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판사 사건, 공산당에는 책임이 없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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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일기] 1946년 10월 17일

 [프레시안 김기협 역사학자]

 1946년 10월 17일

10월 15일 서울지방법원 제4호 법정에서 박원삼 판사 주심으로 정판사 공장장 안순규의 위증죄 공판이 열렸다. 경찰과 검찰에서 위조지폐 인쇄 현장을 목격했다고 진술했다가 공판정에 와서 번복한 안순규는 자신의 위증죄 공판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경찰에서는 고문을 당하고 물까지 먹어 양심에 가책을 받는 거짓 진술을 하였으며 검사국에서도 역시 검사가 구인장을 내놓으며 허위로 진술을 하면 군정 재판에 회부된다 하므로 이미 경찰에서 진술한 바와 같이 보았다고 진술하였으나 공판정에서까지 양심에 가책을 받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 (<자유신문> 1946년 10월 16일자)

정판사 사건과 얽힌 뚝섬 위폐 사건 피의자로 안순규와 함께 경찰서에 유치되어 있었던 배재룡도 증인으로 나와서 당시 안순규가 "너희들이 뚝섬서 지각없는 짓을 하여 늙은 나까지 애매하게 잡혀 와서 고생을 한다"며 고문당한 이야기를 했다는 증언을 했다. 그러나 정기원 검사는 공판정에서의 안순규 증언이 위증이었다고 주장하며 1년을 구형했다. 그리고 나흘 후 판결 공판에서 박원삼 판사는 구형과 같이 1년을 선고했다.

정판사 사건의 윤곽을 다시 한 차례 정리한다. 5월 16일에 군정청 공보국의 발표가 있었는데, (경찰의 발표가 아니라는 점이 특이했다.) 공산당 본부, 해방일보와 같은 건물에 있던 인쇄소 정판사에서 대규모 위폐 인쇄를 했다는 것이었다. 공산당의 조직적 범죄는 아니라고 군정청은 강변했지만,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인 이관술과 해방일보 사장 권오직 등 공산당원들이 혐의자였다.

이 사건의 수사와 체포는 발표 열흘 전에 시작된 것이었는데, 경찰 손에 두 달 동안 있다가 7월 9일에야 검찰로 송국되었다. 검사들이 송국 전부터 경찰에 와서 조사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 7월 6일 이관술의 체포 때까지 송국을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송국 후에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불과 열흘 후에 기소되고 다시 불과 열흘 후인 7월 29일 제1회 공판을 열었다가 변호인단의 판사 기피 신청으로 인해 8월 22일까지 진행이 늦춰졌다. 제1회 공판 때 체포된 항의 시위자 수십 명이 군정 재판에서 3~5년의 중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그 후 공판 진행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무리한 일이 있었고, 안순규의 위증죄 기소도 그중의 하나였다. 그런 무리에 항의하다가 변호인단의 퇴정 사태가 속출하고 윤학기, 강중인 두 변호사는 자격 정지 처분을 (당시에는 '정직'이라 했다) 받기도 했다.

10월 17~19일의 이관술 심리 공판 후 21일 결심 공판이 열린다. 이관술, 박낙종, 송언필, 김창선에게 무기징역, 신광범, 박상근, 정명환에게 징역 50년, 김상선, 김우용, 홍계훈에게 징역 10년이 구형되었다. 조재천 검사는 논고에서 "사실 및 증거"로 16개 항을 제시했는데, 그중에는 검찰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것도 있고 의심케 하는 것도 있다. 의심스러운 점부터 열거한다. (<동아일보> 1946년 10월 26일자)

(1) 예심 청구를 피하고 싶은 이상 여차 복잡하고 중대한 사건은 송국되기 전부터 검사가 경찰서에 출장하여 병행 조사하는 수밖에 방도가 없고 또 그것이 비교적 가장 타당하다.
(2) 경찰에서 60일 구속한 것은 군정 하 이원적 법제 하에서는 위법이 아니다.
(3) 경찰의 고문에 의하여 피고인들이 입었다는 부위를 의학계 권위자에 감정시켰던 바 그것은 외상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고 판명되었다.
(10) 종시일관하여 위조 현장을 목격하였다고 진술하여 왔으며 같이 있던 그 우인 배재룡에게도 목도 이야기를 한 증인 안순규는 공판정에 이르러 목격 사실을 부인하여 위증 혐의로 별도 취조 중이던 바 진술의 전후 모순이 사방에서 속출하고 전체를 총람하여 위증임이 명백하므로 처벌을 받았다. 동인은 과반 모정당원 2명의 협박을 받은 사실도 판명되어 있다.

(1)에서 예심 청구를 피한다고 했는데, 왜 피해야 하는 것인가? 경찰과 검찰의 '병행 조사'란 이상한 짓을 할 타당한 이유로 보이지 않는다. 이 '병행 조사' 때문에 피의자들은 경찰의 고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검사에게도 거짓 증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2) '2원적 법제'라면 당시 조선 사회에 조선인에게 적용되는 군정청 법령 외에 미군 사령부의 법제가 우위에 있었다는 말이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미군 사령부의 명령으로 경찰의 유치 기한을 넘길 경우 미군 사령부의 법제로 뒷받침되는 조치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는데 이것이 무시되었다.

