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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네가 할 수 있는 일.2023.08.02.

조금 전만 해도 마법 이야기를 꺼낸 걸 곤란해하더니, 이제는 마법을 가르쳐주겠다고? 손바닥 뒤집듯이 바뀐 제르딘의 태도에 당황한 아이레네는 눈만 깜빡이며 그를 쳐다봤다.

“전하!”

제시도 당황했는지, 언성을 높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가씨에게 마법을 가르쳐주시겠다니.”

“무슨 말이긴. 말 그대로 마법을 가르쳐주겠다는 거지.”

반면 제르딘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비록 2서클 밖에 안 되긴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를 가르쳐줄 정도는 돼.”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아가씨께서 마법을 배우려면 주인님의 허락해야 해요!”

“그럼 받으면 되지.”

제르딘이 가벼운 어조로 대답하자, 제시는 인상을 팍 쓰며 머리를 짚었다.

“주인님이 허락해주실 리가 없잖아요.”

“그렇지. 내가 말하면 허락해주지 않겠지만, 그녀가 말하면 허락해줄 거야.”

제르딘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아이레네를 돌아봤다.

“그러니까 마법이 배우고 싶다면, 스승님께 배우고 싶다고 말해 봐. 그대가 말하면 분명 들어줄 테니까.”

  * 저녁 시간. 칼로스와 단둘이 저녁을 먹게 된 아이레네는 곁자리에 앉은 칼로스를 흘겨봤다.

‘정말로 내가 마법을 배우고 싶다고 부탁하면 허락해줄까?’

예전에 칼로스가 도망치는 것 외에 뭐든 해도 좋다고 말하긴 했지만……글쎄. 제시가 기함하며 주인님이 허락해 줄 리가 없다고 말한 걸 봐서, 칼로스는 아이레네가 마법을 배우는 걸 탐탁지 않아 하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제르딘의 말만 믿고, 칼로스에게 부탁하는 건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만약 제르딘의 예상이 빗나간다면 불벼락이 떨어질 게 분명했으니까.

‘하지만……배우고 싶어.’

정확히는 사람들이 왜 자꾸 자신과 마법을 엮는지 알고 싶은 거였다. 애꿎은 샐러드만 쿡쿡 찔러대며 어찌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아이레네는 식사가 끝나갈 때쯤, 용기를 내서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대공 각하.”

와인 잔을 들어 올리던 손이 멈췄다. 보라색 눈동자가 굴러 제게 닿자 아이레네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부탁하고 싶은 게……있는데요.”

아이레네가 먼저 부탁하는 경우는 굉장히 드문지라, 칼로스는 조금 의외라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뭐지?”

그녀가 뭘 부탁하든 간에 들어줘야지.

“마법을 배우고 싶어요.”

그렇게 다짐했건만, 1초도 안 돼서 다짐이 무너졌다. 칼로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아이레네를 쳐다봤다. 누가 봐도 언짢아 보이는 모습에 아이레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갔다. 치맛자락을 쥔 손에 힘이 더욱 들어간다.

“갑자기 왜 마법을 배우고 싶다는 거지?”

“도서관에서 우연히 마법 책을 봤는데…… 관심이 생겼어요.”

마법에 대한 관심은 칼로스를 처음 만난 날, 마법을 쓸 줄 아냐고 물어봤을 때부터 있었다. 그 뒤에 마법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를 많이 들어 관심이 점점 더 커졌고. 하지만 그 부분은 왠지 말하면 안 될 것 같아 숨겼다.

“그래서 마법 책을 보면서 혼자 공부하고 있었는데 황태자 전하께서 그 모습을 보곤 원한다면 자신이 마법을 가르쳐주겠다고, 대공 각하께 허락만 받아오면 된다고 하셔서…….”

