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 왜곡 맞서 ‘이승만 바로세우기’… 하와이 이 女人의 집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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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3.11.28. 오후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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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덕이 만난 사람]
‘이승만의 하와이 30년’ 책과 다큐로 만든 이덕희 소장


하와이대학교 한국학 연구소에서 만난 이덕희 소장이 미국 이민 90주년을 기념해 발간한 한인이민 사진집 '그들의 발자취'를 펼쳐놓고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그는 “교육사, 여성사에 이어 교회사로서의 한인이민 연구가 자신의 마지막 작업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 소장은 찬송가 ‘부름받아 나선 이몸’을 작곡한 이유선 장로의 딸이다. /호놀룰루=김윤덕 기자

와이키키 해변은 눈부셨으나, 쿨라 콜레아(Kula Kolea) 거리가 주는 감흥엔 미치지 못했다. ‘한국 학교’라는 뜻의 쿨라 콜레아는, 1913년부터 25년간 하와이를 근거지로 독립운동을 펼친 이승만과 한인 동포들의 자취가 서린 곳. 교육이 독립의 근본이라고 믿은 이승만이 사탕수수밭 한인 노동자들의 자녀를 세계 시민으로 길러내기 위해 세운 한인기독학원이 여기 있었다. 이덕희 한인이민연구소 소장은 “한성감옥에 수감돼 있을 때 미국 교육제도에 관한 책을 섭렵한 이승만 박사는 여성도 배워야 한다는 인식이 박혀 있었고, 하와이에 오자마자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남녀공학제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호놀룰루시 도시계획과 공무원을 시작으로 도시·환경계획 분야에서 30여 년 일하며 이승만과 하와이 이민자들의 독립운동 연구에 매진해온 인물. 최근 TV조선이 방영한 다큐 ‘이승만의 하와이 30년’이 그의 동명(同名)의 저서를 토대로 제작됐다. ‘미스터 션샤인’의 모델로 알려진 황기환 지사의 하와이 이주 사실도 이 소장이 호놀룰루 항구 입항자 명부를 통해 확인했다. 하와이대 한국학연구소에서 그를 만났다.

하와이는 ‘작은 대한민국’

-한국학연구소 건물이 독특합니다.

“경복궁 근정전과 향원정을 모티브로 지었지요. 1973년 민관식 문교부 장관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해 100만불을 들여 건립했다고 해요. 저 아래 박 대통령 친필로 쓴 머릿돌이 보이지요?”

-다큐 ‘이승만의 하와이 30년’에 직접 출연도 하셨더군요.

“요새 책 읽는 사람이 없잖아요. 죄다 유튜브로 보고(웃음).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에 관한 영상들에 오류가 많더라고요. 이왕에 책을 냈으니 다큐로도 만들어보자 했지요. 제작 비용은 하와이에서는 건국대통령 이승만재단을 통해, 그리고 한국에서는 건국이념보급회를 통해 모금했습니다. 연세대 김명섭 교수와 제자분들, 이승만 학당도 많이 도와주셨어요.”

-이승만 대통령의 하와이 행적은 왜 중요합니까.

“그가 하와이에서 보여준 활동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독립운동과 차원이 달랐어요. 외교 활동을 중심으로 세계 시민으로서 한국인을 교육하고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데 중점을 뒀지요. 하와이 5000명 동포와 함께 나라 세우기를 준비한 거예요. 작은 대한민국이었죠.”

