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헤지펀드인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반대하고 나서면서 삼성그룹 안팎이 떠들썩하다. 승계 작업을 진행하던 삼성그룹이 행동주의 헤지펀드라는 예상치 못한 암초를 만났다. 현재까지 합병이 예정대로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지만, 싸움을 건 상대방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
엘리엇과 같은 행동주의 헤지펀드(Activist Hedge Fund)는 목표삼은 기업의 주식을 사들인 후 주주의 위치에서 경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수익을 내는 헤지펀드를 뜻한다.
행동주의 헤지펀드는 썩은 시체까지 파먹는 독수리(Vulture)와 비슷하다는 뜻에서 벌처펀드(Vulture Fund)라고도 불린다. 칼 아이칸(Carl Icahn)과 같은 대표 행동주의 투자자에게 ‘기업 사냥꾼’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 행동주의 헤지펀드 규모 10년새 9배 증가
헤지펀드 조사업체인 HFR(헤지펀드리서치)에 따르면 행동주의 헤지펀드의 운용 자산 규모는 지난 2003년 120억달러(약 13조2300원)에서 지난해 3분기 1120억달러(약 123조4800원)로 증가했다.
1980년대까지 행동주의 헤지펀드는 규모가 작고 자본력이 약한 기업을 대상으로 공격을 일삼았다. 그러다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 헤지펀드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면서 대기업을 겨냥하기 시작했다. 당시 금융위기의 재발을 막기 위해 실행한 ‘볼커 룰’에서는 헤지펀드의 레버리지 비율을 5배 이내로 규제했다.
강화된 규제 속에서 수익률을 내기 위해 행동주의 헤지펀드들 택한 전략은 주주가치 극대화를 내세운 경영 개입이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2009년 이후 미국 S&P 500대 기업의 15% 이상이 행동주의 헤지펀드의 공격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프록터앤겜블(P&G), 마이크로소프트, 모토로라, 이베이, 야후, 펩시, 다우케미칼 등 유수 글로벌 기업들이 행동주의 펀드의 공격에 무릎을 꿇었다.
컨설팅업체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에 따르면 올 3월 기준 행동주의 헤지펀드 활동의 41%가 북미 지역, 15%가 아시아 지역, 8%가 유럽 지역에서 이뤄졌다. 전문가들은 한국와 일본 등에서도 행동주의 펀드의 공격도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이원일 제브라투자자문 대표는 “미국계 행동주의 헤지펀드들이 유럽과 아시아 기업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며 “기업 규모에 비해 지배구조가 부실한 한국 기업들이 공격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 대표 행동주의 펀드는 어떤 전략을 사용할까?
PwC는 2003년 이후 행동주의 펀드가 약 275개 늘어났다고 밝혔다. 행동주의 투자 전략을 택하는 헤지펀드는 늘고 있지만 실제 시장을 주도하는 행동주의 펀드는 약 10개다. 행동주의 헤지펀드계의 맏형급인 칼 아이칸부터 밸류액트, 서드포인트, 엘리엇, 자나파트너스, 스타보드밸류, 퍼싱스퀘어, 트리안매니지먼트, 코벡스 매니지먼트 등이 대표적이다.
10대 행동주의 펀드는 기업의 빈틈을 파고들어 주가를 띄운 후 차익을 챙긴다. 경영진 교체, 이사 추천권 요구, 자사주 매입 등을 주문하고 회사를 팔거나 인수하라고 압박한다. 이들은 언론 플레이에 능하며, 트위터와 같은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를 적극 활용해 의사를 관철시키기도 한다.
① 경영진·이사회 교체
경영진이나 이사회 교체를 통한 기업 구조와 사업 개편은 행동주의 투자자들이 가장 흔히 사용하는 전략 중 하나다.