알만하군. 제르딘이 아이레네를 부추겼다는 걸 바로 눈치챈 칼로스는 혀를 찼다. 그걸 제 부탁이 못마땅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한 아이레네는 자라처럼 목을 쑥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본 칼로스의 미간에 더욱 깊은 주름이 잡혔다. 일말의 양심 때문에 아이레네가 원하는 건 웬만해선 들어주고 싶었지만, 마법을 배우는 건 곤란했다. 마법을 이용해서 도망칠 수 있었으니까. 웬만하면 마법을 배우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거절하면 아이레네는 더욱 의기소침하겠지. 그녀와의 사이는 지금보다 더 멀어질 테고. 더구나 도망치는 것 외에 하고 싶은 건 뭐든 해도 좋다고 말해둔 터라 거절할 수가 없었다. 칼로스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우고 싶으면 배워.”

당연히 안 된다고 할 줄 알았는데, 허락이 떨어지자 아이레네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정말로 배워도 되나요?”

“그래.”

재차 확답을 들은 아이레네의 얼굴이 확 살아났다.

“감사합니다.”

목소리도 눈에 띄게 밝아졌다.

“별로.”

칼로스는 무심하게 대답하며 와인 잔을 들었다. 냉담한 겉모습과 달리 속으로는 그녀가 좋아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재미있는 짓을 벌였더군.”

아이레네가 좋아해서 다행인 것과 별개로 혼날 짓을 한 놈은 혼나야지.

“그녀를 이용할 생각을 하더니. 못 본 사이에 잔꾀가 늘었어.”

날카로운 지적에 소파 등받이에 느긋하게 기대앉아 있던 제르딘은 허리를 곧추세우고 입가에는 어색한 미소를 그리며 칼로스를 바라봤다.

“하하……역시 눈치채셨군요.”

칼로스가 어처구니없다는 어조로 대답했다.

“나를 그 정도도 눈치채지 못하는 바보라고 생각한 건가?”

“어휴, 그럴 리가요. 제가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짓을 벌였단 말이지.”

보라색 눈동자에 언짢은 기색이 서리자 제르딘은 두 손을 공손히 모으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아무리 생각해도 에스페르 성에 머물 방법이 그것밖에 생각나지 않아서…….”

제르딘이 아이레네에게 선뜻 마법을 가르쳐주겠다고 한 건 단순한 호의가 아닌 계획이었다. 아이레네의 마법 스승이 되면 칼로스는 어쩔 수 없이 에스페르 성에 머무는 걸 허락해줄 테니까. 칼로스는 아이레네가 제르딘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부터 그 사실을 눈치챘고, 제르딘이 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아이레네를 이용한 게 마음에 들지 않아 뭐라고 하는 거였다.

“이렇게까지 해서 여기에 남으려는 이유가 뭐지?”

이것도 궁금했고. 제르딘은 고민하는 듯 잠시 생각하더니, 슬며시 입을 벌렸다.

“오랜만에 스승님과 깊은 우정을 다지고 싶어서 남는다고 하면……안 믿어주실 거죠?”

“당연한 걸 묻는군.”

제르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대답하기 곤란한 듯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다닌다. 역시 뭔가 있군. 칼로스가 좀 더 자세하게 캐물으려는데 삐익, 기이한 소리가 들렸다. 제르딘이 차고 있는 팔찌에서 나는 소리였다.

“전령새가 도착했나 보네요.”

전령새가 도착하면 알 수 있게 마법 팔찌를 끼고 있었던 거였다. 칼로스의 질문에 뭐라 대답하면 좋을지 몰라 곤란하던 차였는데,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냉큼 자리에서 일어선 제르딘은 창문을 활짝 열고 마법 팔찌를 낀 팔을 쭉 뻗었다. 그러자 어른 팔뚝보다 조금 큰 새가 날아와 제르딘의 팔에 앉았다. 꾸륵-.

“옳지, 착하다.”

제르딘은 새를 횟대로 옮긴 뒤, 다리에 묶여 있는 쪽지를 풀었다. 제르딘이 에스페르 영지에 오기 전, 보좌관에게 부탁했던 조간 신문의 일부였다.

“여기요.”

“…….”

칼로스는 못마땅하다는 듯 제르딘을 일별한 뒤, 신문을 받아 펼쳤다. [에스페르 대공의 연인?]이라는 자극적인 헤드라인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기사 내용은 칼로스가 미리 제르딘에게 일러준 그대로 적혀 있었다. 그 외 아이레네가 마녀 누명을 벗었다는 것과 사실 평민이 아닌 황족이었다는 것까지 전부 적혀 있었다.

