919년 3·1운동으로 한반도에 두려움과 불쾌감을 느꼈던 일본 정부는 유언비어를 확산시켰다. 이는 민간인들의 공포심을 자극해 무자비한 학살을 조장했다. 조선인이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던 “주고엔 고주센(15엔 50전)”을 시켜 어눌하면 바로 살해하는 식이었다. 사투리가 심한 지방 출신 일본인이 살해당하기도 했다.

지진 직후 일본 언론에는 “조선인이 곳곳에서 난도질” “조선 독립 음모단이 광산에서 폭탄 절도” 등의 기사가 담겼다. 지진 발생 한 달이 지난 10월 중순에야 유언비어 때문에 무고한 사건이 벌어졌다는 보도가 나왔지만 이미 수많은 조선인이 목숨을 잃은 뒤였다.

● 日정부 “기록 없다” 책임 회피
1923년 10월 15일자 동아일보. ‘일본 사이타마현 자경단이 경찰 제지도 듣지 않고 끝끝내 남녀 100여 명을 학살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나마 한반도에는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다. 동아일보 등이 일본 현지 계엄사령부, 내무성, 경시청 등에서 진상을 취재했지만, 조선총독부 검열에 막혀 보도되지 못했다. 이후 일본의 보도 통제가 풀린 뒤에야 보도되기 시작됐다. 동아일보에는 그해 10월 15일 ‘사이타마현 자경단이 (조선인) 남녀 100여 명을 학살’ 기사가, 20일 ‘사이타마현에 학살이 우심(尤甚·더욱 심함)함은 현의 통달문이 그 원인’ 기사 등이 실렸다. ‘조선인들이 나쁜 짓 할 염려가 있으니 경계를 담당하라’는 사이타마현 당국의 지시가 학살을 부추겼다는 내용이다.

일본 정부는 간토대지진 당시 유언비어로 조선인이 학살당한 사실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거나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올 6월 일본 참의원에서 야당 사민당 후쿠시마 미즈호(福島瑞穂) 대표는 질의를 통해 당시 일본 정부가 각 지방에 보낸 전보 등을 제시하며 일본 정부가 스스로 유언비어를 조장했다고 지적했다. 이에 일본 경찰청 측은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없다”며 그동안의 입장을 되풀이했다.

26일 일본 고려박물관에서 관람객들이 1923년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장면이 묘사된 두루마리 그림을 보고 있다. 도쿄=이상훈 특파원 sanghun@donga.com
아라이 관장은 “당시 일본이 자료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기록이 없는 것이다. 가능한 한 은폐하고 감추면서 없었던 일로 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간토대지진 100년을 맞아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일본 정부는 제대로 된 조사와 책임 있는 조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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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도쿄특파원입니다. 도쿄에서 일본의 다양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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