-그런데 이승만과 하와이 동포들의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독립운동을 무장운동의 개념으로만 여겨온 탓이에요. 하와이 이주 노동자들은 향학열을 갖춘 선각자들이었죠. 이들은 어려운 살림에도 200만달러에 가까운 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헌납해요. 상하이 임시정부 재정의 3분의 2를 차지했다고 하지요. 안중근 의사의 재판 경비도 하와이에서 모금돼 전달돼요. 그 명단이 남아 있어요. 이민 100주년이 돼서야 우리가 찾아낸 자료들을 토대로 하와이에서 펼쳐졌던 독립운동이 겨우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하와이 빅아일랜드에 경제적 자립을 목표로 이승만 박사와 동지촌 사람들이 설립했던 숯가마 터를 이덕희 한인이민연구소 소장이 둘러보고 있다./ 다큐 '이승만의 하와이 30년' 캡처

메모광 이승만이 남긴 회계 수첩

-다큐를 보니 이승만 박사와 동지회가 만들었던 숯가마터를 발견하고 무척 기뻐하시더군요.

“숲으로 뒤덮인 곳에서 100년 전 가마터와 숯을 운반하던 철로가 나왔으니까요. 이승만 박사는 빅아일랜드에 골프장 6개 크기인 963에이커 땅을 구입해 동지촌을 만들어요. 더 이상 사탕수수 농장 일을 할 수 없는 나이 든 동포들을 위한 경제 공동체를 만들고 독립운동 기금을 마련하려고 했지요.”

-이승만 박사가 숯 전문가는 아니었을 텐데요.

“그래서 대단하다는 거예요.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숯이 얼마큼 생산되고 소비되는지 공부하고 엔지니어들과 제조법을 연구해요. 화약 만드는 데 쓰이는 공업용 숯을 만들어 본토의 한 회사에 납품하려 했지요. 그런데 납품 수준을 맞추지 못해 계약이 파기돼요. 대공황까지 덮쳐 결국 1933년 파산하지요.”

-독립지사 김노디의 따님인 위니프레드 리 남바와 한인기독학원이 있었던 쿨레 콜레아를 둘러보는 장면도 인상 깊었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하와이에 와서 교육 활동부터 합니다. 한인중앙학교에 2대 교장으로 취임해 여학생도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1918년엔 한인기독학원을 설립해 한글과 한국사도 가르치지요. 올해 94세가 된 위니프레드도 한인기독학원 학생이었어요. 어머니 김노디 지사는 이 학교 교장을 지냈고요.”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든 다큐 ‘백년전쟁’에선 김노디 지사를 이승만의 정부(情婦)처럼 묘사해 물의를 빚었지요. 소장님은 김노디가 이 대통령의 양녀였다는 문서를 공개해 왜곡을 바로잡습니다.

“따님이 간직해온 김노디 지사의 유품에서 발견했죠. 1913년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 김윤종이 이승만 박사에게 어린 딸 김노디를 부탁하는 내용이지요. 김노디는 이승만·프란체스카 부부의 결혼식 사진도 갖고 있었어요. 프란체스카 여사가 자기 어머니한테도 보내지 못했을 결혼 사진을 김노디한테 준 거지요. 이런 사실도 이승만 부부와 김노디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결국 문재인 정부도 2021년 김노디 지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합니다.”

-이승만을 하와이 깡패라고 표현한 민족문제연구소처럼 건국 대통령을 흠집내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승만은 고집불통이었다, 동포사회를 분열시켰다, 사치스러웠다 같은 모함들이지요. 물론 이 박사의 성격이 온화하고 포용적이진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러나 하버드와 프린스턴에서 석·박사를 하고 온 이승만과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 동포 사회에 얼마나 있었을까요. 또, 사치스러웠다는 비난과 달리 이승만 박사는 돈에 철저했어요. 메모광으로 불렸던 그의 회계수첩들을 보면 기가 막혀요.”

-어떤 내용들이 적혀 있습니까.