“혹시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바로 연락해서 시정하라고 할 테니.”

“마음에 안 드는 게 한 가지 있긴 하군.”

“뭔데요?”

“지금 네가 숨기고 있는 거.”

당연히 기사에서 문제점을 지적할 줄 알았는데 다른 이야기, 그것도 가장 곤란한 부분을 파고들자 제르딘은 어색하게 웃었다.

“한 번만 그냥 넘어가 주시면 안 돼요?”

“말을 못 하는 걸 보니, 나와 관련 일인 모양이지?”

“아…….”

제르딘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웃기만 하는 그때, 횟대에 앉아 깃을 고르던 새가 갑자기 푸드덕 날아올랐다. 칼로스도 창문 쪽으로 걸어가더니, 제르딘이 그랬던 것처럼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기괴한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거대한 그림자가 칼로스의 팔을 덮쳤다. 그림자의 주인공은 칼로스의 상반신만큼이나 큰 새였다. 머리가 두 개인 것부터 시작해서 눈이 여섯 쌍, 돌도 씹어먹을 만큼 커다란 부리와 날카로운 발톱 등 그냥 봐도 평범한 새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시무시한 생김새에도 제르딘은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앙겔레이아다. 앙겔레이아야.”

오히려 눈을 반짝거리며 괴물 새를 바라봤다. 당장이라도 저를 발라먹을 듯 쳐다보는 제르딘이 무서웠는지 괴물 새가 날개를 펄럭이며 기괴한 울음소리를 냈다. 칼로스는 곧은 등을 쓰다듬으며 진정시킨 뒤, 새의 다리에 묶여 있는 주머니를 풀었다. 주머니 안에는 쪽지가 밀랍으로 밀봉되어 있었다. 쪽지를 작성한 사람 외에 아무도 쪽지를 확인한 적이 없다는 의미였다.

“…….”

밀랍을 뜯어 쪽지의 내용을 확인한 칼로스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그는 종이를 구깃구깃하게 접으며 제르딘을 돌아봤다.

“기를 쓰고 에스페르 성에 남으려는 이유가 황후 때문이었군.”

정곡을 찌르는 말에 제르딘의 눈이 커졌다.

“황후가 어떻게든 내가 돌아가지 못하게 막으려고 하니까, 그걸 막으려고 에스페르 성에 남으려고 했던 거였어.”

“……제가 에스페르 성에 며칠 있다가 돌아갔는데도 아무 소득이 없으면, 어마마마도 포기하실 겁니다.”

칼로스가 픽, 웃었다.

“제 욕심을 채우고자 자식을 괴물에게 맡기는 어미가 과연 쉽게 포기할까?”

“…….”

할 말을 잃은 제르딘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제르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칼로스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팔을 약간 들었다. 그러자 그의 팔에 앉아 있던 괴물 새가 창밖으로 저 멀리 날아갔다.

“황후가 아이레네를 신년제 파티에 초대할 계획이라고 하던데.”

“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제르딘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칼로스가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이제 한 가족이 됐으니 황실의 다른 가족들은 물론 귀족들에게 소개해주고 싶다는 얼토당토않은 핑계로 그녀를 신년제 파티에 초대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럼 자연스럽게 칼로스가 보호자 역으로 따라올 테니, 황후는 그걸 노린 것이다. 아이레네를 황실 족보에 올린 순간부터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 시기가 너무 빨랐다. 게다가 신전이 아닌 황후가 이런 개수작을 부릴 줄이야. 신전에서 이러면 황실 핑계로 가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러면 핑곗거리가 사라지게 된다.

“귀찮게 됐군.”

칼로스가 짜증스레 혀를 차자, 제르딘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죄송합니다. 제가 어마마마를 말렸어야 했는데…….”

“됐다. 황궁을 떠난 네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

칼로스가 구깃구깃하게 접은 쪽지를 바닥에 떨어뜨리자, 길게 늘어져 있던 그림자가 솟구치면서 쪽지를 집어삼켰다.

“그러니 넌 여기서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해.”

그게 칼로스를 위한 일인지, 아니면 황후를 위한 일인지는 곁에 두고 지켜보면 알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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