미국 퍼싱스퀘어캐피탈매니지먼트를 이끌고 있는 빌 애크먼은 지난 2012년 P&G 이사회에 대표이사를 교체할 것을 요구했다. 애크먼은 지난 2010년 맥도날드 대표이사가 취임한 이후 P&G의 성장이 둔화됐다고 지적했다. 또 유니레버, 존슨앤존슨, 킴벌리클라크 등 경쟁사에 비해 P&G의 실적과 주가가 부진했다고 비판했다.
P&G의 지분 1%를 보유하고 있던 퍼싱스퀘어캐피탈은 이사회에 전직 대표이사였던 앨런 조지 래플리를 복귀시켜줄 것을 주문했다. 이사회는 애크먼의 공격이 1년 넘게 이어지자 결국 2013년 5월에 대표이사를 래플리로 바꿨다.
② 지산배분 요구
‘기업 사냥꾼’으로 악명이 자자한 칼 아이칸은 지난 2013년 10월 애플의 현재 주가가 기업가치보다 낮다며 자사주 매입을 요구했다.
아이칸은 그해 8월부터 애플을 주식을 꾸준히 사들인 뒤 “애플의 주가가 굉장히 낮게 평가되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상당한 수준의 애플 주식을 보유하기로 결정했다”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에게는 애플의 자사주 매입 규모를 1500억달러(약 161조원) 규모로 늘려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는 등 압박 수위를 높여나갔다. 요구 사항을 글로 설명한 홈페이지도 따로 개설했다.
아이칸의 요구에 굴복한 애플이 자사주 매입 계획을 발표한 이후 애플 주가는 2년 동안 상승했다. 경영 개입을 통해 아이칸은 약 100%의 수익률을 올렸다. 아이칸이 보유한 애플 주식 5300만주(약 30억달러)의 가치는 올해 5월 65억달러로 증가했다.
③ 기업 분사
기업 분사를 요구해 차익을 실현하는 사례도 있다. 공격 대상으로 삼은 기업에게 날선 비판을 담은 공개서한을 보내는 것으로 유명한 서드포인트의 대니얼 롭은 지난 2013년 소니 지분 6.5%를 확보한 뒤 소니 엔터테인먼트의 분사를 주문하며 압박했다.
롭의 분사 요구에 소니의 주가는 35% 이상 올랐다. 이사회의 만장일치로 분사는 무산됐지만 그 사이 서드포인트는 소니 주식을 팔아치워 약 20%의 투자 수익률을 올렸다.
④ 기업 인수·합병
아예 기업을 팔거나 다른 기업을 인수할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제프리 스미스가 이끄는 스타보드는 지난해 대형 사무용품 업체인 스테이플스와 오피스 디포의 지분을 각각 6%, 10% 사들인 후 두 회사의 인수·합병을 추진했다. 스테이플스가 올 2월 오피스 디포 지분 100%를 63억달러에 사들이겠다고 밝혔다.
미국의 높은 법인세를 피하기 위해 캐나다 커피 도넛 체인 팀호튼 인수한 패스트푸드 체인점 버거킹의 경우도 빌 애크먼의 입김이 작용했다. 지난 2012년 웬디스로부터 팀호튼의 분사를 이끌어낸 애크먼은 이후 팀호튼과 버거킹과의 결합을 추진해 수익을 올렸다.
⑤ 지배구조 공격
기업 지배구조가 취약한 기업도 행동주의 헤지펀드에게 좋은 공격 대상이다.
지배구조 문제를 들면서 SK그룹을 압박한 ‘소버린 사태’가 대표적이다. 2003년 영국계 자산운용사 소버린은 SK지분 14.99%를 매입한 후 최태원 회장 퇴진, 계열사 청산 등 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했다. SK는 1조원이 넘는 비용을 들여 경영권을 방어했다.
소버린은 요구 사항을 관철시키지는 못했지만 2003년 4월 주당 평균 9293원에 사들인 주식을 2005년 5만2700원에 팔아 8000억원이 넘는 시세차익을 남겼다.
[이재은 기자 jaeeunlee@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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