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스트에게 있어 ‘수치심’이란, 그 어떤 방식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감정이므로, 이 감정을 직접적으로 마주하기보다는 철저히 부정하거나 외부로 투사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예컨대, 누군가가 명백히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순간에도, 나르시시스트는 곧장 자신을 방어할 수단을 찾는다. 그 결과 한눈에 보기에도 뻔뻔해 보이거나,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처럼 비칠 때가 많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라, 수치심을 조금이라도 느끼는 순간 내면이 무너질 것 같은 공포 때문에 필사적으로 ‘나는 잘못이 없다’고 주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심리 뒤에는, 그들이 겪어야 할 감정적 고통을 다룰 만한 건강한 심리적 기제가 충분히 발달해 있지 않다는 점이 자리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이별 후에도 상대가 보내는 신호가 완전히 끊어지지 않을 때, 우리는 혼란스러워진다. ‘우리 그냥 친구로 지내자’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처음 들었을 때는 성숙하고 개방적인 제안처럼 보이지만, 과연 그 말이 그대로 받아들여도 되는 말일까? 혹시 한쪽은 여전히 미련을 가지고 있는데, 친구라는 명목 하에 관계를 유지하려다 더 큰 상처를 받게 되는 건 아닐까? 진정한 친구 관계는 서로에게 더 이상 감정적 미련이 남아 있지 않을 때에만 가능하다. 하지만 많은 경우, 한쪽은 여전히 상대를 향한 애정을 품고 있거나, 혹은 감정적으로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친구라는 이름으로 관계를 이어가려 한다. 이럴 때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친구로 지내려다 보면 상대의 행동 하나하나에 다시 기대를 걸게 되고, 결국 스스로를 감정적으로 소진시키
오늘의 나에게 하고 싶은 말 입니다. 감사합니다.
전 여친을 만나며 항상 느꼈던 부분이 나에게 열등감을 느끼나 였습니다. 제가 벌어들이는 수익이 많지도 적지도 않지만 지금껏 현재의 나에 만족하며 그 안에서 모든걸 해결하려 했고 저희 가족 구성원들이 화목하고 관계가 끈끈하여 니것내것 따지는것 없이 전부 친구처럼 지냅니다. 그런 저를 보는 상대는 그렇게 생각안하더군요. 항상 저를 보며 너처럼 팔자 좋은 인간이 부럽다, 난 뭐빠지게 일하고 쉬지도 못하고 이러는데 아무 생각없이 미래에 대한 걱정없이 사는 너가 한심하다 라는 말을 상당히 비꼬면서 말을 하였었죠. 저의 관점에서만 보면 상대가 조금만 마음을 내려놓으면 얼마든지 자신의 위치에 맞게 편하고 행복할 수 있는데 말이죠. 그냥 각자의 입장과 상황이 달라서 그런가 보다 하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얘기를 들을수록 저의 자존감은 깍여 내려갔고 뭔가 제가 이 사람에게 큰 죄를 지은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상대가 원하는대로 상대가 바라는걸 해줘야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는 생각이 짙어져 많은 걸 상대에게 희생하였습니다. 이별 후 몇 개월이 지난 지금은 일, 운동, 취미 생활에 집중하며 원래의 제 모습을 서서히 찾아가는 중이고 현재의 제 삶에 엄청 만족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다만 얼마전 그 상대에게 "명절에 시간되면 같이 밥 먹자" 문자가 왔는데 분명 또 나를 갉아먹으려고 한다는 생각은 하였지만 제가 정말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었어서 그런건지 한편으론 제 마음이 또 변덕을 부립니다. 물론 아직 만나진 않았지만 마음은 자꾸 만나볼까 라는 쪽으로 강하게 가고 있습니다. 누가 그랬었는데 나르와의 관계는 늪이다 라는 말이 심히 공감됩니다.
