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승전 정부 탓… 부모와 의절 부르는 ‘정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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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3.03.09. 오후 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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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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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진단명 정치병 上]
사진설명=박상철 화백

정치병은 병적으로 정치에 집착하는 행위를 일컫는 표현이다. 물론 의학적 진단명은 아니다. 정치의 중요성은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지만 모든 사안을 정치와 연관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시도 때도 없이 정치적 신념을 설파하다가 무언가 잘못되면 정치인이나 정부 탓을 한다. 스트레스는 주변인의 몫이다. 아무리 말려도 사그라지지 않는다. 정신건강과 어떤 연관성이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정치가 게임, 도박처럼 사람을 중독시키기라도 하는 걸까.

사람 잡는 정치 얘기 “부부싸움에 부모와 의절도 많아…”
대다수 일반인은 정치 얘기에 신중하게 접근하거나 아예 꺼린다. 갈등의 기폭제인 걸 알고 있어서다. 정치 얘기는 온라인상 혐오 표현은 물론 폭력 사건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지난 2021년, 정치적 성향을 두고 말다툼을 하다 격분해 친구에게 흉기를 휘두른 50대 남성이 실형을 받는 일이 있었다. 2018년엔 정치적 견해 차이가 살인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아주 사소하거나 연관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곳에서도 정치 얘기를 꺼내는 사람들이 많다. 따로 조사 결과가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전문가들은 주변인의 정치적 성향과 신념 탓에 고통 받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데 공감한다. 김병수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병수 원장은 “정치적 차이로 인해서 부부 싸움은 물론 부모와 의절한 자식의 사례도 심심치 않게 본다”며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환자처럼 많지는 않지만 확실히 과거엔 이러한 문제로 상담한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가천대 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조서은 교수도 “주변인의 정치 얘기나 특정 정당 때문에 흔히 말하는 화병에 걸렸다며 찾아오는 환자들이 종종 있다”고 말했다.

정치 얘기, 타협하기 어려운 주제 두고 서로 분노하는 셈
정치는 왜 갈등으로 이어질까. 먼저 개인의 정치적 성향 자체가 타협하기 어려운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한국과 같은 정당정치 위주 국가에서 정치적 성향은 정당일체감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정당일체감이란 선호하는 정당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심리다. 정당일체감은 지지정당 뿐만 아니라 투표 등의 정치적 행동에도 영향을 끼친다. 여러 논문에 따르면 정당일체감은 부모의 지지 정당, 출신 지역, 정치적 이벤트 등에 의해 형성되는데 평생에 걸쳐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만약 정치적 성향이 달라 타협하기 어렵다면 우리는 쉽게 흥분한다. 이러면 상대의 약점이나 자신의 정당성에 과도하게 집착하게 된다. 김병수 원장은 “흥분하거나 분노하면 그 감정에 맞는 생각과 현상만 눈에 들어오고 결국 자신의 분노를 정당화하는 정보에만 집착하게 된다”며 “정치처럼 옳다 그르다와 관련된 사안이 불러오는 감정은 타인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거나 자신은 결백하다는 생각에 빠져들게 만들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정치병, 정신질환·중독이라 보기 어렵다
갈등이 불 보듯 뻔한데 정치 얘기를 일삼는 까닭은 뭘까? 일단 정신건강에 문제가 있다고 예단할 수는 없다. 정치병은 정신질환이 아니다. 정치 얘기에 대한 집착이 기능 영역에서의 장애를 초래하지는 않기 때문. 정신질환의 중요한 요건 중 하나는 사회적, 직업적 어려움이다. 조서은 교수는 “정치적 성향은 자아와 동질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본인이 문제가 있다고 여길 가능성이 낮다는 걸 뜻한다”며 “분위기를 파악하는 능력이 다소 부족할 순 있겠지만 사회적, 직업적 영역에서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으므로 정신질환의 범주에 들어가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정치에 중독의 요소가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중독은 특정 약물이나 행위에 의존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상태를 뜻한다. 갈망, 내성, 금단현상을 특징으로 한다. 게임, 도박 등이 행위중독으로 분류되는 까닭은 쾌락에 둔감해져 점점 더 큰 자극을 찾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치에서는 애초에 일반인이 쾌락을 느낄 수 있는 지점을 찾기 어렵다. 과도하게 정치에 집착하는 사람이라도 주변인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성격·정서장애 원인일 수 있지만… “100명 중 1명도 안 바뀐다”
다만 정치에 집작하는 정도가 망상이나 편집증적인 믿음에 가깝다면 성격장애가 원인일 수는 있다. 자신이 정치적으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거나 사실이 아닌 것에 괜히 집착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김병수 원장은 “자기애적 성격장애나 편집적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이 가진 믿음이 비합리적이고 현실적이지 않아도 바꾸려하지 않는다”며 “그 믿음에 근거해 주변 사람과 갈등을 일으키고 지나친 행동이나 표현을 서슴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우울증이나 불안장애가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우울증은 인지기능을 떨어뜨리는데 이러면 사람이나 특정 사안에 집착하게 될 수 있다. 고대안암병원 정신건강의학과 한규만 교수는 “실제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등 정서장애를 겪는 환자들 중 일부는 정치적인 이슈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며 “50~60대 남성들에게서 많이 보이는 특징인데 은퇴 후 무력감을 느끼는 상황에서 자신감을 갖고 얘기할 만한 주제가 정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결국 정치는 가치관의 영역이다. 가치관에 대한 집착을 치료 대상으로 보기는 어렵다. 우울증이나 불안장애가 원인이라면 약물을 써볼 수도 있겠지만 성격장애는 치료도 쉽지 않고 애초에 당사자가 병원을 방문할 가능성도 낮다. 결국 스트레스를 받는 주변인의 태도가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요소다. 조서은 교수는 “듣는 사람 입장에서 상대방을 바꾸려고 논쟁을 시도할 수 있겠지만 100명중에 1명도 바뀌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며 “차라리 심리적 거리감을 두면서 또 한 편으로는 상대방이 왜 정치에 집착하게 됐는지 헤아려 본다면 한 결 마음이 편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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