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장교 출신이 본 가미카제···‘죽음의 운명공동체’는 어떻게 작동하는가[책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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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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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시대 일본군 심층 인터뷰
전체주의 국가의 통치 구조 엿봐
죽음의 운명적 평등성 전제로
총력전 체제에서 강요된 폭력성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선전물. “일기명중으로 신주(일본을 신의 땅으로 부르는 명칭)를 지킨다. 아아, 가미카제 특별공격대. 충렬이 만세에 빛나리”라고 쓰여 있다. 오월의봄 제공.




너희는 죽으면 야스쿠니에 간다

박광홍 지음 | 오월의봄 | 256쪽 | 1만6500원

일본의 가미카제(神風) 특공대는 한국인에게도 잘 알려져있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군은 연합군 함대에 비행기 자폭 테러를 시도했다. 이 전술을 시행하기 위해 육해군을 합쳐 약 5000여명의 장병들이 특공 출격했다가 목숨을 잃은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일본은 특공을 주된 전법으로 택하고 이를 요란하게 선전하고 독려했다. 거리에는 “일기명중(一機命中)으로 신주(神州·일본을 신의 땅으로 부르는 명칭)를 지킨다. 아아, 가미카제 특별공격대. 충렬(忠烈)이 만세에 빛나리”라고 쓰여진 선전물이 뿌려졌다.

제주도 토박이인 박광홍씨는 전후 50년도 더 지난 때에 제주도에서 가미카제 특공대의 흔적을 마주쳤다. 집 근처 외돌개 해안 곳곳에 나 있던 부자연스러운 ‘구멍’들. 일본군은 전쟁 당시 제주 해안가에까지 인공동굴을 파두고, 자폭 보트인 ‘신요’를 배치했다. 어린 박씨는 “도대체 어떤 ‘대의’가 자기 자신의 존재를 내던지는 것마저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라는 의문을 품었다. 훗날 박씨는 해병대 장교로 전역한 후 일본군의 정신주의를 파헤치고자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너희는 죽으면 야스쿠니에 간다>는 그가 제국 시대 일본군 세 명을 만나 심층인터뷰한 후에 완성한 석사논문을 토대로 재구성한 책이다. 실제 전쟁 체험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한반도를 식민 지배했던 사람들의 의식과 심리, 사상통제를 통한 전체주의 국가의 사회통치 시스템을 엿본다.

미군 전함으로 돌진하고 있는 가미카제 공격기. 오월의봄 제공.


책은 제국 시대 일본군의 생애사를 바탕으로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하는 형태로 전개된다. 1925년생인 기시 우이치(인터뷰 당시 나이 96세)는 코노하나 상업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3년 여름 ‘해군비행예과 연습생’(요카렌)에 지원해 그해 12월 합격 통지를 받았다. 그는 부모님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군에 지원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당시 제국 일본의 중요한 전쟁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의 전사 소식이었다. “ ‘아, 역시 야마모토는 기쁘게 죽었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야마모토는 이미 스스로 죽음을 각오하고 나간 것이니까요. (…) 이제는 우리가 나가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자는 기시 우이치와 같은 소년들조차 위기에 직면한 조국을 위해 요카렌 지원을 하게 만든 동력을 ‘죽음의 운명공동체’라는 개념을 가져와 설명한다. ‘죽음의 운명공동체’는 역사사회학자 야마노우치 야스시가 저서 <총력전 체제>(2015)에서 논한 개념이다. 근대국가인 일본에서 전쟁은 “좁은 의미의 전선 전투”를 넘어 “국내 일상생활 전 영역의 동원”을 전제로 의미와 범위가 확대됐다. “죽음의 운명적 평등성을 전제로 하는 국민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세속 생활까지 지배하는 “사실상의 종교”가 됐다.

자발적으로 입대한 기시 우이치와 달리, 히로토 아키라는 대학생 징병유예 혜택이 폐지되면서 해군병과 예비학생 제4기로 입대했다. 히로토는 군 입대 후에 일본군 특유의 ‘연대 책임’을 내면화한다. 그는 “이기든 지든 전혀 상관없었다”라고 말하면서도 “어쨌든 자신의 맡은 바 임무를 다하는 것만이 필요하거든요”라는 정신을 강조한다. 또 전쟁터에서 죽음을 불사하고 앞장서 나갔을 때 병사들이 자신을 따르던 경험을 풀어놓는다. 저자는 “극도의 불안과 동요에도 불구하고 결국 군의 정신교육을 통해 개인이 죽음의 각오를 다지게 되는 과정”을 히로토의 이야기에서 찾는다.

가미카제 특공대는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등장했다. 1944년 8월, 인간어뢰 카이텐과 자폭 보트 ‘신요’가 ‘신병기’로서 정식 채용됐다. 신요는 얇은 합판으로 만든 베니어 보트로, 약 5m 크기의 보트에 250㎏의 폭약이 탑재됐다. 특공대에는 기시와 같은 요카렌 출신의 10대 중후반 소년들이 주로 배치됐다. 무시무시한 명성과 달리 특공의 전과는 미미했다. 신요 공격에 의해 격침된 연합군 함선의 숫자는 미국 측 추산에 따르면 4척에 불과했다. NHK가 2009년 방위연구소를 인용해 보도한 바에 따르면 인간어뢰 카이텐의 명중률은 2%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야스쿠니 신사’는 “일상화된 죽음의 동요를 억제하는 강력한 장치였다”. 기시는 “우리로서는 실로 야스쿠니 신사라고 하는 것은 신성한 존재였던 것입니다. (…) 왠지 이제 꿈같은 이야기지만, 어쨌든 ‘야스쿠니에서 만나자!’라는 식으로 되어버린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전쟁에는 다소 비판적인 입장을 보인 히로토는 야스쿠니 신사를 부정하는 논의에 거부감을 드러낸다. “군국주의의 뿌리, 상징이라는 식으로 말하지만, 저는 생각이 달라요. 다들 말이죠, 나라를 위해 헌신한 거잖아요? 그렇죠? 어느 나라든 나라를 위해 죽은 사람을 위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잖아요.”

오키나와전투에 특공대로 투입된 소년 비행병들. 오월의봄 제공.


저자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당시를 살았던 일본의 군인, 군속과 내가 본질적으로 다를 것 없는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전쟁 수행을 위해 그 보편성마저 지워내고자 했던 총력전 체제의 폭력성을 다시금 곱씹어볼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 폭력성은 시대를 넘어 한국 사회 일부에서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저자는 “우리들은 방패 없이 바다와 모래에서 독수리 되어 날은다” “싸워서 이기고 지면은 죽어라”는 해병대 군가의 구절들을 떠올린다. “구체적인 형태와 양상은 다를지언정, ‘죽음의 운명공동체’는 오늘날 세계에서도 여전히 기능하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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