현재의 제 얘기 같네요. 쓰신 글의 내용 그대로의 감정이 느껴지고 있는 중입니다. 정신 차리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저도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화난 4살 어린아이의 마음과 정신을 가지고 살고 있는게 보입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 단 1발 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몸만 큰 어른아이의 모습을 가지고 대충 막 사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걸 인지도 못하니 그냥 사는것 이겠죠. 이런 현실이 어찌 보면 기가 막힙니다만 모두 어리석은 자신이 잘못된 생각과 사고습관으로 행한 결과임을 이제는 압니다. 운영자님의 글에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이전 이야기, “더 좋은 대학, 더 예쁜 외모, 더 많은 재산(능력)을 가진 남자!" 딸이 무언가 성취를 이룰 때마다 엄마는 말한다. “그래 잘 했어, 앞으론 더 잘할 수 있지?” 엄마의 이 한마디는 겉으로는 격려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딸의 내면에 끊임없는 불안과 자기 의심을 심는다. 딸은 엄마의 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지만, 그 기준은 좀처럼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높아질 뿐이다. 이 반복은 딸로 하여금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억누르게 만들고, 결국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혼란을 느끼게 만든다. 더 좋은 것을 강요하는 엄마에게 자란 딸이 겪는 후유증 끝없는 불안과 두려움: “이 정도로는 부족하지 않을까?” “더 나은 대학”, “더 완벽한 외모”, “더 많은 재산을 가진 남자”에 대한 엄마의 요구가 반복되면,
이전 연애 유형 테스트를 통해 4가지 연애 유형을 알아보았다. 이번 장에선 그중 하나인 낭만적 사랑 유형이 어떻게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지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운명이라는 단어가 주는 설렘은 누구에게나 달콤한 이미지로 다가올 수 있다. 한눈에 딱 느낌이 와야만 비로소 사랑이 시작된다고 믿는 태도는 얼핏 보면 참 낭만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상담을 하다 보면, 이 믿음이 오히려 새로운 만남을 가로막는 함정이 될 때가 많다. “사람을 만나고 싶어도 만날 곳이 없어요.”라고 말하는 내담자의 고민은 꽤 흔하다. 실제로 사회생활에 치여 인맥이 줄어드는 시기가 오면, 만나는 사람들의 폭이 적어지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 여러 가능성이 열려 있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내 ‘운명’을 못 만났을 뿐”이라고 단정 지어버리는 태도
지연은 조용한 카페 한편에 앉아 민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오늘 하루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을 함께 나눌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약속 시간보다 10분 늦게 도착한 민수는 피곤해 보였으나, 특별히 기분이 나쁜 듯한 기색은 아니었다. 지연은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오늘 많이 바빴어?” 민수는 잠시 숨을 고른 뒤 간단히 대답했다. “어, 일 좀 밀려서.” 지연은 상대의 기분을 풀어 주고자 다정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이었다. “아까 톡에 답장이 짧아서 조금 서운했어. 내가 뭔가 잘못했나 싶더라고.” 그러나 그녀의 말이 끝나자 민수의 표정은 눈에 띄게 굳었고, 이내 차가운 말투가 뒤따랐다. “내가 뭘 잘못했단 거야?” 지연은 당황했지만,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려 애썼다. “아니, 그런
이별 후, 상대방이 내게 연락을 하거나 애매한 태도를 보일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혹시 아직 미련이 있는 게 아닐까?’ 혹은 ‘그래도 나한테 감정이 남아 있어서 이러는 걸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애매모호한 신호는 혼란을 일으키기에 딱 좋다. 그러나 그 이면을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상대가 나에게 관심이 남아서라기보다는 스스로의 외로움이나 불안감을 달래기 위해 보내는 신호일 수도 있다. 이번 글에서는 이별 후 헤어진 연인으로부터 오는 여러 가지 ‘모호한 신호’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지,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한 현명한 대응 방법은 무엇인지 다뤄보려고 한다. 흔히 볼 수 있는 ‘혼란스러운 신호’의 사례 이별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은 상황을 한두 번쯤 겪었거나 주변에서 들어봤을 것이다. 안부 인사 “밥은