“지원금, 출장 경비, 커피값 영수증은 물론 머리를 얼마 주고 깎았다, 지팡이를 얼마 주고 고쳤다 등등 단돈 1전의 용처까지 전부 기록해요. 이승만 기념관이 건립되면 이 수첩을 펼쳐서 꼭 전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웃음). 그저 턱시도 입고 찍은 사진이 있으니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고 비판하는데, 아니 그럼 미국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데 거지처럼 하고 가야 할까요?”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의 용처를 기록했던 회계수첩. 이덕희 소장은 "이승만 기념관이 건립되면 이 수첩은 꼭 전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덕희 한인이민연구소장

김노디 유족 소장
김노디 지사가 보관하던 이승만 부부 결혼사진. 이승만은 1934년10월 뉴욕에서 프란체스카 여사와 결혼했으나 결혼 사진은 그동안 알려진 적 없다. 이덕희 하와이한인이민연구소장이 김 지사 딸 위니프레드 리 남바씨가 간직한 이 사진을 본지에 공개했다. 이덕희 소장은 "이승만은 당시 결혼식 촬영을 할 만큼 경제적으로 여유도 없었을 것"이라며 "이런 희귀한 사진을 김노디 지사가 소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승만과 김노디가 '부녀'같은 관계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나 역시 4·19세대이지만…

-4·19혁명으로 하야한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에서 보낸 쓸쓸한 말년도 다큐에 소개했더군요.

“대통령 내외가 살던 마키키 집에 손님들이 오면 프란체스카 여사가 탱이라는 오렌지 분말가루를 물에 타서 오레오 쿠키와 내놓으셨대요. 그만큼 궁핍한 말년을 보냈지요. 귀국 전날 당국의 불허 통보를 받고 쓰러져 입원한 마우날라니 요양원에서 내 뼈는 반드시 조국에 묻어달라고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다짐을 받는 대목은 정말 가슴이 아프죠. 하와이 동포들이 묘비로 세울 돌을 보내드릴 때까지 국립현충원 이승만 묘지엔 비석 하나 없었습니다.”

-하와이는 이승만 대통령에겐 제2의 고향 같은 곳이었겠군요.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이승만 대통령은 하와이 동지회와 교감했어요. 이 대통령이 MIT 공대 같은 학교를 세워야겠다고 하자 하와이 동포들은 폐교된 한인기독학원 부지를 매각해 설립 자금으로 보내지요. 그렇게 세워진 학교가 인하공대예요. ‘인천’과 ‘하와이’의 머릿글자를 따서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이름을 지었어요. 하야 후에도 하와이로 초청해 돌아가실 때까지 생활비를 다 댔을 만큼 하와이 동포들은 이승만의 우군이자 동지였습니다.

-야당의 반대 속에 국가보훈부가 이승만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어느 지도자에게나 공과(功過)가 있어요. 그러나 건국 대통령을 위한 기념관, 도서관 하나 없다는 건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이죠. 좀 더 너그러워질 순 없을까요?”

-소장님은 4·19세대에 해당하는데 이승만 대통령을 왜 높이 평가합니까.

“우리 역사 교육이 ‘태정태세문단세’ 외우다 끝나는 식이라 근현대사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요. 게다가 내가 대학 2학년 때 4·19혁명이 났으니 이승만은 무조건 독재자였죠. 그런데 하와이에서 알게 된 이승만 박사의 삶은 그동안 알고 있었던 것과는 많이 달랐어요. 그는 공산주의에 대항해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지켜낸 역사적 지도자였지요.”

1965년 7월 27일, 이승만 대통령 장례식 모습. 영결식이 열린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에서 남대문과 제1한강교를 지나 동작동 국립묘지까지 100만명의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 고인을 애도했다./공보처

역사의 퍼즐을 맞춰가는 보람

-호놀룰루시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이민사와 이승만에 관심을 갖게 된건가요?

“하와이 왕국 시절에 이민 온 중국인, 일본인들이 그들의 이민 역사를 크게 기념하는 걸 보면서 한인 이민사에 궁금증이 생겼죠. 그런데 자료가 거의 없더군요. 그래서 한인 이민 90주년이던 1993년을 앞두고 엔지니어링 회사를 경영하던 김창원 회장과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여러 행사를 기획하고, ‘그들의 발자취’라는 제목의 한인 이민 사진집을 발간합니다.”