(3) 고문 받은 사실에 대해 여러 사람의 일관된 주장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 뺨을 때린 정도의 학대는 경찰과 검찰이 모두 인정한 것이다. 몇 달 전의 고문 사실은 두 명 의사(백인제와 공병우)의 간단한 진찰로 완벽하게 반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0) 안순규의 위증죄 판결이 이 논고의 이틀 전에 나왔고 안순규는 즉각 상고했다. 최종 판결이 아닌 안순규의 유죄 판결을 논고의 근거로 삼은 것은 적절치 않다. 오히려 본 사건의 논고에 활용하기 위해 안순규의 유죄 판결을 서두른 것으로 보인다.

한편, 검찰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것으로 보이는 내용도 없지는 않다.

(7) 피고인 김창선이는 체포된 익일에 그 범행 일절을 체계적으로 또 상세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자백하였던 바 설혹 어느 정도의 고문이 있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적어도 그 과감성을 자타 공인하는 정당의 당원으로 상당한 의식과 투쟁성을 가진 당 30년의 장년이 그 단기간의 고문에 못 이겨 없는 사실을 허위 자백하였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12) 경찰서에서 검사국에 송국된 후에도 피고인 중의 수 명은 범죄 사실을 의연 자백하였는데 공판에 와서는 부인하면서 '송국된 후이지만 부인하면 다시 경찰서로 데리고 가서 고문할까 염려되어 허위 자백한 것이라'고 변명하였다. 그러나 송국 후 도로 경찰서로 보내서 고문하는 예는 절무한 것이므로 피고인들은 송국 후도 아직까지 양심적으로 말하여 놓고 공판정에 와서야 죄를 면하려고 전술과 같은 궤변을 안출한 것이다.

강력한 뒷받침은 못 된다. 일제시대 이래 경찰 '고문 기술자'의 전통이 웬만큼 밝혀진 지금 사람의 눈에는 "당 30년의 장년"도 견뎌내기 힘든 고문이 당시 존재했으리라고 짐작한다. 그리고 일단 송국된 후에는 고문의 위협이 더 이상 없었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었는가? 경찰에서 두 달씩이나 붙잡고 있었던 것도 "절무(絶無)"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 일을 겪은 사람들이 검찰에서 경찰로 도로 보내는 것이 "절무"할 일이라고 어떻게 믿겠는가.

그러나 공산당 측의 '법정 투쟁' 방침에 따라 경찰과 검찰의 진술 요구에 가급적 쉽게 따른 면도 있을 수 있다. 검찰이 각본에 집착하게 만들어 놓고 공개된 재판에서 진술을 뒤집어 검찰을 곤경에 몰아넣는다는 것이 법정 투쟁의 중요한 전술이었을 것 같다.

7월 19일 기소 당시 검찰은 유죄 확인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진술의 집단 번복을 예상치 못한 것이다. 위폐 인쇄의 참가자와 일시까지 자신 있게 발표했다. 그런데 공판 과정에서 박낙종 사장이 그 일시에 지방 출장 중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니 얼마나 당혹스러운 일이었을까. 10월 21일의 결심 공판 후에도 몇 차례 공판을 더 열고 한 달 너머 지난 11월 28일에야 선고가 이뤄진 것도 이런 허점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재천과 함께 이 사건을 담당한 김홍섭 검사 이야기를 8월 29일자 일기에서 한 일이 있다. 한국 법조계에서 가장 훌륭한 인격자의 한 분으로 추앙받는 김홍섭은 이 사건에 어떤 견해를 갖고 있었을까. 먼저, 이 사건의 공판 진행 중 김홍섭이 사표를 낸 일부터 잠깐 살피며 그의 사람됨을 가늠해본다.

"총 사직으로 직권 보장-주목되는 검사 무시의 귀추"

지난 19일 돌연 사표를 제출한 김홍섭 검사의 문제를 싸고 사법 당국 안에는 긴장한 공기가 흐르고 있는데 20일 오후 검사국에서는 회의를 열어 검사의 직권 행위를 보장할 것과 검사를 무시하고 법의 위신을 훼손하는 배후 인물들을 엄중히 처벌할 것을 결의하고 만일 이러한 요구가 관철되지 못할 때는 총사직으로써 항거하겠다는 태도를 정하여 박종식 원택연 양 검사는 전원 대표로 이인 검사총장을 거쳐 미인 사법부장 커-넬 소좌에게 건의하였는데 그 귀추가 주목된다.