나르시시스트 엄마는 딸에게 “더 나은 대학에 가라”, “더 완벽한 외모를 갖춰라”, “재산(능력)이 넉넉한 남자와 결혼하라”라는 식의 요구를 쏟아내는 경우가 많다. 이를 얼핏 보면 부모 입장에서 딸을 아끼고, 좀 더 나은 삶으로 이끌려는 의도라고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요구는 엄마 자신이 얻고자 하는 만족감과 자아도취를 위한 도구가 될 때가 많다. 딸 입장에서는 엄마가 원하는 기준에 맞춰야만 사랑받고 인정받을 수 있다고 느끼며, 그 기준이 때론 지나치게 높거나 가변적일 때가 있다. 따라서 딸은 “더, 더”를 외치는 엄마의 목소리에 매여 끊임없이 압박을 받게 된다. 이러한 메시지는 딸로 하여금 “지금 내 수준으론 엄마에게 충분하지 않다”는 불안과 “그렇다면 어디까지 올라가야 엄마가 만족할까?”라는
이전 글인 연애 유형 테스트에서 드러난 네 가지 방향성은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과 기대치를 어떻게 형성하는지 보여주는 흥미로운 단서다. 낭만적 사랑을 꿈꾸는 유형은 연애 전반에 대한 이상적인 판타지를 품고, 완벽한 사랑을 꿈꾸는 유형은 상대방이 이상적 존재이길 바란다. 준비된 연애를 추구하는 유형은 자신이 완벽한 태도로 사랑에 임하길 바라며, 현실적인 연애 추구형은 실제 상황에 맞춰 사랑을 진행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낭만적 사랑 유형은 극적인 감정을 원하고 감동적인 순간을 추구한다. 이들은 관계 초기에 쉽게 고양된 감정을 맛보지만, 일상에 가까워질수록 스스로 그려온 환상과 실제 현실의 간극에서 혼란을 겪는다. 완벽한 사랑 유형은 반대로 상대에게 높은 기대치를 부여한다.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서 이상을 추구하기 때문
시기심은 인간이 지닌 감정 중에서도 가장 본능적이고 동시에 복합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명망 높은 이가 한순간에 스캔들에 휘말려 무너질 때,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그의 불운을 곱씹으며 비난에 열을 올린다. 권좌에 오른 이가 흔들릴 때 느끼는 은근한 쾌감은 부인하기 어려운 어두운 면이다. 예나 지금이나 잘나 보이는 이들의 결점과 추락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심리는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시선이 쏠리는 이유는 “그들도 나와 다르지 않다”는 안도감을 얻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의 시기심은 이 지점에서 더욱 복잡해진다. 그 누구보다 우월하고 싶다는 절박한 욕구가 깔려 있으며, 자기 내면에 고착된 열등감과 끝없이 충돌한다. 시기심이 의식 위로 드러나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부
이전 글에서는 이별 뒤 우리가 왜 ‘확실함’에 매달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회복’을 우선해야 하는지를 살펴보았다. 이별이라는 아픈 경험 속에서도 결국 내 마음을 돌보고, 자존감을 지키며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야말로 진정한 해결책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번 글에서는 그 연장선에서, 이별만큼이나 인생 전반에서 늘 마주치게 되는 불확실성을 어떻게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이야기하려 한다. “내가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를 중심에 두고, 불확실성의 두려움을 줄이면서도 나만의 속도를 지켜내는 몇 가지 실천 방법을 제안할 것이다. 작지만 분명한 목표들을 통해 성취감을 쌓아가는 과정이 왜 중요한지, 주변의 현실적인 도움을 언제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도 함께 살펴본다. 결국 이 글에서 강조하고 싶
어린 시절의 ‘엄마 기준’이 성인이 된 내 삶을 좌우한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사소한 결정에도 엄마가 개입하는 환경”이 얼마나 딸의 자율성과 정체성 형성에 악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통제와 비난에 익숙해진 딸이 성장하여 사회에 나갔을 때, 또는 연애나 결혼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맺었을 때, 어린 시절에 굳어져 버린 잘못된 사고방식과 대인관계 패턴이 재현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직장에서 팀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스스로 의견을 내는 대신 “이 팀장님이 원하는 대로 해야지”라는 식으로 눈치만 보거나, 연인 관계에서 “내가 이 사람 뜻을 거스르면 버림받을 거야”라는 비합리적 두려움에 사로잡혀 상대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등, 수많은 상황에서 동일한 문제
연애가 도무지 풀리지 않아 답답함을 느낀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혼자일 땐 별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막상 연애만 하면 의존적이 되거나, 다른 사람들은 잘만 하는 연애를 왜 나만 못하느냐는 생각이 드는 사람도 많다. 사실 이런 고민에는 많은 이유가 뒤섞여 있지만, 그중 하나로 ‘연애 성향’을 꼽을 수 있다. 자신이 무의식중에 어떤 사랑을 꿈꾸고 있으며, 어떠한 방식을 통해 상대에게 다가서는지를 조금만 들여다봐도 매번 반복되는 문제나 고민의 근본 원인을 찾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 글은 크게 네 가지 연애 성향으로 나누어 각기 다른 연애 패턴을 보여주고 있다. 낭만적 사랑을 꿈꾸는 사람도 있고,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으며, 철저히 준비된 상태가 되기 전까지는 연애를 미루는 사람, 그리고 현실적인 면을 중시하는 사람 등 다양한