-2004년부터는 직장도 그만두고 한인이민사 연구에 올인하더군요.

“100주년이 지나도 아무도 연구를 안 하니 에라 모르겠다 하고 뛰어들었죠. 당시 한인신문이었던 ‘국민보’를 성경책보다 더 많이 읽었어요(웃음). 그 시절 문장과 단어들이 정말 흥미로웠죠. ‘사교회’는 ‘사회’, ‘소문’은 ‘소식’이란 뜻이에요.”

-이승만 자료도 그렇게 구축해나가셨군요.

“신문과 잡지는 물론이고 ‘하와이 주정부 문서기록원’ ‘하와이 주정부 토지 및 자연자원국’ ‘부동산 기록원’의 부동산 매매등록 자료, 하와이 전화번호부, 옛 지도 등 다양한 자료를 토대로 이승만 박사의 활동 시기와 장소를 확인하고 점검하는 작업이었죠. 호놀룰루시에서 일한 경험이 큰 도움 됐어요.”

-한인 이민자 명단, 특히 ‘사진 신부’들의 명단도 만들었다고요.

“한인이민사는 여성사이기도 해요. 남성들이 하와이에 정착한 뒤 이들의 사진만 보고 결혼하기 위해 한국을 떠난 ‘사진 신부’들이 1910년부터 1924년까지 680명이 옵니다. 이들은 대부분 글을 읽을 줄 알고 학교를 다닌 여성들이었어요. 그런데 막상 하와이에 오니 남자들은 사진과 달리 이미 나이가 들어 사탕수수밭에서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죠. 그래서 사진 신부들은 오자마자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요. 손양원 목사님의 누님도 하와이로 온 사진 신부였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두 아들을 총살한 공산당 청년을 양아들로 삼았다는 목사님 말씀인가요?

“맞아요. 얼마 전 한국에서 손 목사의 큰 누님이 사진 신부로 하와이에 갔다는데 그 후손들을 찾아줄 수 있느냐는 문의가 왔지요. 찾아보니 손봉련이 1913년 일본 여권을 발급받아 1914년 하와이로 왔다는 기록이 있더군요. 김수천과 결혼에 네자녀를 낳은 것으로 확인됐지요.”

-국가보훈부에서도 협조 요청이 많이 오겠군요.

“걸핏하면요, 하하! 얼마 전엔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모델이었다는 황기환 지사가 하와이로 이주했는지 알아봐달라고 해서 제가 호놀룰루항에 입항한 날을 확인해 알려드렸습니다.”

-그런 작업이 즐거운가요?

“역사의 퍼즐을 맞춰가는 재미랄까요. 사람들이 도대체 저 여자는 돈 안 되는 일을 왜 저리 열심히 하냐고 하는데, 그런 기쁨이 큽니다(웃음).”

-하와이를 알려면 이덕희 소장을 알아야겠습니다.

“내가 역사학자는 아니었잖아요. 그런데 누구든지 20~30년 파고들면 전문가가 돼요. 내가 맨날 하는 소리가 ‘호랑이 굴에 호랑이가 없어서 토끼가 왕 노릇 한다’예요, 하하!”

하와이대학교 한국학 연구소에서 조선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는 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 소장. 그는 젊은 학자들이 이승만과 한인이민사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호놀룰루=김윤덕 기자

☞이덕희

1941년 태어나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UC버클리에서 사회학, USC에서 도시계획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68년부터 호놀룰루시 공무원을 시작으로 도시환경계획가로 일하면서 한인 이민자 명단, 안중근 의사 의연금 모금 명단 등 하와이 독립운동사 연구를 뒷받침할 자료를 발굴해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100년사’ 등 여러 저서와 논문을 펴냈다. 2014년 ‘이승만의 하와이 30년’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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