그런데 문제의 발단은 모 경제 단체의 간부인 모모 양씨에 대하여 불미한 풍설이 항간에 떠돌고 있어 이에 대한 규명을 하고자 김홍섭 검사는 지난 10일경 전기 양씨를 소환 심문한 일이 있었던 바 18일 상오 11시경 공당원 위폐 사건 공판에 입회하고 있는 김 검사를 모 미인 장교가 불러내어 전기 양씨에 대하여 진사할 것과 여하한 조치라도 동 검사에 대하여 감행할 수 있다는 것 등을 언명한 사실이 있었다.

김용찬 검사장 담 : 이번 사건은 사법부 위신에 관한 중대한 사건인 만큼 당국에서는 적당히 조치할 것이다. 나로서는 이에 대하여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

김홍섭 검사 담 : 검사 체면 문제에 대하여서는 검사총장이 적당히 할 것이고 내 자신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개인 문제이기 때문에 내가 적당히 처리할 터인데 나로서는 끝까지 내 주장을 고집할 것이다.

"배후 문제를 알고자 박, 전 양씨를 취조 중"

검사 모욕 배후 문제로 박기호, 전용순 양씨는 21일부터 불구속으로 강석복 검사로부터 엄중한 취조를 받고 있다. (<동아일보> 1946년 9월 24일자)

그 미군 장교가 누구인지는 확인 못했지만 그럴 만한 신분이 되니까 협박을 한 것 아니겠는가. 그것을 까밝히고 이 개가 짖게 한 놈이 누구냐고 달려들다니 김홍섭의 인격 중 다른 면은 몰라도 배짱 하나는 진짜 끝내주는 분이다. 그런 검사가 정판사 사건에서 소신에 어긋나는 구형을 할 수 있었을까? 11월 28일 선고 직후 변호인단의 성명에서도 "양 재판장"과 "조 검사"를 비난하면서 "김 검사"는 건드리지 않는 점이 눈에 띈다.

"조선의 해방을 위하여 피투성이의 투쟁을 해온 이관술 씨 등 애국 투사들에게 통화 위조란 허위의 낙인을 찍어 그들을 해방된 오늘날 또다시 철창 속에 얽어매려는 가증한 정치 모략이 성공하였다고 보는 자는 역사가 정의와만 어깨동무한다는 철칙을 모르는 저들 반동파에 불과할 것이다. 양 재판관과 조 검사의 불법과 기적과 비겁, 배리, 탈선의 오선(五線)무지개를 타고 월세계를 가려는 재판 태도를 관철하였으니 과연 이것이 인민에게 용납되겠는가?" (<자유신문> 1946년 11월 29일자)

이 사건에 대한 김홍섭의 인식은 10월 21일 논고에서 혁명 투사 박낙종에 대한 극진한 경의를 표한 다음 "나는 김창선이 공판정에서 죽고 싶다 말할 적에 2000년 전에 일어난 예수를 은 30량에 잡아준 가롯 유다의 비극을 상기했다"고 말한 데 담겨 있지 않았을까? 김창선에게는 범죄 사실이 있는데, 박낙종 등 다른 무고한 사람들이 말려든 것이라고.

미군정 혼자서 그 무고한 사람들에게 죄를 씌우려 달려들었다면 김홍섭은 극력 항거했을 것이다. 그러나 거짓 자백으로 정당한 판결을 어렵게 한 데는 공산당의 법정 투쟁 전술도 한 몫 했기 때문에 검사로서 자기 역할에 한계를 느낀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가 검찰을 떠난 시점을 확인하지 못했지만, 아마 정판사 판결 직후였던 것 같다.

설령 유죄라 하더라도 무기징역, 50년 징역이 제대로 된 양형일까? 이관술과 박낙종은 옥중에 있다가 4년 후 전쟁 발발 때 학살당했다. 그런데 그들의 목숨을 빼앗은 판결을 내린 양원일이 그들보다 앞서서 국군 병사의 손에 죽음을 맞았다는 것은 참 뜻밖의 일이다. 술에 취해 불심 검문에 저항하다가 총을 맞아 죽었단다.

3일 밤 9시 반경 고등법원 부장판사 양원일(38) 씨는 원종억 변호사와 대법원 대법관 김익진 씨 댁의 만찬 초대회에서 집으로 오는 도중 서울시 회현동 2가 동화백화점 뒤 육군본부 근무중대를 통과 중 당시 동 본부 입초병인 일등상사 이응주(21) 병사가 불심 심문을 하게 되어 옥신각신하던 중 전기 이 상사가 카빈총을 발사하여 양씨의 하복부를 관통시켜 놓았는데 서울검찰청 최 검사장(崔大敎)과 군부 측에서 헌병이 출동하여 전기 양 씨를 서대문 적십자병원에 곧 옮기어 가료하였으나 4일 4시 반경 절명하였다. (<동아일보> 1949년 3월 5일)

이응주 일등병사는 한 달 후인 4월 6일 중앙고등군법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양원일이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뽑으려다가 총을 맞았다는 증언들이(동행이던 원종억 포함)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자유신문> 1949년 4월 6일, 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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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 역사학자 (tyio@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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