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년 전인 1919년 2월 8일 오후 일본 도쿄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600여명의 한국인 유학생이 모여 '2·8 독립선언'을 발표했다.
시대적 상황을 고려했을 때 당시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한국인 학생들은 최고의 조선인 엘리트 집단으로 평가받았다. 침략국에 건너가 지식을 쌓으면서도 강점된 조국의 독립을 간절히 바랐던 셈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1910년대 일본에 있던 한국인 유학생들은 △조선기독교청년회 △조선유학생학우회 △조선학회 △조선여자친목회 등을 결성해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자 노력했다.
이들이 독립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1914년) 이후였다. 학계는 특히 1918년 세계 대전 종전 때 미국이 발표한 평화원칙, 휴전조약 등 내용이 유학생들에게 직접적인 자극을 줬을 것이라고 봤다.
조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한 유학생들은 1919년 1월 6일, 도쿄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웅변회를 열고 "조선 민족의 독립 운동에 가장 적합한 시기가 왔다"며 "미국 등 해외에 있는 동포들이 이미 실행 운동에 착수했으니 우리도 마땅히 구체적 운동에 나서야 한다"고 결의했다.
독립 운동에 나서기 위해 유학생들은 10인의 실행위원을 선출했다. 최팔용과 서춘, 백관수, 이종근, 송계백, 김도연, 김상덕 등이 실행위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실행위원 1명이 사퇴한 뒤 이광수, 김철수가 합류하면서 실행위원은 11명으로 조정됐다.
실행위원 11명은 독립선언서 작성에 나섰다. 웅변회 개최로부터 한 달이 지난 1919년 2월 7일, 실행위원들은 완성된 독립선언서 600부를 제작했다. 이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고자 이날 밤 김희술의 집에 모여 몰래 독립선언서를 만들었다.
독립선언 실행 당일, 유학생들은 600여명의 회원이 모인 김에 어떻게 독립 운동에 나설 것인지 실행 방법까지 논의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런 계획은 현장을 급습한 일본 경찰의 강제 해산 명령 때문에 실패했다. 일본 경찰은 실행위원 10명을 현장에서 체포하기도 했다.
이후 유학생 100여명은 1919년 2월 12일에 도쿄 히비야 공원에 다시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려고 했지만, 미리 정보를 파악한 일본 경찰에 의해 핵심 회원 13명이 붙잡히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2·8 독립선언'은 1919년 3월 1일부터 한반도에서 진행된 '3·1 운동'의 도화선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1919년 4월 11일)과 1920년대 반복됐던 청년 및 학생들의 항일 투쟁 활동에 불씨를 지핀 것으로 평가된다.
2·8 독립선언서에 포함된 결의문 내용 1. 본단(本團)은 일한 합병이 오족의 자유의사에 출치 아니하고 오족의 생존 발전을 위협하고 동양의 평화를 요란케 하는 원인이 된다는 이유로 독립을 주장함.
2. 본단은 일본 의회 및 정부에 조선민족대회를 소집하야 대회의 결의로 오족의 운명을 결할 기회를 여하기를 요구함.
3. 본단은 만국평화회의에 민족자결주의를 오족에게 적용하기를 요구함. 이 목적을 전달하기 위하야 일본에 주재한 각국 대사에게 본단의 의사를 각해 정부에 전달하기를 요구하고 동시에 위원 3인을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함. 이들 위원은 기히 파견된 오족의 위원과 일치 행동을 취함.
4. 전제 항의 요구가 실패될 시에는 일본에 대하야 영원히 혈전을 선함. 차로써 발생하는 참화는 오족이 기책을 임치 아니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